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2장 절박한 외침
2장 개괄
2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절망을 가르치던 자와 마주친다.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며 절망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영원회귀를 통해서 희망을 얻은 차라투스트라를 믿지 못하고 비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대해서 두고 보자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고독한 자신의 영역에서 괴로워하는 올바름 추구자가 있다고 이야기를 들어, 그를 찾으러 나가게 된다.
본문
다음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굴 앞 바위에 앉았다.
차라투스트라의 동물들은 새로운 앎을 얻기 위해서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서 자신의 온갖 앎들을 이야기하여, 나눌 앎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앉아서 지팡이로 자신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 옆에 있는 다른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옆에는 예언자가 서 있었다.
그 예언자는 전에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과 있을 때 자신의 식탁에 앉혀서 먹고 마시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이런 가르침을 설파했다.
“모든 것은 똑같고, 아무것도 새롭지 않으며 가치도 없다.
세상은 무의미하고, 앎은 우리를 질식시킨다.”
그의 얼굴은 전과 다르게 변해 있었다.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눈을 보았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왜냐면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절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서 희망이 자리하였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한번 닦아냈고, 차라투스트라 역시 예언자의 얼굴을 보며 두려움을 느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한번 닦아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침묵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다시 만났다는 의미로 악수를 나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어서 오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절망의 예언자여,
당신을 친구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절망을 벗어난 이 늙은이를 용서하고, 오늘도 저와 함께 식사하길 바랍니다.”
예언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절망을 벗어난 늙은이?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고독 속에서 너무 오래 머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은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있지만, 사람들에게로 다시 나아가려 할 때가 될 겁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사회를 벗어나 있었습니까?”
예언자가 말했다.
“곧 당신의 고독으로 절망이 차올라서, 당신은 사람들에게로 나아갈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침묵하고 의아해했다.
예언자와 차라투스트라
둘은 일전에 절망감을 공유했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절망을 극복해낸다.
예언자가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소리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침묵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는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외침을 들었다.
이 외침은 어디서든 배척당하고, 환영 받지 못했다.
그토록 저 외침은 사악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마침내 말했다.
“이 고약한 전도사여,
이것은 사회 속에서 부조리를 겪은 자의 절박한 외침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사회 속에 속한 자의 절박한 외침이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사회에 속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제가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언자는 두 손을 하늘로 들며 말했다.
“동정 아닙니까?
오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당신을 유혹하려고 온 것입니다.
저 사회 속의 사람들을 동정하게 하려고 말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부조리에 대한 괴로워하는 외침은 다시 들려왔다.
이전보다 더 길고 불안하게, 더 가까이서 들려왔다.
예언자가 외쳤다.
“들리지 않습니까?
차라투스트라여,
저 외침은 당신을 부르는 외침입니다.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들에게 나아갈 시간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의 이야기에 혼란스러워하며 침묵에 빠졌다.
마침내 그는 망설이며 물었다.
“저곳에서 저를 찾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언자가 격렬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당신에게 외치고 있다는 것을요!”
차라투스트라는 공포에 휩싸이며 외쳤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 말입니까?
그는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차라투스트라는 땀으로 흠뻑 뒤덮였다.
예언자는 두려워하는 차라투스트라를 무시하고서 저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계속해서 경청하려 했다.
곧 조용해지자, 그는 떨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를 보았다.
그리고 예언자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희망에 가득 찬 사람처럼 서있지 않군요.
당신이 절망에 쓰러지지 않으려면,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서 춤이라도 추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 앞에서 춤을 춘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기 희망을 가진 자가 춤을 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이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도시를 벗어난 존재들, 은둔자들을 찾을 수 있겠지만, 희망과 행복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은둔자들에게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은 은둔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있는 법인데요.
사회를 벗어나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모든 것은 예전과 모두 같습니다.
아무것도 가치가 없으며, 찾아 헤매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행복한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 말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갱도
차라투스트라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예언자는 은둔자는 행복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언자가 한숨을 쉬자,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밝아졌고 확신하게 되었다.
마치 깊은 골짜기를 지나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차라투스트라가 강한 목소리로 수염을 쓸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허구가 아닙니다.
예언자여, 당신은 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올바른 것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슬픔만 가득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아침에 내리는 비와 같습니다.
아침에 내리는 비는 맑은 하루를 기대할 수 없게 하니 말입니다.
당신의 그러한 절망감에 의해서 저 역시도 절망스러워한 것 아닙니까?
이제 저는 절망에서 벗어날 것이고, 당신을 떠날 것입니다.
