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18장 의역 (완) (나귀 축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26. 13:28

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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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8장 깨우침


         
18장 개괄

 

 

 

18장 1절에서는 당나귀를 두고 축제를 벌인 사람들의 진술이 담겨 있다.

이때 나타나는 진술들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곰곰히 살펴보면, 차라투스트라에게 자신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교황과 그림자, 배우, 양심적인 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존재를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따를 만한 존재, 종교적 신이 아닌 올바름과 관련된 신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장 추악한 자는 자신이 죽인 신을 되살렸다고 언급되는데, 본인이 말하는 걸 보면, 애초에 신이 죽지 않았던 것처럼 진술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추악한 자가 신을 다시 고안할 때, 참고한 것은 앞서 「차라투스트라, 4권 17장」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당나귀라는 형상만 취하고 있을 뿐, 결국 차라투스트라를 신적인 존재로서 긍정하고 있다고 생각해봄직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초반에 이들의 숭배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지만, 사람들의 진술로 볼 때,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단순히 우상이나 종교적 신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마침내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긍정하고, 이들이 자신과 같지 않기에, 어떤 숭배할 물상(여기선 당나귀)을 고안해서 노력하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식으로든, 당나귀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이상적인 미래를 향하는 데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손님들을 이해하고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1-

 

기도문을 듣던 차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나귀보다 큰 목소리로 직접 “예-“라고 외치며, 사람들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제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여,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외치며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을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여러분은 새로운 신앙을 가진 신성모독자이거나 모든 늙은이들 가운데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늙은 교황이여,

     당신이 여기서 당나귀를 신으로 숭배한다는 것이 당신에게 알맞다고 생각되십니까?”

 

교황이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나를 용서하라.

     하지만 신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지 않은가?

     이는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 형상도 없는 허구적인 신을 섬기는 것보다는 형상을 지닌 존재인 이 당나귀*를 숭배하는 것이 더 낫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라.

     나의 고귀한 친구여.

     넌 이 말 속에 올바른 통찰이 담겨 있음을 알 것이다.

 *17장 3절에서 언급된 당나귀의 특징은 위버멘쉬의 특징과 같다.

그런 면에서 늙은 교황은 위버멘쉬를 찬양하고 있는데, 좀 더 직관적일 수 있게 당나귀를 두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영적인 것이라고 말했던 자는 그 누구보다도 신성을 모독하는 자가 아닌가?

     신은 영적인 것이라는 말은 사실 타당하지 않은 말이니.

 

     나의 늙은 심장은 이 지상에서 숭배할 것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 춤추고 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늙고 경건한 나의 심장을 용서해달라.”

 

차라투스트라는 그림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나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지금 보이는 모습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따를 때보다 더 열렬한것 같습니다.

     당신이 정말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라면, 그야말로 풋내기로군요!”

 

그림자가 말했다.

    “맞다. 그때보다 더 열렬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기독교의 신에 의해 가려졌던 옛 신, 올바르게 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신*이 다시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너가 무슨 말을 해도 상관이 없다.

*위버멘쉬를 말한다.

 

     가장 추악한 인간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그가 신을 부활시켰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죽였다고 했지만, 신의 죽음은 인간에게 너무 섣부르며 그릇된 판단이다.”

.

교황과 그림자

이들은 추악한 자에 따라 당나귀를 숭배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늙은 배우에게 말했다.

    “늙은 배우여, 당신은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이 자유로운 시대에 다시 신을 숭배한다면, 누가 당신을 믿겠습니까?

 

     당신이 신을 다시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떻게 당신처럼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사람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늙은 배우가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의 말이 맞다.

     신을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그래서 당나귀를 찬양하는 건 내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옳다고 여겨 찬양하고 있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양심적인 자에게 말했다.

    “양심적인 자여,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해서 거슬리는 것이 전혀 없습니까?

     당신의 정신은 이런 숭배를 하는데 있어 너무 순수하지 않습니까?”

