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8장 의역 (완) (자발적 거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11. 15:58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8장 자발적 거지


         
8장 개괄

 

 

8장은 올바름 추구자로서 살던 설교자를 마주하는 장이다; 이 설교자는 본래 부유했는데,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다.

이 존재는 올바름을 추구하며 얻었던 올바른 이해를 사람들에게 나누지만, 차라투스트라처럼 실패한다.

그 상황에서 설교자는 역겨운 세상을 견디는 법을 배우려고 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 되새김질을 하는 존재인 소를 찾아간다.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역겨운 세상을 견디는 법보다 역겨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존재와 다르다.

이런 차이점을 발견한 차라투스트라는 역겨운 세상을 소화해내는 위장을 갖추게 하려고 그에게 자신의 앎을 전해주려고 하게 된다.


 

 

본문

 

 

가장 추악한 사람을 떠나고, 차라투스트라는 몸이 차가워졌다.

가장 추악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푸른 목초지를 지나기도 하고, 급류가 흘렀던 흔적이 있는 돌 밭을 지나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의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떤 따뜻하고 생기 있는 것이 나를 상쾌하게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내 근처에 있음이 틀림없다.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자가 내 주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덜 외로워지고 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위로해주는 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자기 주변에 있었던 것은 암소들이었다.

암소들의 모습과 체취가 차라투스트라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암소들이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차라투스트라가 이 암소들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는 암소들 사이에서 나오는 사람의 소리를 들었다.

암소들은 모두 사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암소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암소들을 물러나게 했다.

왜냐면, 누군가 사고를 당해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암소들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오판이었다.

왜냐하면, 한 남자가 땅에 앉아서 암소들에게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눈을 통해서 선량함을 설교하는 평화추구자, 산에서 설교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푸른 초원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의 영역을 넘어서면서 생기로움을 통해 다시 마음이 따스해지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당혹해하며 물었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그가 말했다.

    “내가 찾고 있는 것?

     너가 찾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방해꾼아.

     이 땅에서의 행복 말이다.

 

     나는 이 소들로부터 이 땅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반나절동안 그들에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들이 이제 내게 다가와 알려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왜 방해한 것인가?

 

     우리는 암소처럼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되새김질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만약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혐오감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부조리가 역겨워도 참지 않으면

 

     오늘날 누가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가?

     하지만 이 소들을 보라.

     이 소들은 혐오감에 구역질하지 않고, 되새김질하지 않는가?”

 

설교자는 암소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차라투스트라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자는 누구인가!

     이 사람은 혐오가 없는 자,

     영원회귀를 통해서 큰 혐오를 극복한 자,

     차라투스트라 아닌가!

     아,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눈, 이것이 그의 입, 이것이 그의 마음이구나.”

 

설교자는 그렇게 말하며, 차라투스트라의 손에 입맞춤을 했다.

행복의 눈물을 쏟아내면서.

그리고 그는 보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암소들은 이것을 보며 놀랐다.

 

암소들 사이의 설교자

설교자는 역겨운 세상 속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암소들을 찾아왔다.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행동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저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독특하면서 사랑스러운 자여.

     먼저 당신에 대해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스스로 사회를 벗어난 자가 아닙니까?

     한때 당신은 사회에서 명망있는 자였죠.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부유함을 부끄러워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풍요로움과 마음을 주려고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설교자가 말했다.

    “그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지.

     그래서 나는 동물들에게, 암소들에게 가게 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설교자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이를 통해서 당신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누군가에게 정말 잘 주는 것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는 것,

     주는 것은 선함의 최종적인 모습이며, 가장 어려운 기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설교자가 말했다.

    “특히 요즘에는 더 어려워졌다.

      

     오늘날 천박한 것이 반란을 일으켜서 고상한 것인 양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천박한 방식으로 말이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은 천박한 자들이 지배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천박한 문화는 지금도 점차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래서 천박한 문화를 지적하거나 고상한 문화를 알리려고 하면, 천박한 자들이 분개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앎을 나누려는 자가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가진 것은 많으나,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물병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물병의 목을 부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보면서 탐욕스러운 욕망, 질투, 복수심, 자부심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가난한 자들, 가진 것이 적은 자들이 복된 자/정결하고 소박한 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천국*은 소와 같은 자들, 구역질하지 않고 되새김하는 자들 사이에 있다.”

