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4장 의역 (완) (거머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6. 17:39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4장 거머리


         
4장 개괄

 

4장에서는 올바름을 선호하긴 하지만, 대중적 상식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자가 나타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적 상식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존재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존재로서 보인다.

 

하지만 이 존재는 차라투스트라처럼 할 수 없기에, 자기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기반은 대중적 상식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압도당한다.

즉 올바른 것을 찾아 밝히기보다 대중적 상식의 이상한 점을 말할 능력만 있는 것이다.

 

이는 재능의 문제로 볼 수 있는데, 자신에게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재능이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존재로서 그려지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 존재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 같다.


 

 

 

본문

 

 

차라투스트라가 깊은 생각에 잠겨 숲을 지나 늪지대를 가고 있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늪지대 위로 늘어진 사람을 밟고 말았다.

밟힌 자는 고통의 단발마와 저주하는 두 말, 스무 개의 욕설을 퍼부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놀라서, 지팡이로 그를 때리고 말았다.

곧 그는 정신을 차렸고, 자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일에 대해서 어처구니없어 하며 속으로 웃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밟은 사람을 향해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죠.

 

     우리의 이 사건은 깊은 생각을 하던 방랑자가 외딴 길에서 햇빛 아래서 잠든 개를 밟은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깜짝 놀란 방랑자와 개가 벌떡 일어나서 서로에게 소리지르고 열을 내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방랑자와 개가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결국 둘 다 외로운 자이니 말입니다.”

 

밟힌 자가 화가 난 상태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밟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야기로도 나를 모욕하고 있군요?

     이보시오, 내가 개란 말입니까?”

 

그러면서 밟힌 자는 늪 속에 담가 두었던 팔을 꺼냈다.

차라투스트라는 밟힌 자의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당신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팔에 왜 그렇게 피가 많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요?

     고약한 짐승이 당신을 물어 뜯은 것입니까?”

 

밟힌 자는 씩씩거리며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길을 가려고 했다.

    “여기는 제가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제게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저는 바보에게는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동정했고,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은 착각하고 있군요.

     여기는 당신의 영역이 아니라, 저의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제 영역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도 해를 입어선 안 됩니다.

 

     저는 나 자신이 되려는 자, 차라투스트라입니다.

 

     자, 저 위로 가면 제 동굴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제 동굴에서 상처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그대 불쌍한 자여,

     오늘따라 고약한 일들을 겪었군요.

     처음에는 짐승에게 물려 피를 흘리고, 다음으로는 제게 밟히고 맞았으니 말입니다.”

 

낮잠 자는 개

차라투스트라는 누워 있는 자를 밟은 것을 두고 낮잠 자는 개를 밟은 것이라고 비유한다.


 

밟힌 자는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듣고 표정이 싹 바뀌었다.

밟힌 자가 말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내 삶에서 나를 신경 써주는 존재는 차라투스트라와 내게서 앎을 얻어가는 자들뿐인데,

     제가 여기서 저의 피를 나눈 것은 사람들에게 제 앎을 나누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생각을 나누며 있었는데, 이제는 내 양심을 건드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났군요.

 

     바라 마지 않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오늘을 찬양하노라!

     오늘날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리는 차라투스트라를 찬양하노라!”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세련되고 경건한 태도에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 사이에는 서로 알아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군요."

 

밟힌 자가 말했다.

    “저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당신을 제외한다면, 올바름과 관련하여 저보다 더 엄격하고 엄밀하고 냉철한 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것을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고,

     현명한 자의 생각을 따르며 사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바보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근본을 파고 드려 합니다.

     제가 파고드는 근본이 사소하든 엄청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 기반만 가질 수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한 앎, 올바른 앎을 추구한다면, 사소한 것도 엄청난 것도 없습니다.”

단단한 땅에 서 있는 남자

밟힌 자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며, 그 올바른 이해를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앎을 바라는 일반 대중들 곁에 두고 있으니, 대중에 대한 전문가입니까?

     그렇게 대중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밟힌 자가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건 제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제가 그것을 감히 시도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중들이 따르는 상식입니다.

     대중적 상식이 어떤 문제를 지니는지 아닌지는 잘 알고 있는 것이죠.

 

     고작 대중적 상식의 문제를 알뿐인데, 제가 너무 자부하듯이 말했다면, 그래서 오만하다고 여겨졌다면,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자부하며 말했던 건,

     제가 사는 이 곳에선 저처럼 대중적 상식에 대해서 비평하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이 제가 지배하는 영역이라고 말했던 것이죠.

 

     아, 얼마나 오랫동안 대중적 상식을 분석했었는지.

     대중적 상식 속에 숨겨진 진실이 제게서 도망치지 못하게 말입니다.

 

     저는 대중적 상식이 갖는 이상한 점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반응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잘 모릅니다.