 

양심적인 자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당나귀를 숭배하는 것에는 내 양심을 만족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신이란 것을 믿어선 안 되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숭배하는 신이 가장 믿을 만한 신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에 의하면, 신은 영원해야 한다.

     이처럼 영원한 존재는 조급하지 않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다.

     가능한 천천히, 그리고 효율적이지 못하게 말이다.

     그렇게 나아가는 자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이해하는 자일수록, 자신을 어리석고 바보같이 느끼게 행동한다.

     차라투스트라여 너 자신을 두고 생각해보라.

     너도 과도한 지혜와 풍요로움으로 인해 당나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이 당나귀와 비슷하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위버멘쉬, 당나귀의 모습이 유사함을 보여준다.

 

     완전한 현자도 당나귀도 굽은 길도 기꺼이 나아가지 않는가*?

     너의 모습도 그러하지 않은가*?"

*굽은 길은 이상 사회로 곧바로 나아가지 못하는 길을 말한다.

그래서 이 길은 고단하다.

이 고단한 길을 당나귀도 현자도 차라투스트라도 걸어나간다.

이 부분 역시 앞에서와 같이 당나귀와 현자, 차라투스트라가 동일선상의 존재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귀와 차라투스트라

이 두 존재는 곧은 길이든 굽은 길이든 마다하지 않고 나아간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추악한 자에게 말했다.

가장 추악한 자는 땅에 누워서 당나귀가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그릇을 들고 있었다.

 

    “가장 추악한 자여, 당신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당신은 제게 변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숭고한 자의 망토가 당신의 추함을 감싸고 있군요.

     당신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가장 추악한 자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자신의 모습을 경멸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난 채로 자기 경멸과 혐오 속에서 지내고 있는 존재다.

종교적 규율을 벗어난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과 같기에, 가장 추악한 자는 신을 죽인 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현재 맥락 상으로 볼 때, 가장 추악한 자가 신을 되살렸다고 하므로, 변절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저들은 당신이 신을 부활시켰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왜 그런 것입니까?

     그는 이유가 있어서 죽었던 것 아닙니까?

     제게는 당신이 뭔가를 깨달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일을 한 것입니까?

     어떤 부분에서 신의 죽음을 돌이킨 것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바꾼 것입니까?
     말해 보십시오, 가장 추악한 자여.”

 

가장 추악한 자가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사기꾼이다.

 

     신이 아직 살아있는지, 아니면 다시 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죽은 것인지

     우리 중 누가 그걸 가장 잘 알겠는가?

     대답해 보라.

     아마 우리 중 누구도 정확히 모를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안다.

     너는 전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지.

     가장 철저하게 살해하고 싶어하는 자는 웃는다고 말이다.

 

     너는 사람은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죽인다고 말하지 않았나?

     오 차라투스트라여,

     이 은둔자,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파괴하는 위험한 성자여.

     너는 사기꾼*이구나!”

*차라투스트라는 1권 7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죽인다. 
     자, 저 중력의 정신을 우리가 죽여버리자.

여기서 웃음으로 죽인다는 것은 '분노하여 서로 다투지 말고 무시하자/웃어넘기자'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따라서 보면, 웃음으로 죽이는 것은 실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외면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부조리하고 그릇된 신을 외면한 것이다.

이는 신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죽이려고/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란 이야기가 된다.

이점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사기꾼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신이라는 것이 필요에 따라 신이 고안될 수 있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추앙할 것을 찾던 고귀한 자들은 새로운 신을 당나귀에 고안하게 된 것이다.

 

왕을 피신시키는 신하

가장 추악한 자는 차라투스트라가 신을 죽이지 않고, 그에게 변화할 기회를 주었다고 여긴다.


 

-2-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기막히는 대답들에 놀라서, 동굴의 입구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손님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오, 이 교활한 자들, 내게 악의적인 자들이여!

     제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렇게 숨기고 속이려 드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저를 속이려는 악의로,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기쁨으로 심장을 두근거려 하며,

     마침대 다시 어리석은 자가 되었군요.