*여기서 천국은 현생에서의 행복을 말한다.

현생에서 그나마 행복하게 살려면, 역겨움을 느끼지 않고, 역겨움을 활용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사회 부조리에 따른 역겨움이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나타나는 처세술이다.

 

설교자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암소들이 설교자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설교자에게 다가가는 소들을 막으며 설교자를 떠보기 위해서 질문했다.

    “천국은 왜 부유한 자들 사이에 있지 않습니까?”

 

설교자가 말했다.

    “너는 나를 시험하려고 하는가?

     너가 나보다 그 이유를 잘 알지 않는가?

     무엇이 우리를 가난한 자에게 이끌었나?

     그것은 부유한 자들에 대한 혐오 아니었는가?

 

     돈의 노예들, 어디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이익을 얻으려고 계산하는 자들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는가?

     돈을 위해 그릇된 것을 서슴없이 행하며, 그것을 옳다고 하는 자들에 대한 혐오 아니었는가?

     그릇된 것을 올바르고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저 천박한 자들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는가?

     그들의 조상은 서슴없이 훔치며, 그릇된 것을 취하고, 더러운 것을 모으는 자들이었으리라.

     올바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순종적이면서 음란하고 쉽게 잊는 여자를 가진 자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나?

     이 여자들이 창부가 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천박하다!

     오늘날 부유한 것과 가난한 것이 무슨 차이가 있나?

     그래서 나는 사회를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이 소들, 구역질하지 않고 되새김질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른 것이다.”

 

이렇게 말한 설교자는 헐떡이며 땀을 흘렸고, 소들은 설교자의 모습에 놀랐다.

 

천국의 문

설교자가 보기에 천국의 문은 소들에게 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가 그렇게 격앙되어 말하는 동안 계속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그런 강한 말을 할 때, 당신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여.

 

     당신의 입과 눈은 부조리한 것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당신의 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조리한 것을 게워내려고 할 테니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부조리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올바른 것을 보고 경험하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사람인 것이죠.”

 

설교자는 보다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를 잘 파악했다.

     나는 올바른 이해를 바란다.

     내 입에는 올바른 것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 빈둥거리며 게으름 피우는 사람들을 위한 일,

     효율적이지 않지만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소들, 구역질하지 않는 자들이 행복을 향해 가장 멀리 나아간 존재들이다.

     그들은 구역질하지 않는 법과 올바른 이해를 찾지 않고 그저 느끼는 법을 발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양시키는 생각을 모두 멀리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은 제 동물들도 봐야 합니다.

     저의 독수리와 뱀*을 말입니다.

*독수리와 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암소보다는 독수리와 뱀을 닮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독수리와 뱀은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 긍지와 지혜를 나타낸다.

즉 올바름을 향해서 노력하는 게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이야기다.

 

     그들과 같은 존재는 오늘날 이 땅에 없습니다.

     이 땅 위에 긍지와 지혜가 머무는 곳이 없으니까요.

 

     저 길은 제 동굴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제 동굴로 와서 제 동굴의 손님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 동물들과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바랍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말입니다.

 

     지금 저는 당신을 떠나야 합니다.

     저를 찾는 긴급한 외침이 들렸기 때문이죠.

 

     당신은 제 동굴에서 제가 찾은 새로운 앎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취하길 바랍니다.

 

     이제 당신의 소와 작별하시길.

     당신, 독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자여.

     소와 작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친구이자 스승이었으니까요."

 

설교자가 말했다.

    “하나를 제외하면, 너의 말이 맞다.

     나는 소보다도 선한 존재, 너 차라투스트라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화를 내며 외쳤다.

    “이 악랄한 아첨꾼이여!

     칭찬과 아첨으로 나를 망치려고 하는 겁니까?

     제게서 떠나십쇼!”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지팡이를 설교자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설교자는 빠르게 도망쳤다.

 

차라투스트라와 설교자

차라투스트라는 설교자를 자신의 동굴로 초대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암소들은 어떤 존재인가? 설교자는 암소들에게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나?

ㅡ역겨운 세상 속에서도 역겨워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으며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ㅡ이들은 무언가를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집중해서 보지 않는다.