당신에게 무례하다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여긴 저의 영역*이니, 제 의사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흐름상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산은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의 영역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곳에서 그의 울부짖음이 들린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마 거기서 고약한 존재가 그를 괴롭히고 있을 것 같은데,
그는 고독 속에 있으니, 제게 해를 끼칠 존재는 아닐 겁니다.
또 제 주변에는 고약한 존재들이 있기는 하니, 살피러 가야 할 것 같군요.”
이 말과 함께 차라투스트라는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예언자가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없는 행복을 있다고 말하는 사기꾼입니다.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게서 멀어지려 하는 것이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 고약한 존재들이나 쫓아 다니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게 당신에게 어떤 유익함이 있을까요?
저녁이 되면, 당신은 다시 저를 마주하고 사기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저는 당신의 동굴에서 기다릴 것이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떠나며 소리쳤다.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제 동굴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당신 것이니 말입니다.
나의 손님이자 친구여!
만약 안에서 앎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감화시키기를!
이 희망을 가지는 자들에게 으르렁 거리는 존재여!
저녁에는 우리 둘 다 기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의 이야기에 감화되어 삶을 긍정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내 말이 믿기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한번 두고 보도록 합시다.
저 또한 예언자이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예언자 곰
예언자는 앎을 구하다 좌절한 자로,
차라투스트라는 앎을 꿀로 비유하여, 예언자를 꿀을 좋아하는 곰으로 본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와 예언자는 왜 각자 자기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나?
ㅡ예언자는 희망에 찬 차라투스트라를 보고서 놀랐기에, 그것을 감추려고 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기에, 그것을 감추려고 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흡족해하는 늙은이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게 되고, 이로써 밝아졌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흡족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왜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높은 곳에 있을 만큼 있었고, 조금 있으면 마른 땅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하는가?
ㅡ높은 곳은 고독 속을 말한다.
ㅡ마른 땅은 바다가 아닌 육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바다는 소금물을 머금은 곳이자 사회를 말하므로, 마른 땅은 사회를 벗어난 곳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고독 속에 오래 있었고,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그리워져서 다시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웃으며 자신이 마른 땅에 앉아 있냐고 묻나?
ㅡ마른 땅은 바다가 아닌 육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바다는 사회이므로, 육지는 사회 외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ㅡ이에 따라, 예언자의 말은 차라투스트라가 사회를 벗어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웃으며 재차 확인한 것 같다.
예언자는 왜 차라투스트라의 산을 둘러싸고 곤궁과 비탄의 물결이 솟아오른다고 하나? 왜 그 물결이 차라투스트라의 조각배를 실어간다고 하나?
ㅡ앞서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가 고독 속에 오래 있었다고 보았다.
ㅡ고독에 오래 있다면, 일반적으로 외로움과 슬픔이 차오르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이 외로움과 슬픔이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을 깰 것이라고 본 것 같다.
예언자는 왜 깊은 곳으로부터 요동치는 소리가 올라오고 있다고 하나?
ㅡ깊은 곳은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요동치는 소리는 부조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왜 심연은 긴 외침을 서로에게 내던지고 떠넘기나? 왜 어떤 심연도 외침을 간직하길 원치 않았나? 왜 외침은 불길하게 들려오나?
ㅡ여기서 외침은 앞서 말한 요동치는 소리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심연은 부조리를 비판하는 소리를 가지려고 하지 않고 배척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심연은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어떤 사회에서 부조리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ㅡ마지막으로 외침이 불길하게 들린다고 하는 것으로 볼 때, 배척당하는 이유가 불길하다는 것인데, 부조리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불길하다고 여겨지므로, 이러한 해석은 어느 정도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저 외침을 절박한 외침이라고 하나?
ㅡ부조리를 비판하는 목소리로 외침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외침은 부조리에 대해서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절박한 경우에 나타나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곤경이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하나?
ㅡ우선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외침이 검은 바다 어딘가에서 들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ㅡ검은 바다라고 한다면, 이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러면 사회에서 부조리에 대해 비판하는 외침이 들려온 것이다.
ㅡ이에 대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다.
ㅡ왜냐면 부조리한 환경 속에서 살면서 부조리에 대해 비판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이런 사람은 수 없이 많았지만, 실제로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없었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존재들이 있더라도, 자신과 무관한 존재들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과 더불어서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죄는 왜 동정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이를 통해서 절망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ㅡ이런 상황에서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죄를 저지르는 것일 테다.
ㅡ그렇다면 이러한 죄를 저지르게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지를 보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사람들을 동정하여 올바른 이해를 다시 나누려고 나아가는 것이다.