     다시 무언가를 추종하고 숭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기도하고 손을 모아 신을 찬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이 동굴에 두고, 모두 바깥으로 나가 정신을 차리길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이 숭배하고 추종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신이 말하는 천국에 나아갈 수 없겠죠.

     (차라투스트라는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 말하는 천국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숙한 존재,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으니, 현생에서의 만족을 바라지 않습니까?”

 

분노하는 차라투스트라

사람들이 새로운 신을 숭배하는 미숙한 존재로 퇴화했다고 여긴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3-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말했다.

    “오 나의 친구들, 기이하며 고귀한 자들이여,

     곰곰히 생각해보니, 여러분이 당나귀를 숭배하는 모습은 제게 참 마음에 드는 모습*입니다.

*마침내 차라투스트라는 고귀한 자들의 당나귀 숭배가 단순히 신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위버멘쉬를 기리기 위한 행동임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보니 여러분은 정말로 성장했군요.

     여러분과 같이 성장한 자들에게는 새로운 축제가 필요합니다.

     사소하지만 용감한, 무의미한 시도들,

     종교적인 의식과 나귀를 추종하는 축제,

     보수적 성향의 차라투스트라 같은 광대,

     여러분의 영혼을 맑게 해줄 바람.

     이것들이 필요합니다.

 

     이 밤에 벌인 당나귀 축제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고귀한 자들이여!
     당나귀 축제는 여러분이 제 가르침을 들으면서 발견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것을 좋은 징조로 받아들입니다.

     당나귀 축제를 발견하는 것은 절망을 이겨내고 삶을 긍정하려는 자들만이 발견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이 당나귀 축제를 다시 벌인다면,

     여러분을 위해서, 또 저를 위해서 이 축제를 다시 벌이길 바랍니다.

     저를 기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귀 축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손님들이 왜 나귀를 추종한 것인지 알아차리면서,

이를 이상적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신호로 보게 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모인 사람들은 새로운 신앙으로 가장 악의적인 신 모독자가 되나?

ㅡ현재의 모습이 새로운 우상을 숭배하는 상태로 보여 질 것이기 때문이다.

ㅡ이는 종교적 규율이 자리하는 사회에서는 신성 모독으로 취급될 것이다.

 

교황은 형태가 없는 신을 경배하기보다는 형태를 갖춘 신을 경배하겠다고 하는데, 왜 여기에 지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는 걸까?

ㅡ형태가 없는 신은 정신으로만 가늠되는 존재를 말한다.

ㅡ이러한 것은 허구적인 것이므로, 이런 허구적인 것을 따를 바에는 형체를 지니는 당나귀 신을 따르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즉 상상물보다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따르는 게 더 낫다는 이야기다.

 

‘신은 정신이다’라고 말했던 자는 왜 무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에 큰 도약을 한 것인가?

ㅡ’신은 정신이다’라는 말은 신이 상상물이나 사유물이란 이야기고, 이는 즉 허구적 존재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게 된다.

ㅡ이는 신과 도깨비가 같은 선상의 것임을 말하는 것, 즉 신이 허구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ㅡ즉 신에 대한 고도의 부정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ㅡ그래서 신을 믿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지상에서는 쉽사리 주워 담을 수 없다”고 표현한다.

 

지상에 경배할 뭔가가 있다는 사실에 왜 교황은 심장이 뛰는가?

ㅡ지상에 경배할 것이 있다는 것은 지상에서 자신이 따를 만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ㅡ기본적으로 지상/현생에서는 절망이 가득하여, 지상에는 경배할 대상이 없고, 그래서 허구적 존재를 상상하여 종교가 나타나게 된다.