ㅡ그저 살면서 올바르다고 느끼는 것에 따르며 살 뿐, 사회의 그릇된 걸 파헤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ㅡ설교자는 이러한 존재들의 소박한 삶을 배우려고 하게 된다.

 

왜 암소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나?

ㅡ암소들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저주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ㅡ그야말로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

ㅡ어떤 불만도 삼켜내고 살아가는 존재로, 이런 존재들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듯하다.

 

되새김질은 무엇을 말하나?

ㅡ역겨움을 느끼더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ㅡ기본적으로 사회가 주는 역겨움, 혐오감은 표출되기 마련인데, 이로써 스트레스를 받게 되므로, 차라리 역겨움을 스스로 해소할 수 있는 자정능력이 있으면 좋은데, 되새김질이 그러한 능력으로 주목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크나큰 구역질을 극복한 자라고 언급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크나큰 구역질은 자기 운명에 대한 혐오라고 할 수 있다.

ㅡ암소들의 경우, 구역질을 되새김질로 전환하는데, 이때 암소들의 구역질은 앞서 말한 것처럼 부조리에 대해서 파고들지 않으면서 느껴지는 불쾌감/혐오감이다.

ㅡ따라서 암소들은 사회의 부조리/역함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고, 부조리와 역함이 느껴져도 잘 피하거나 잘 외면하는 법을 터득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ㅡ반면 차라투스트라의 경우, 부조리/역함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했던 존재다.

ㅡ그 과정에서 실패했고, 그에 따라서 더 큰 자신의 운명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에 빠지게 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은 영원회귀를 통해서 극복한다.

 

ㅡ이러한 점에 따라서 암소의 구역질 극복보다는 차라투스트라의 극복이 더 엄청난 것으로 여겨지게 될 수 있다.

 

설교자는 왜 자발적 거지인가? 어떤 상징이 있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설교자는 단순히 사회에서 부유한 계층이었던 자로 보인다.

ㅡ그러다가 많은 부를 던지고 올바름을, 삶의 긍정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자다.

ㅡ이러한 측면에서는 부처의 모습이 떠오른다.

 

ㅡ또한 역겨움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불만을 재소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인데, 이는 개인이 번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중시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불교 교리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설교자는 왜 부를 벗어나나? 왜 가난한 자들에게로 도망치나? 그리고 왜 암소들에게로 가나?

ㅡ부유한 자들의 탐욕에 질렸던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서 덜 탐욕스러워 보이는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고 나선 것이다.

ㅡ하지만 가난한 자들 역시 탐욕스럽기는 매한가지였으며, 올바름을 추구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ㅡ그래서 가난한 자들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이다.

 

ㅡ암소에게로 간 것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민하면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암소들은 역겨움을 되새김질하고, 태양 빛을 즐기는 존재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설교자에게 암소가 실제로 어떤 존재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동물로 여겨진 듯하다.

ㅡ즉 처세를 얻기 위해서 나아간 것이다.

 

제대로 주는 것이 왜 받는 것보다 더 어려운가?

ㅡ차라투스트라와 설교자가 실패한 이유는 주었는데, 적절한 피드백이 오지 않아서다.

ㅡ즉, 올바름을 알려주었으면,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더라도, 올바름을 알게 됨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ㅡ하지만 진정한 주는 것은 이런 행동의 변화가 없어도 주는 것이어야 한다.

ㅡ그야말로 바라는 것 없이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굉장히 어렵다.

ㅡ그래서 궁극의 기술로 표현되는 것이다.

 

저급한 모든 것이 반란을 일으켰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왜 이 반란은 점점 커지고 있나?

ㅡ저급한 것들이 올바른 것인 양 취급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ㅡ저급한 것들, 그릇된 것들이 상식이 되어지고, 그러면서 점차 이상한 상식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자선행위와 기부는 왜 분개를 사게 되나?

ㅡ여기서 말하는 자선행위와 기부가 물질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흐름상으로는 정신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ㅡ그렇게 치면, 차라투스트라가 앎을 나눴던 것과 같은 자선/기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즉 올바른 앎을 나누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사회에서 반기지 않으므로, 분개를 사게 된다고 표현한 듯하다.

