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6장 실직
6장 개괄
6장은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길을 걷다 만난 늙은 사제를 보고 불편해하지만,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사제의 말에 감복하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보는 신의 죽음과 사제가 보는 신의 죽음이 다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어떻든 간에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에 대한 불평을 하나 내놓긴 하는데, 신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불완전성을 놓고서 분노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신을 따를 바에는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나아가겠다고 하게 되고, 늙은 사제는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새로운 종류의 경건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늙은 사제는 차라투스트라와 하루라도 같이 있길 바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늙은 사제를 자신의 동굴로 초대한다.
본문
차라투스트라가 늙은 배우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보았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키가 컸는데, 얼굴은 야위고 창백했다.
그는 그 모습만으로도 차라투스트라를 불쾌하게 했다.
“오, 저기 슬픔이 변장을 하고서 앉아 있구나.
사제인 것 같은데, 저들이 도시를 벗어난 이 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인가?
늙은 배우에게서 겨우 벗어났는데, 이제는 음울한 배우가 내 앞길을 막고 있구나.
손을 얹고 주술을 부리는 자,
신의 은혜로 이상한 기적을 행하는 자,
성유를 바르고 사후를 긍정하는 자,
이 자를 악마가 데려가길!
하지만 악마는 있어야 할 곳에 늘 없지*.
항상 늦게 오는 이 저주받은 난쟁이와 절뚝발이!”
*악마는 지옥으로 죄인들을 데려간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늦게 나타나서 죄인들이 지옥에 끌려가지 않게 하고 있다.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는 저주하며, 이 검은 남자를 어떻게 외면하고 지나칠지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앉아있던 사제가 차라투스트라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상치 못한 행운이 온 것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차라투스트라에게 달려왔다.
지친 사제
신의 죽음이 나타나면서, 따를 것을 잃은 사제는 지쳐 있다.
늙은 사제가 말했다.
“너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방랑자여, 길을 잃어 배회하다 화를 입기 쉬운 이 늙은 나를 도와다오!
이 세상은 나에게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
나는 야생 동물들의 울음소리도 들었다.
사회를 벗어난 자들에게 도움을 주던 동정하는 자들도 이제는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경건했던 자, 성자이면서 은둔하는 자를 찾았었다.
그는 그의 숲에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까?
혹시 한때 온 세상이 믿었던 그 오래된 신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입니까?”
늙은 사제가 말했다.
“네가 맞다.
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이 오래된 신을 섬겼다.
하지만 이제 나의 신은 사라졌고, 그렇게 신을 섬기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고, 추억을 떠올리는 것 외에는 즐거운 일이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산에 올라 다시 축제를 벌이기로 했다.
이것이 교황, 교회의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나는 마지막 교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한 추억을 되살리며, 예배하는 축제를 열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신을 향해 끊임없이 찬양하던 홀로 머물며 경건하던 자, 숲 속의 성자*는 이제 죽고 없다.
내가 그의 오두막을 발견했을 때,
그 안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부짖던 두 마리의 늑대, 그를 사랑하던 두 마리의 늑대만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곳을 두고 나왔다.
*서문 2장에서 나오는 늙은 성자를 말한다.
‘나는 이 숲과 산에 잘못 온 것인가?’
이 의문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찾기로 결심했다.
신을 믿지 않는 자들 중 가장 경건한 자, 차라투스트라를 찾기로 한 것이다.”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앞에 서 있던 차라투스트라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늙은 교황의 손을 잡고는, 오랫동안 경탄하며 바라보았다.
숲 속 성자의 집
늙은 교황은 숲속 성자의 집에 방문했지만, 두 마리의 늑대가 죽은 숲속 성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보십시오, 경건한 자여.
이 얼마나 아름답고 긴 손입니까!
이 손은 항상 축복을 내려주던 자의 손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손을 당신이 찾고 있던 자, 나 차라투스트라가 잡고 있습니다.
저는 신을 믿지 않는 자, ‘누가 나보다 더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겠다’고 말하던 차라투스트라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교황의 생각과 속셈을 꿰뚫어 보았다.
늙은 교황이 말했다.
“신을 가장 사랑하고 소유했던 자가 그가 사라짐으로써 많은 것을 잃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와 너 중에 누가 더 신을 믿지 않는 자인가?
내가 더 믿지 않는 자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가 그것을 기뻐할 수 있겠나?”
차라투스트라는 깊은 침묵 후 물었다.
“당신은 신을 마지막까지 섬겼다고 했는데, 그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압니까?
동정이 신을 죽였다고 하던데, 그것은 사실입니까?
신은 자신을 따르던 자들이 올바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보았고,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하려던 신은
자신의 의지가 곡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동정이 되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괴로움 속에 질식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닙니까?”