ㅡ이런 상황에서 교황에게 이 절망을 이기게 하고, 따라 볼만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므로, 현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을 마주하여 심장이 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ㅡ여기까지 보면, 일반적인 우상숭배의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지만, 하나 덧대어보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현생에서의 희망을 제시하기 때문에, 교황이 숭배하는 것이 당나귀라고 할 지라도, 결국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적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그림자에게 자신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르지만 착각하는 거라고 지적하나?

ㅡ그림자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을 사는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라고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유정신인 자신과 다른 행동을 하는 이 그림자를 두고서 자유정신을 지닌 자로서의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고약한 갈색 피부의 소녀는 누굴 말하나?

ㅡ사막의 딸들로 나왔던 두 여자를 말하는데, 운명과 지혜라는 여자를 지칭한다고 보인다.

ㅡ그림자는 운명과 지혜에 대해서 이상적 미래에 이바지하기를 고대했었는데, 이때 운명을 찬양하는 것보다 당나귀를 숭배하는 것에 더 열성이라고 지적 받는 것이다.

 

왜 그림자는 고약한 풋내기 신자인가?

ㅡ그림자는 사막의 딸들, 운명과 지혜를 숭배하는 자로서 언급이 되었다.

ㅡ그렇지만 현재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우상처럼 보이는 당나귀를 숭배하고 있다.

ㅡ이렇다 보니 운명을 따르다가 너무 쉽게 변절한 풋내기 신자로 보여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림자는 왜 옛 신이 되살아났다고 말하나?

ㅡ그림자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다.

ㅡ그렇기에 그림자는 굳이 신을 숭배한다면, 올바름을 관장하는 신, 올바름에 따라 행동하는 신을 원한다.

 

ㅡ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해 보면, 기독교적 신이 차라투스트라가 사는 시대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ㅡ하지만 이 기독교적 신이 있기 전에도 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ㅡ이 신을 올바름을 추구하는 창조자들로 봐야 할지, 아니면 디오니소스와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할 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신 이전에 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ㅡ왜냐면 가치를 창조하던 초기 올바름 추구자들은 기독교가 있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들이고, 디오니소스도 기독교적 신보다도 앞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어쨌든 이 올바름과 관련된 신은 기독교적 신보다도 앞서 존재하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러므로 여기서 언급되는 옛 신은 기독교적 신이 아니라, 올바름과 관련된 신이라고 해도 무방해진다.

ㅡ그리고 이런 신이라면 되살아났을 때, 고귀한 자들/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 따를만 하다.

 

신들에게 죽음이란 편견이란 이야기는 무얼 말하나?

ㅡ가장 추악한 자는 신을 죽였다고 말했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죽는 존재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ㅡ그렇기에 자신이 신을 죽였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은 그릇된 편견일 확률이 있다.

ㅡ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늙은 배우/마술사는 왜 멍청한 짓임에도 당나귀를 숭배하는가?

ㅡ늙은 배우는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한 자다.

ㅡ그렇기에 대체로 무지몽매해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는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늙은 배우는 당나귀를 숭배하고 있다.

ㅡ이는 무지몽매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따라서 당나귀의 숭배가 올바른 것이어서 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즉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숭배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양심을 갖춘 자는 왜 연극을 말하나? 왜 양심을 좋게 하는 뭔가가 있다고 하나?

ㅡ양심을 갖춘 자는 앞서 늙은 배우가 사람들을 선동할 때에도 그릇됨을 지적한 자다.

ㅡ그렇기 때문에, 이 자가 숭배를 한다는 사실은 선동되어서 그렇다기 보다는 어떤 확실한 좋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ㅡ그리고 양심을 갖춘 자는 올바름에 따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에, 올바름에 따르려는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지 않아서 따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연극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여기서 연극이 언급되는 이유는 당나귀를 숭배하는 것이 진정한 숭배는 아니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앞서 늙은 배우가 사람들을 선동할 때,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 모인 손님들은 자신들이 추종할 다른 존재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ㅡ즉 동굴에 모인 사람들은 추종할 존재가 없는 상태보다는 있는 상태가 더 좋다고 보는 것이다.