     대중적 상식에 대해서 비평하는 법을 알 뿐, 그 외에 대해서는 재능이 없고 무지한 것입니다.

 

     또 그릇된 것을 모두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올바름/그릇됨에 대해서 민감히 반응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릇됨을 허용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제가 그릇됨을 허용하는 것을 제대로 의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순간, 예컨대, 나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그릇된 것이 주어진다면,
     나는 올바름에 따라 판단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한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신은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 봐야 한다*’

     당신의 이러한 가르침은 제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게끔 이끌고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저는 저만의 지식을 갖추게 되었지요.”

 

거머리

밟힌 자는 자신의 재능의 부족을 알고서,

일반 대중의 상식과 교양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대중의 교양과 상식을 선도하는 일반적인 학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끼어들며 말했다.

왜냐면, 밟힌 자의 팔을 거머리들이 물어뜯고 있어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거머리들이 당신에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는 것이겠죠.

     당신의 피, 당신의 앎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에 말입니다.

 

     오 이 기이한 자여,

     당신의 지금 모습은 제게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당신에게 많은 것을 전해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당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헤어집시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저 위로 가면 제 동굴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서 같이 저녁을 보냅시다.

     당신은 제가 사랑하는 손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을 발로 밟은 것에 대해서, 잘해주고 싶고, 어떻게 해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비명소리가 난 곳을 찾아가고 있으니, 그리로 가겠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동굴을 알려주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자신의 동굴에서 밟힌 자에게 보상을 주려고 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는 개와 고독한 자가 서로 어루만져 주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하는가? 왜 둘은 모두 외롭나?

ㅡ서로 홀로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 밟힌 자는 늪에서 피를 흘리고 있나?

ㅡ여기서 거머리 같은 존재들에게 피를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피를 생각을 나타내는데, 밟힌 자는 타인의 생각을 바라는 자들에게 생각을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앎을 나눠주는 것과 비슷하다.

ㅡ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앎을 나눠주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고 여겨서 고독으로 나아갔지만, 이 존재는 어떤 이유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앎을 나눠주며 살아가고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영역에서는 누구도 화를 입어선 안 된다고 하나?

ㅡ자신의 영역에서는 부조리가 발생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와 거머리만이 밟힌 자의 삶을 신경쓴다고 하나?

ㅡ밟힌 자는 생각을 나눠주는 존재다.

ㅡ생각을 나눠주는 존재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존재를 만드려고 노력했었기에, 이러한 존재를 신경쓰게 된다.

ㅡ거머리들의 경우, 사색하는 자로부터 교양을 쌓으려고 하기 때문에, 밟힌 자/생각을 나눠주는 자의 삶에 대해서 신경쓰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고슴도치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부조리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데, 이때 가시를 가지고 찌른다고 보는 듯하다.

ㅡ그렇기에 고슴도치로 비유된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거대한 양심-거머리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부조리를 비판하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ㅡ그들의 양심이 올바르게 작동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성취한다.

ㅡ양심에 따라 좌우된다는 특징, 그런 점에서 양심에 기생하는 존재로 보여지고, 이를 통해서 양심-거머리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정신의 양심을 갖춘 자는 무얼 말하나?
ㅡ정신은 옳은 것을 파악하고 그른 것을 기피하려는 양심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정신의 양심은 올바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이의 생각을 따르는 현자보다 자신의 주먹에 의지하는 바보가 낫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타인의 생각을 따르며 현자가 되는 것보다는 자기 사유를 통해서 행동하는 존재가 낫다는 이야기다.

ㅡ그런데 바보라고 표현을 했기 때문에, 자기 사유를 통해서 행동하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정말 바보같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바닥까지 파고든다는 건 뭘 말하나?

ㅡ자기 스스로 사유하는 과정에서 깊게 사유하고, 그렇게 올바른 이해를 갖추려고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앎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닥이 크든 작든 늪이든 하늘이라 불리든 상관없다는 건 뭐라 말하나? 진정한 바닥이고 토대이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건 뭘 말하나?

ㅡ바닥은 어설픈 생각이 아니라 확실히 검토하여 이해한 것을 말한다.

ㅡ이러한 이해가 크든 작든 늪이라 불리든 하늘이라 불리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ㅡ여기서 ‘크든 작든’은 엄청난 것과 사소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늪이라 불리든 하늘이라 불리든’도 마찬가지의 의미로 보인다.

 

ㅡ따라서 확실히 검토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든 어떻게 평가받든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그렇기에 참된 학문-양심적인 학문에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즉 모든 학문에서 모든 주제는 더 위대하거나 사소한 주제는 없다는 이야기다.

 

차라투스트라는 거머리 전문가냐고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현재 밟힌 자가 거머리들을 곁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으로 보인다.

 

밟힌 자는 왜 거머리의 뇌의 전문가라고 말하고, 그것이 자신의 세계라고 하나?