 

배는 불룩하되 목은 지나치게 가는 병으로 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자는 누구인가? 왜 이 물병의 목을 부러뜨리나?

ㅡ이 존재는 가진 것은 많지만,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

ㅡ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존재를 보면, 어서 물을 마시고 싶은데 못 마시는 답답함에 물병의 목을 부숴버린다는 것이다.

 

ㅡ이 상황을 놓고 보면, 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자는 올바름을 알리는 자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ㅡ사람들에게 올바름을 전하지만, 실제로 전해지는 올바름은 만족감보다는 불편함을 더 주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사람들은 올바름을 제공하는 자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경향을 보일 텐데, 이러한 면을 목을 부러뜨린다고 표현한 듯하다.

 

ㅡ또 물을 똑똑 떨어뜨린다는 것은 각성하게 만드는 행위로 볼 수도 있기에, 올바름을 알리는 자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왜 더 진실이 아닌가?

ㅡ설교자는 부유한 자들의 탐욕에 질렸는데, 알고 봤더니 가난한 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왜 부유한 자들의 조상이 좀도둑, 시체 먹는 새, 쓰레기 줍는 자, 음탕한 아내를 둔 자, 금칠하고 날조하는 자라고 하나?

ㅡ부유한 자들의 탐욕스러움을 말하는 것으로, 좀도둑은 노력하지 않고 빼앗으려는 특징, 시체 먹는 새는 그릇된 것을 행하고 말하는 특징을, 더러운 것들도 취하려고 하는 특징을, 음탕한 아내는 생각하지 않고 향락적이라는 특징을, 금칠하고 날조하는 것은 그릇된 것을 옳은 것처럼 거짓말하는 특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설교자의 발언을 두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고 하며, 설교자의 입과 눈, 위장이 거침을 견딜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말하나?

ㅡ설교자는 사회의 부조리와 천박함에 대해서 격한 반응을 보인다.

ㅡ이는 사회의 부조리와 천박함에 대한 수용하기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ㅡ즉 설교자는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 존재이고, 이를 통해서 성장이 더 필요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또 수용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자신을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인데, 이는 괜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자신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왜 설교자의 위장은 육식이 아니라 부드러운 것을 바라나?

ㅡ설교자는 부조리나 그릇됨에 대해서 수용하고 있지 못하는 상태다.

ㅡ그리고 올바른 것을 바라고 있다.

ㅡ이에 따라서 육식과 부드러운 것을 대비시켜보면, 부조리나 그릇됨은 육식이고, 올바른 것은 부드러운 것으로 설교자의 취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ㅡ또 육식과 부드러운 것을 놓고 비교하면, 부드러운 것은 소화하기 쉬운 것을 말하므로, 육식은 소화하기 힘든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렇게 정리하면, 설교자는 부조리/그릇됨은 전혀 소화하지 못하고, 올바름만 소화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기에 육식과 부드러운 것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왜 시간이 한참 걸리는 일, 한가롭고 게으른 자에게 어울리는 소일거리를 찾는다고 하나? 왜 암소들이 이 일을 가장 잘하는가?

ㅡ우선 암소들은 되새김질과 햇볕을 쬐는 것, 고양시키는 생각을 멀리하는 것을 잘한다.

ㅡ되새김질은 분노/불만을 삭히는 것이고, 햇볕을 쬐는 것은 올바름에 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고양시키는 생각을 멀리하는 것은 감정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런 점으로 볼 때, 최대한 세상과 덜 엮이고 자신이 옳다는 것에 따라 소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처럼 소박한 일상을 사는 것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기에 시간이 한참 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또 한가롭고 게으른 자들의 소일거리와 입놀림 거리는 한가롭게 잡일을 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므로,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ㅡ설교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조리에 질려 암소를 찾은 것이고, 그러면서 최대한 스트레스 덜 받으며 살고 싶어서 암소를 찾은 것이므로, 이러한 해석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소들은 왜 설교자를 보며 의아하게 여기나?

ㅡ소들은 세상에 대해서 대체로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소소하게 자기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ㅡ그런 점에서 설교자가 격분하는 모습은 참 무의미한 것에 에너지를 쏟는 모양새로 볼 수 있다.

ㅡ그래서 소들이 의아하게 여긴다고 표현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