ㅡ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추종이나 숭배를 할 정도로 일반적이며 분별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ㅡ그렇기에 자신들의 행동을 자각하고 있고, 자신들의 행동이 이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감수하며 숭배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ㅡ그렇기에 정말 숭배한다기 보다는 숭배할 뭔가가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나으므로, 숭배를 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를 연기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그냥 곁에 두고 익히려고 한다면, 너무 자유와 개인의 능력을 추구하므로, 어렵게 느껴진다면, 당나귀라는 존재로 차라투스트라를 치환하고, 그에 따라서 숭배하면 오히려 쉽다고 여기는 것인 셈이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당나귀에 적용된 것이므로, 양심적인 자가 당나귀를 숭배하면서 자신의 양심에 좋게 작용하는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양심적인 자는 신을 믿어선 안 되나? 왜 이런 형태의 신이 가장 믿음직스럽게 여겨진다고 하나?

ㅡ양심적인 자는 우선 신이 허구라는 것을 알며, 그래서 믿지 않는다.

ㅡ왜냐면 허구를 믿고 따르는 것은 이 양심적인 자의 양심을 가책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허구를 피하지만, 양심적인 자는 허구를 믿고 따르는 것에 부정적인 자신의 양심 때문에 허구를 피한다.

 

ㅡ이런 양심적인 자가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은 허구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말로만 희망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희망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ㅡ그런 점에서 당나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기에, 양심적인 자가 신으로서 숭배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리고 이 현실성이 양심적인 자가 당나귀 신을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왜 가장 경건한 자들은 신은 영원해야 한다고 증언하나?

ㅡ신이라는 것은 영원 불멸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왜 시간을 가진 자는 느긋하다고 하는가?

ㅡ신이라는 것이 영원 속에 있는 존재라면, 인간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신의 계획 하에 있는 인간은 신이 너무 느리게/느긋하게 나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신에게는 순서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조급할 이유가 없다.

 

ㅡ이러한 느긋함은 효율적으로 나아가는 것보다는 결과에 이르는 시1간이 늦지만, 이 과정에서 계획하던 것 외의 다양한 것들을 산출해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너무 많은 정신을 소유한 자는 어리석음과 바보스러움에 빠져들고 싶어하나?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자신을 생각해 보라고 하나?

ㅡ여기서 정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여러 성향의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ㅡ이와 비슷한 내용이 한 번 나온 적이 있는데, 「차라투스트라, 1권 8장」이 그러하다.

젊은이가 소리쳤다.

       "그렇지요, 악 속으로!

        어떻게 그대는 내 영혼을 알아차린 거죠?"

 

    차라투스트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많은 영혼을 우리는 결코 알아차릴 수 없을 걸세.

        그 영혼들을 우리가 먼저 꾸며내지 않는다면(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말

        일세.

ㅡ여기서 젊은이는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알아차렸냐고 묻는데, 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영혼이라서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ㅡ이를 통해서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개성 있는 영혼을 거쳐서 지금의 영혼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고, 이는 여러 영혼을 소유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볼 수 있다.

ㅡ영혼과 정신을 동일하게 바라본다면, 여러 정신을 소유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ㅡ따라서 여러 정신을 소유한다는 것이 여러 성향을 이해한다는 것이 된다.

ㅡ여러 성향을 이해하게 되면, 그 성향들과 함께 할 때 자신에게 벌어질 상황을 전망하게 되는데, 이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인식하게 된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 3권 6장」에서 다음의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내 침묵이 침묵을 통해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악의이자 기술이다.

ㅡ이러한 것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고, 어리석은 존재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버텨 나가려고 했던 모습과 같다; 「차라투스트라, 3권 9장」

     그리고 저들이 나를 오해했을 때에도 바보인 나는 나보다도 오히려 저들을

     감쌌다.

     나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는 데 익숙해 있었고, 저들을 감싸는 나 자신에게 종

     종 분풀이를 하면서.