늙은 교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난처해했고,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오래 생각하던 끝에 노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신을 마음에 품고 있는 듯한데, 그가 자유로울 수 있게 보내주길 바랍니다.
신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좋겠지만, 당신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당신의 신이 기이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늙은 교황은 기분이 풀렸는지 말했다.
“둘이니까 하는 이야기지만, 신에 관한 것이라면,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내 사랑은 오랜 세월 동안 신을 섬겼고, 내 의지는 신의 뜻에 따랐다.
좋은 하인이 주인이 숨기는 많은 비밀을 알듯이, 나도 신이 숨기는 많은 것을 안다.
신은 비밀로 가득 찬, 베일에 가려진 존재였다.
그의 아들의 탄생 역시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의 아들의 탄생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으로 간음이 언급되는 것이다.
신을 사랑의 신으로 찬양하는 자는 사랑에 대해서 충분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자이다.
왜냐면, 이 신은 인간의 행동을 분별해서 벌하거나 보상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 사랑하는 자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벌하지 않고 기회를 주고 기다린다.
이 신이 젊었을 적, 이 신의 종교가 융성했던 시절에 이 신은 처벌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지옥을 만들었는데, 이는 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왜냐면 신을 따르지 않으면 불행이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신의 종교가 오래 되면서, 교리는 연약해지면서, 부드러워졌고 그러면서 동정을 강조하게 되었다.
강단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부드러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할아버지에서 자애로운 할머니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쇠약해진 신은 세상에 대한 동정심을 견디지 못하고 질식하여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할머니의 모습이 된 신
늙은 교황은 종교의 강성함에 따라
단호한 아버지, 부드러운 할아버지, 자애로운 할머니의 모습으로 신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한다.
노인의 이야기 중에 차라투스트라가 끼어들었다.
“늙은 교황이여,
당신이 말한 신의 죽음을 눈으로 보았습니까?
신이 당신의 이야기처럼 죽었을 수도 있지만, 다르게 죽었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신들의 죽음은 늘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신의 이야기나 신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은 제게 맞지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신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에 대해서 더 나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저는 밝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들을 좋아하는데,
늙은 교황이여,
당신이 알다시피 신은 명확하게 일러주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사제들이 그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며 얼마나 화를 내었습니까?
그는 분노하는 존재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는 우리에게 더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요?
그저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이라면, 신은 왜 우리에게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귀를 준 것일까요?
우리의 귀가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귀에 무언가가 들어가서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것을 우리의 귀에 넣었다는 것입니까?
솜씨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 존재가 우리를 만들 때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그는 자신의 실수라고 인정하며 수용하려 하지 않고, 만들어진 존재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좋지 못한 것 아닙니까?
경건함이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좋은 경건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신이라면 꺼져라!
차라리 신이 없는 게 더 낫다.
내 힘으로 운명을 만들겠다.
사람들이 바보가 부르더라도,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서, 자기 자신이 신이 되라!’”
분노한 옹기장이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인간을 벌하고 인간에게 분노하는 신은
자신의 무능에 대한 불만을 도기에 투사하는 옹기장이로 본다.
늙은 교황이 귀를 쫑긋하며 말했다.
“내가 무얼 듣고 있는 거지!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신을 불신하고 있지만, 생각보다도 경건하다!
너 안에 어떤 신이 너를 무신앙으로 개종시킨 것이구나.
너의 경건함 자체가 세상의 어떤 신도 믿지 않게 한 것 아닌가?
너의 정직함은 너를 고정된 선악을 넘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할 것이다.
보라, 네가 너의 신에 따름으로써 너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너는 영원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 축복하는 눈과 손과 입을 지니고 있다.
영원 속에서 저 멀리 미래를 바라보며, 가르치고 축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축복이란 것이 손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신을 믿지 않는 자이지만,
나는 너에게서 먼 미래에 대한 축복의 향기를 맡는다.
그것은 내가 올바른 것을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를 즐겁게 하지만,
이제까지의 내 삶의 우둔함을 돌아보게 하여 슬프게도 한다.
하룻밤만이라도 나를 너의 손님으로 받아들여달라, 차라투스트라여.
지금은 너의 곁보다 편안한 곳이 없으니.”
차라투스트라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 길로 나아가면 제 동굴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기꺼이 그곳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왜냐면, 저는 경건한 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절박한 외침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제 영역에서 누군가 해를 입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 편안히 머물렀다가 떠날 수 있는 좋은 포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것은 부조리로 고통받는 자들이 세상을 긍정하고 이상을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갖는 우울함, 따를 것이 없어서 생기는 우울함은 제가 없애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당신에게 올바른 신을 제시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늙은 신은 이제 더는 살아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는 정말 죽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와 늙은 교황
차라투스트라와 교황은 서로에게 감명받게 되고, 차라투스트라는 교황을 자신의 동굴로 초대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사제는 성유를 바른 세계비방자인가?