ㅡ그렇게 다시 노력하다 실패하면, 다시금 절망을 느끼게 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웬만해선 사람들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
왜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를 유혹하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희망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이기에, 다시 절망에 빠트리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을 향한 외침이라는 예언자의 말에 침묵하고 충격을 받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찾는 존재에 대해서는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그러나 동정을 하게 되면, 간신히 정신적 건강을 되찾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꼴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감에 휩싸인 것으로 보인다.
예언자가 말하는 좀 더 높은 인간은 뭘 말하나?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을 찾는 자가 좀 더 높은 인간이라는 예언자의 말에 땀범벅이 되나?
ㅡ현재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과 같은 자는 동시대에 나타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ㅡ그런데 예언자의 말에 따르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에 나타난 꼴이 된다.
ㅡ그런 면에서 전율하고 긴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행복해서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고 불리는 이유가 뭔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로 인해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춤을 춰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재 영원회귀 속의 자신이 등장해서 전율하고 긴장하고 있다.
ㅡ하지만 예언자가 보기에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그런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가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ㅡ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절망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예언자를 버티려면, 자신의 희망에 몰입한 상태여야 한다고 본 것 같고, 이를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하지만 예언자가 보기엔 그런다고 해도 차라투스트라가 희망을 찾은 자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높은 곳에서 그런 자를 찾아 올라오는 사람은 왜 헛걸음하나? 행복의 수직갱도는 뭘 말하나?
ㅡ여기서 그런 자는 차라투스트라, 삶에서 희망/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자인데, 이런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듣고 온 사람은 행복/행복에 이르는 길을 얻을 수 없다고 예언자가 말하는 것이다.
행복은 왜 묻혀 있는 자들, 홀로 있는 자들에게서 얻을 수 없다고 하나?
ㅡ은둔자들이 행복에 대해서 논하기에는 그들은 고독하고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의 탄식에 밝아지게 되었나?
ㅡ예언자가 행복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ㅡ이제까지는 자신의 행복에 대한 반론도 예언자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오전의 비구름은 뭘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그대의 비탄에 젖어 비 맞은 개처럼 있다고 하나?
ㅡ오전은 하루를 기대하게 하는 시점을 말한다.
ㅡ즉 오전이 맑으면 좋은 하루를 기대하고, 오전이 비가 오면 좋은 하루를 기대하지 못하기도 한다.
ㅡ이런 측면에서 오전의 비구름이라는 것은, 좋은 것을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의 덧없음의 이야기에 공감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의 비탄에 젖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를 피하려고 하나?
ㅡ예언자는 절망을 말하는 자인데, 자신은 이미 절망할 필요가 없기에, 예언자를 피하려고 하게 된다.
고약한 짐승이 좀 더 높은 인간을 위협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데, 고약한 짐승은 무엇인가?
ㅡ예언자처럼 절망하게 만드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ㅡ왜냐면 좀 더 높은 인간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인데,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에게 추구함의 무의미함/덧없음을 말하며 절망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영역에 있는 자는 화를 입어선 안 된다고 말하나?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화를 입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곁에는 고약한 짐승들이 있나?
ㅡ여기서 말하는 짐승들은 본래 차라투스트라의 짐승이 아니라 별도의 짐승들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절망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ㅡ이러한 자들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많은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름을 강하게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그를 괴롭히려고 도전하는 자가 많아서 그런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예언자로부터 못된 사람이라고 지적 받는가?
ㅡ못된 사람이라는 표현은 Schelm이라는 단어의 번역어인데, 이 단어는 사기꾼이라고 볼 수도 있다.
ㅡ사기꾼이란 번역이 좀 더 나은데, 왜냐면 예언자 입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현생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실제론 행복을 제공할 수 없는 은둔자이기 때문이다.
왜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가?
ㅡ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가 행복을 가지고 사기치는 존재라는 걸 아는 존재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사기꾼이라면, 자신이 진실을 알고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피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ㅡ그러면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사기를 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ㅡ하지만 예언자는 결국 차라투스트라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저녁에 증명하겠다고 말한다.
예언자가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서 발견하게 될 꿀은 무엇이길래, 춤추는 곰이 되게 하나? 예언자는 왜 그르렁대는 곰인가?
ㅡ예언자가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영원회귀에 대한 앎이 아닐까 싶다.
ㅡ이를 통해서 예언자는 절망을 극복한 차라투스트라를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ㅡ또한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의 희망도 발견하게 되면서, 춤추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보고 있다.
ㅡ예언자가 곰인 이유는 앎을 추구하다가 실패한 자이기 때문이다.
ㅡ여기서 앎은 꿀로 표현되는데, 꿀을 추구하다가 실패한 곰으로 비유되는 듯하다.
ㅡ또 이 존재는 희망을 가진 자에게는 위협하며 절망시키려고 하므로, 그르렁대는 곰이라고 표현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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