ㅡ이처럼 다양한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상태에서 올바른 것을 수행하려는 생각에 바보같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ㅡ이러한 모습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이기에, 자신이 바보스러워진 것과 차라투스트라가 바보스러운 것이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가 충일함과 지혜로움으로 인하여 나귀가 될 수 있다고 하나? 차라투스트라의 겉모습은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ㅡ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을 보면 당나귀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한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지혜에 따라 이상적 미래를 구현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때 그것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노력하기 때문이다.

ㅡ이처럼 자신에게 실현되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굽은 길을 간다고 말하는데(왜냐면 곧은 길은 목표로 바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길이 곧든 굽든 나아간다.

ㅡ이러한 특징은 나귀의 모습과 비슷하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와 나귀가 동일한 존재이지만, 숭배한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대립되는 존재로서 인식된다.

ㅡ이러한 복합성에 따라, 이제까지 나귀에 대한 숭배에 부정적이던 차라투스트라가 3절에서 해석을 다르게 한다고 볼 수 있다.

 

ㅡ굽은 길에 대해서는 아래의 내용을 참고하자; 「차라투스트라, 3권 15장」

     나는 그대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그대는 내 도약을 피해 달아나버렸다.

     달아나며 휘날리던 그대의 머리채가 나를 향해 혀처럼 날름거렸다!

 

     나는 그대와 그대의 뱀으로부터 뛰어 달아났다.

     그때 이미 그대는 몸을 반쯤 돌린 채 서 있었다.

     눈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대는 굽은 눈길로 내게 굽은 길을 가르치

     는구나.

     굽은 길에서 내 발은 계략을 배우고 있고!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추악한 자가 변했다고 왜 말하나?

ㅡ그림자의 말로 볼 때, 죽었던 신을 되살린 것이 가장 추악한 자다.

ㅡ이 추악한 자는 자신이 죽인 존재를 되살린 것인데, 이는 심경의 변화로 인하여 그런 것이라고 본 듯하다.

 

왜 고매함의 외투가 추악함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나?

ㅡ이 이야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본래 추악한 자는 고매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추악한 자를 보고서 무언가 고매해졌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ㅡ이 고매함이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ㅡ왜냐면 죽인 신을 다시 살린 것이므로, 종교적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추악한 자는 왜 신의 생존, 부활, 죽음의 여부를 차라투스트라에게 다시 묻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영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중력의 영에 분노하기보다는 웃음으로 죽이자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7장」

     사람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죽인다.

     자, 저 중력의 정신을 우리가 죽여버리자.

 

ㅡ중력의 영은 사회적 규율과 더불어 종교적 규율을 포함한다.

ㅡ그러므로 중력의 영을 죽이는 것은 신을 죽이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ㅡ따라서 중력의 영을 죽이는 방법은 신을 죽이는 방법인 것이다.

 

ㅡ문제는 웃음으로 죽인다는 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웃음으로 죽인다는 것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에도 꿈쩍하지 않고 무시한다는 뉘앙스를 갖기 때문이다.

ㅡ즉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지, 완전히 파괴시킨 것은 아닌 셈이다.

ㅡ사실 파괴한다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 가치 없게 여기며 무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파괴법이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실제로 신이라던가 종교는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웃음을 통해서 죽인다는 말을 하였고, 그에 따라서 신을 죽였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실제로 신이 파괴되었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ㅡ이런 점을 면밀히 살피면, 차라투스트라가 신에게 변화할/개과천선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 상황에서 가장 추악한 자는 새로운 형태의 믿을 만한 신을 고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고, 이와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나귀에 가르침을 녹여 내면서 나귀를 숭배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가장 추악한 자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들에게 사기를 친 존재처럼 여겨질 수 있고, 신에게 기회를 준 자처럼 여겨지게 된다.