ㅡ사제들은 현생보다는 사후세계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ㅡ그런 면에서 현생에서 노력하는 것을 덧없게 여기며 비방하게 된다.
악마는 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고 하는가?
ㅡ악마는 괴롭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만족하는 일을 해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악마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표현하며, 이처럼 늦게 나타나는 악마의 특징을 난쟁이와 안짱다리로서 표현하는 듯하다.
사제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법한 그 자는 누구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차라투스트라, 서문 8장」에서 나오는 노인으로 보인다.
ㅡ그는 누군가를 동정하기 위해서 도시 외곽에 자리를 하는데, 방황하는 이들이 이곳에 들리게 된다.
ㅡ그렇게 동정하면서 덕을 쌓는 것이다.
노인은 왜 경건한 추억과 예배의 축제를 열려고 하나?
ㅡ노인은 교황으로, 사제로서 신을 위해 행동해왔다.
ㅡ그렇기에 신을 향해 경건했던 시절이 추억된다.
ㅡ그 기억에 따라서, 경건한 모습을 재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ㅡ이는 노인이 누군가를 경건하게 따르는 것, 누군가를 예배하는 것을 원하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준다.
ㅡ추종자/섬기는 자로서의 자질이 드러난다.
숲속의 성자가 죽었을 때, 왜 두 마리의 늑대가 슬퍼하고 있었나?
ㅡ정확히 알 수 없지만, 늑대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2[22]
그대들은 늑대를 개로 만들고 인간 자신을 인간의 가축으로 만든다.
ㅡ이를 통해서 볼 때, 늑대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에 따라, 길들여지 않은 자가 숲속의 성자의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ㅡ왜 두 마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늙은 교황의 손을 잡으며 경탄하는가?
ㅡ늙은 교황은 종교지도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바꾸기 어려웠을 것인데, 바꾸고 자신과 마주하고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ㅡ이는 자신의 입장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ㅡ그래서 더욱 반가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황과 차라투스트라는 왜 신을 누가 더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교황에게 자신이 신을 부정하는 자이고, 신에 대해서 자신보다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배우려고 한다고 말한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신을 부정함에 있어서 자부심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교황은 차라투스트라를 인정하거나 차라투스트라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수 있다.
ㅡ그 과정에서 교황은 차라투스트라보다는 자신이 더 신을 사랑했다가 잃었기에 신에 대한 상실과 부정이 더 큰 존재라고 말하며, 차라투스트라보다 자신이 더 신을 부정하는 존재라고 이야기를 한다.
ㅡ이는 곧 교황과 차라투스트라가 신을 부정함을 두고서 기싸움을 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ㅡ그래서 교황의 발언 이후에 차라투스트라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동정이 신을 목 졸라 죽였다는 것은 왜 나오나?
ㅡ신은 세상을 동정하면서, 세상을 구원할 존재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보낸다.
ㅡ그렇게 세상은 신의 아들을 통한 종교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서 교리를 통한 지속이 이뤄지는데, 이것이 처음에는 엄밀하게 지켜지다가 점차 퇴색되기 시작한다.
ㅡ그리고 결국에는 사회가 그릇된 규율과 가치를 형성하여 그릇됨의 극치, 지옥에 준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ㅡ즉 신의 동정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서 되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ㅡ이 과정에서 자신의 최초의 교리나 뜻에 따르지 않고, 변형되어지면서 신은 외면 받고, 그에 따라서 고독 속에서 죽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ㅡ동정이 목을 직접 졸랐다기 보다는 동정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형국이 되었다고 보아야 맞을 듯하다.
“세 눈 아래서 이야기지만(그는 한쪽 눈이 멀어 있었다)” 라는 건 뭘 의미하나?
ㅡ인간에게는 두 눈이 있는데, 그래서 단 둘이 있다면, 눈이 네 개가 된다.
ㅡ그러므로, 단 둘이서 하는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ㅡ사제가 한 쪽 눈을 먼 것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해본다면, 사제는 종교적 신을 섬기고 있었기에 본디 종교적인 걸 올바르다고 여겼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올바른 것을 파악할 능력이 상실된 채로 있다.
ㅡ그러다가 개안을 하게 된 것인데, 이미 종교적 규율에 익숙하기에 올바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그런 점에서 한쪽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는 듯하다.
ㅡ예를 들면, 신의 죽음이나 최후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와 다르게 보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신앙의 문턱에 간음이 있게 되었다는 건 뭘 말하나?