ㅡ거머리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거머리의 뇌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담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일발적인 사람들은 교양/상식을 추구하므로, 거머리의 뇌는 교양/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즉 밟힌 자는 상식과 교양에 대한 전문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그런데 이 밟힌 자는 거머리가 피를 빠는 존재다.

ㅡ거머리는 일반 대중이며, 밟힌 자의 피를 빠는 이유는 그들의 교양함양을 위한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이 밟힌 자는 교양/상식에서도 선구자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ㅡ즉 교양 사회의 리더인 셈이다.

ㅡ그런 점에서 이 존재는 새로운 교양이나 상식을 제공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ㅡ이러한 교양과 상식의 토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이 존재는 교양과 상식이 자신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러면서도 그릇된 것에 대해서는 민감성을 가진, 차라투스트라와 대중 사이에 자리한 존재다.

 

왜 밟힌 자는 거머리의 뇌를 오랫동안 추적해왔나? 왜 미끄러운 진리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거머리의 뇌를 추척했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처럼 올바른 것을 찾고 파악할 능력은 없지만, 상식이나 교양에 대해서 의문과 불신을 가졌기에 상식과 교양에 집중한 존재인 듯하다.

ㅡ그래서 거머리의 뇌만을 탐구한 듯하다.

ㅡ만약 더 능력이 있었던 존재라면, 교양/상식을 떠나서 올바른 것을 찾지 않았을까 싶다.

 

ㅡ여기서 말하는 미끄러운 진리는 교양/상식에 대한 진실로 보인다.

ㅡ그러한 것들을 발견하고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는 이야기 같다.

 

이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내버렸으며,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는 건 뭘 말하나?

ㅡ거머리의 뇌를 추적하는 것에 몰두했다는 이야기로, 이는 올바름을 찾기보다 교양/상식의 그릇됨을 찾는데 몰두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차라투스트라, 3권 7장」의 바보와 비슷하지만, 바보는 사람들에게 앎을 제공하기보다 비판만 한 반면, 밟힌 자는 새로운 교양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대중적 존재로 볼 수 있다.

 

왜 밟힌 자는 지식 옆에 무지를 자리하게 했나?

ㅡ사람들 사이에서 교양/상식만 살피고 있을 뿐, 올바름에 대한 탐구는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관련해서 「유고 (1884년 가을~1885년 가을)」의 구절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거머리 곁에 바싹 붙은 채 내 무지가 시작된다

      : 그러나 나는 그렇기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ㅡ이 구절을 통해서 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올바른 것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왜 밟힌 자의 정신은 하나만을 알고 다른 것은 조금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고 하나?

ㅡ밟힌 자는 올바름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일반적 상식에 대한 부분, 여기에 더해서 자신이 주목하는 문제에 대한 올바름만을 추구한다.

ㅡ그렇기에 후술되는 “정직함이 끝나는 곳에서 나는 장님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이는 자신이 정직하지 않는 곳에서는 올바름과 그릇됨에 민감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ㅡ하지만 “알고자 하는 곳에서는 정직을, 철저하고 엄격하고 엄밀하고 잔인하고 가차없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걸로 볼 때, 선택적으로 올바름에 대한 민감성이 작용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이 존재는 교양과 상식에 젖어 있으면서, 일부 교양과 상식만 비판하고, 그 외의 교양과 상식은 허용하는 사회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ㅡ그런 면에서 완전한 올바름 추구자라고 보기는 어렵고, 「차라투스트라, 1권 8장」에서 나오는 젊은이의 상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ㅡ물론 이 젊은이의 경우, 향락적인 면이 있다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는데, 밟힌 자의 경우, 그러한 면은 없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말이다.

 

정신은 스스로 삶을 베어대는 삶이라고 하는데, 이게 뭘 말하나?

ㅡ정신은 이성을 말하는데, 이에 따라서 보면 이성은 스스로를 베어댄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ㅡ스스로를 밴다는 것은 자기극복/자기초월의 의미를 담는다고 볼 수 있고,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늘 하던 말과 다르지 않다.

 

ㅡ앞서 밟힌 자는 현명한 자의 말을 따르기 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앎을 얻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에, 이러한 자기극복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감응한 것이 맞고,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따라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그리고 그러한 노력에 의해서, 자신만의 생각에 따른 앎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보이는 대로라고 말하는가?

ㅡ밟힌 자가 자신의 앎을 형성하고 나름의 올바름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거머리가 밟힌 자의 피를 빠는 모습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ㅡ만약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앎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릇된 앎을 지녔다면, 사람들이 그에게서 피를 빠는, 생각을 얻으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밟힌 자의 엄격한 귀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나?

ㅡ현재까지의 내용으로 볼 때, 밟힌 자는 교양/상식에 대한 문제만 제기할 줄 알 뿐, 올바른 것을 찾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런 점에서 보면,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다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세상을 살기에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ㅡ이에 따라 위와 같은 언급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