ㅡ그래서 가장 위험한 성자이자 무뢰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ㅡ즉 신을 지키기 위해서 신을 웃음으로 죽인 성자가, 사람들에게 신이 죽었다고 퍼뜨린 무뢰한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장이 쾌락과 악의로 허우적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ㅡ현재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만하려고 한다고 보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 그들은 악의를 품고서 즐거워하고 있다고 본다.

ㅡ이를 언급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애들의 방을 떠나서 바깥에서 소란을 식히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손님들이 그릇된 생각에 잘못 빠져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

ㅡ사람이 생각을 잘못해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회를 주고 있는 모양새로 볼 수 있다.

 

왜 아이들은 하늘나라를 원하지만, 우리 어른이 된 자들은 지상의 나라를 원한다고 하나?

ㅡ하늘나라/천국은 허구적인 것이며, 상상에 기반한 것이다.

ㅡ그런 측면에서 이런 것을 믿는 것은 아이 같은 자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ㅡ어른이 된 자들은 허구와 참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존재는 현생에서의 행복과 낙원인 올바름이 구현된 이상적인 미래를 바라게 된다.

ㅡ이를 지상의 나라라고 표현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갑자기 자신의 손님들이 마음에 든다고 표현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제까지 숭배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지적을 하였지, 왜 숭배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왜 숭배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ㅡ그러다가 다시 생각했을 때, 저들이 숭배하는 행위를 한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숭배하는 대상이 자신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던 추종의 방식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낸 것이라고 본다.

ㅡ왜냐면 저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아니기에, 완전히 차라투스트라처럼 올바름을 추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ㅡ자신의 손님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차라투스트라가 그들을 다시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자신의 손님들에게 새로운 축제가 필요하다고 하나? 작지만 대담한 무의미, 예배와 나귀 축제, 차라투스트라-바보, 영혼을 밝혀주는 바람이 왜 필요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손님들은 차라투스트라와 다르기에,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

ㅡ이들의 경우,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올바름을 향해 더 나아갈 때, 사소하다고 볼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를 찾으려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ㅡ이는 의미가 있었기에 나타났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무의미하더라도 길을 나선 것이다.

ㅡ그러다가 차라투스트라를 만나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듣는다.

ㅡ하지만 이는 따르기 힘든 것이었고, 그들은 종교적 형태로서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전환하고,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나귀를 숭배하는 모습으로 바꾼다.

ㅡ이를 목격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숭배에 대해서 놀라고, 그들을 환기시키려고 한다.

ㅡ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나귀를 숭배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것이 나름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ㅡ이 과정은 모두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에피소드인데, 이를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기리는 축제의 과정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결과적으로 나귀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올바름을 숭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ㅡ이러한 과정이 있음으로 해서 차라투스트라의 손님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ㅡ축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아래 구절도 참고해보면 좋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9[30] 
     너희의 죄의 강물이 여전히 지구를 내리누르고 있다. 
     따라서 나는 거센 바람처럼 온다. 그러므로 나는 경멸하는 자에게 충고한다. 

     바람을 향해 침 뱉지 않도록 조심하라. 
     육신을 가진 괴물이 음침한 진창에서 거의 몸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지를 씻고 신성하게 하는 것을 나는 축제라고 부른다. 

ㅡ여기서 축제는 대지/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대지는 개인의 정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ㅡ따라서 개인에게 신성함과 경건함, 올바름에 대한 의지를 고취시키는 것을 축제라고 부른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나귀 축제를 좋은 조짐으로 받아들이나?

ㅡ이제까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귀를 숭배하는 축제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나귀로 비유하며 나타난 축제라고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알아차린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 이어질 수 있는 징조로 해석할 수 있음을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나귀 축제를 왜 손님들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벌여달라고 하나?

ㅡ나귀 축제는 올바름을 추종하는 것이며, 이 축제가 다시 벌여진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의 유의미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축제를 통해서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 바라는 것, 자신의 노력이 유의미했음을 인정받고 의미있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ㅡ나귀 축제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손님들에게도 자신들의 의지를 다잡고 삶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있기에, 본인들을 위해서라도 나귀 축제를 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