ㅡ마리아가 예수를 가지게 되었을 때,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간통에 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게 된다.
ㅡ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신은 사랑의 신이 아니고, 사랑의 신으로 여기는 자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인가?
ㅡ현재 언급되는 종교의 신의 경우, 죄를 저지르면 처벌을 한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진정한 사랑은 죄를 저지를 때 처벌하기 보다는 다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본다.
ㅡ이 관점에 따라서 보면, 종교의 신은 진정한 사랑을 행하지 않는 존재가 되기에, 위와 같이 언급되는 것이다.
ㅡ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19장」을 참고하면 좋다.
나는 그대들의 냉혹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대들 판관의 눈에는 늘 사형집행인과 그 냉혹한 칼날이 번뜩인다.
말하라. 주시하는 눈을 지닌 사랑인 정의는 어디 있는가?
모든 벌 뿐만 아니라 모든 죄까지도 짊어지는 그런 사랑을 창출해다오!
판관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무죄선고를 하는 그런 정의를 창출해 다오!
동방에서 온 신은 왜 젊은 시절 냉혹한가? 왜 지옥을 만들었나? 그후 왜 할머니가 되었나?
ㅡ이는 종교의 강성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종교가 강성한 시절에 죄에 대해서 냉혹하게 처벌하고, 지옥을 고안하여 엄격한 교리 추종을 요구한다.
ㅡ하지만 점차 종교의 힘이 약화되면서 엄격한 교리 강요보다는 동정하는 수준의 교리를 언급하게 된다.
ㅡ이러한 종교 세력의 변화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ㅡ교황은 이런 신의 모습이 그저 종교가 세력이 약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교황에게 직접 보았는지, 다른 식으로 죽었을 수도 있는지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신의 죽음은 단순히 세력 약화에 따른 죽음이라기 보다는 동정에 의해 벌어진 일이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죽어버린 것으로 보는 듯하다.
ㅡ즉 동정심이 되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면서, 그에 따라 죄책감에 질식하여 죽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긍정하는 신은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오래된 신/옛 종교 신의 죽음을 말하지만, 새로운 신에 대한 언급을 한다.
ㅡ이러한 언급은 신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신을 긍정하는 모습으로 보여 진다.
ㅡ물론 차라투스트라가 긍정하는 신은 우리가 아는 진정한 신의 모습은 아닐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현재 언급하는 신은 올바름을 추구하고 행동하는 개인을 말하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와 같은 신을 긍정하기도 하므로, 과연 완전히 차라투스트라/니체가 신을 온전히 부정하는가 라고 의문을 가져 본다면, 신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ㅡ늙은 교황이 말하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에게 경건한데, 자기자신에게 경건하게 하는 어떤 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표현해볼 수도 있다.
ㅡ그러므로 니체는 종교적인 신, 고정된 규율과 가치를 제공하는 신에게는 죽음을 고하고, 자신을 위하여 노력하는 존재와 이를 주관하는 신은 긍정한다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직함은 왜 선악의 저편으로 데려가나?
ㅡ차라투스트라는 고정된 선악의 부적절함에 대해서 정직하게 표현할 것이고, 그에 따라서 고정된 선악 너머를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영원으로부터 축복하도록 운명 지어진 눈과 손과 입을 지녔나?
ㅡ여기서 말하는 영원은 영원회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삶을 축복하는데, 이때 저 멀리 있는 이상 사회를 바라보기도 하고, 말하며 가르치는 것을 눈과 손과 입을 통해 그런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이것을 늙은 교황은 “길고도 긴 축복의 비밀스럽고도 성스러운 향기”로 인식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왜 썩 괜찮은 포구라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 편안하게 머물렀다가 갈 수 있는 포구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것은 슬퍼하는 자 모두를 단단한 땅에 굳건한 발로 다시 서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뭘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슬퍼하는 자는 삶에 절망하는 자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절망하는 이유야 여럿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회의 부조리로 인하여 고통받는 자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단단한 땅에 대한 부분을 보아도 그러는데, 단단한 땅을 육지라고 본다면, 육지에 굳건한 발로 서게 한다는 것은 대비되는 개념인 바다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소금물의 영역, 부조리의 영역을 의미해서 사회가 된다.
ㅡ결국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나서 올바름을 추구하게 하고 싶어하는 목표를 지닌다는 걸 표현하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늙은 교황의 울적함을 어깨에서 누가 내려주냐고 말하나?
ㅡ늙은 교황의 경우, 본디 누군가를 추종하는 성향을 가진 존재로, 자신이 추종할 만한 대상을 찾고 있다.
ㅡ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이상적 존재라기 보다는 이상적 존재를 예언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을 추종하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크고 자란 존재이기에, 자기도 모르게 부조리의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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