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장 꿀 봉헌
1장 개괄
1장은 영원회귀를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한 이후, 삶의 희망에 대해서 말하는 장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탐구하던 이유, 올바름을 추구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다시금 말하는데, 결국 올바름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러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는 수단으로 올바른 이해를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고 자신의 말년을 낚시하는 강태공처럼 사람들을 올바른 이해로 낚아 올리려고 하는데 쓰게 된다.
앞서 차라투스트라가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영원회귀를 통한 깨달음을 얻은 이후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금 말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문
영원회귀의 앎을 얻은 이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동굴 앞의 돌에 올라 조용히 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바다와 굽이치는 심연을 볼 수 있었다.
차라투스트라의 동물들은 생각에 잠긴 채 그의 주위를 맴돌다가 마침내 그의 옆에 섰다.
동물들이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자신의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행복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과업을 추구한다.”
동물들이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충분히 좋은 것을 가졌기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올바른 것을 탐구하며 사는 행복 속에 잠겨 있지 않습니까*?"
차라투스트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게 웃음을 주며 고양시키는 자들이여,
말을 참 잘 하는구나!
너희도 알겠지만, 올바른 것을 탐구하며 사는 행복은 내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끈적거려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타르*와 같지.”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것을 탐구하며 사는 행복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올바름을 추구하며 얻는 운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면서, 올바름을 추구하며 얻는 행복으로 행복감도 느끼지만, 고독 속에서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에 따라서 올바름른 것을 탐구하며 사는 행복은 애증의 대상이 되는데, 이를 타르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말을 마치자 동물들은 다시 생각에 잠긴 채 그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시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그래서 당신은 점점 더 종교인*처럼 보이는 것이군요?
당신은 순수한 존재인 양 보이려 하지만 말이죠.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타르라고 여기며 우울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타르같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로써, 세상과 삶에 절망한 종교인들의 모습이 비춰보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행복을 말하고 있지만, 별로 유쾌한 상태로 보이지 않기에 나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울한 행복 속에 있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웃으며 말했다.
“동물들아, 내게 뭐라고 하는 것이냐?
타르에 대한 이야기는 심통이 나서 했던 이야기*였다.
*올바름 추구에 따른 행복이 득만 주는 것이 아니어서 심통이 난 것으로 보인다.
올바른 것을 탐구하며 사는 행복은 나를 더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게 했다.
과일이 익어가듯이 내가 익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로써 나는 잘 익은 과일이 되었으니, 올바른 이해는 잘 익은 과일의 꿀과 같지 않겠는가?"
벌꿀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앎을 벌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을 꾀는 꿀로서 표현한다.
동물들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렇군요, 차라투스트라.
그런데 오늘은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공기가 맑아서 어느 때보다도 세상을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그래, 나의 동물들아,
내 마음을 맞추었구나.
나는 오늘 높은 산에 오르고 싶다.
그러니 그곳에 황금 빛을 띠며 흰, 새로우면서도 질 좋은 앎을 마련해 두어라.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서 앎을 제물로 올리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산에 올랐을 때, 그는 동물들을 집으로 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물에 대해서, 앎을 마련하라고 한 것은 나의 책략이었고, 유용한 행동이었다.
여기서 나는 이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모두 나누는 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느라 바쁜 것이다.
이런 것을 제물로 바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앎을 요구한 것은 미끼로 쓰기 위해서다.
세상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말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사냥꾼과 어부에게는 이보다 좋은 미끼는 없다.
어두운 숲 속에서 그릇된 이해를 설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그저 쾌락의 정원처럼 느껴지겠지만,
내게 있어 세상은 이상을 향하는 희망적인 존재들이 담겨 있는 바다와 같다.
신들도 어부가 되어 희망적인 존재들을 건지고 싶어하는 그런 바다 말이다.
이처럼 그릇된 이해가 가득한 세상임에도 놀라운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 인간의 세계에 나는 올바른 이해를 던지며 말한다.
“인간들이여, 정신을 그릇됨 속에 갇아두지 말고 열어라.
그리고 내게 너희의 모습을 보여라.
나는 오늘 최고의 미끼로 <가장 희귀한 인간*>을 낚는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내가 삶의 황혼기로 나아가는 동안, 내가 누리던 앎의 행복을 사방에 던진다.
이상을 추구하는 많은 인간들이 내 앎에 반응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들이 나의 올바른 앎에 반응한다면, 그들은 내게로 와야 한다.
인간을 사회 속에서 건져 올리는, 사회에서 사악하다 평가받는 이 낚시꾼에게로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본디 처음부터 사람들을 건져 올리는 어부, 진심으로 “자기 자신이 되라”고 말한 사람, 이끄는 자, 훈련시키는 자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람들이 나처럼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사람들에게 나아가 앎을 나누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내려갈 때가 되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조짐이 있어야 한다.
*올바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실리를 추구하는 상황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부조리한 삶을 비평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급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인내심이 강하지도 않고, 인내할 생각도 없이 있을 뿐이다.
왜냐면 운명이 내게 시간을 주었는데, 내 할 일을 다 하고도 시간이 남으니,
강태공처럼 미끼를 던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
차라투스트라는 사회라는 바다 속에 숨겨진 올바름 추구자를 건져 내려는 어부와 같다.
그런데 나의 운명은 나를 잊었나?
왜 이리 나를 방치하고 있는가?
나의 운명은 내 삶의 고달픔에 지쳐서 그늘 뒤에 앉아 쉬면서 파리나 잡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나의 운명에 대해서 좋게 생각한다.
운명은 나를 서두르게 하거나 압박하지 않고, 내가 기다릴 시간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저 사회 속에서 사람을 낚으려고 이 높은 산에 올라온 것이다.
과연 낚시를 하려고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여기서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지라도,
사회 속에서 홀로 근엄한 채 있는 것, 스트레스 받으며 지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보인다.
분노하고 질투하고 초조해 하면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응징하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여기서 높은 산은 의문의 산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문을 해결하고, 그 의문의 답을 전할 상대를 찾고 있다.
여기서 의문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 현생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않아서 생기는 절망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의문을 영원회귀의 법칙을 통해서 해결했다.
저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름을 외치는 자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저들은 감정적이긴 하지만, 나를 대신하여 올바름을 말하는 자들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내게 웃음을 준다.
반면, 그릇된 이해를 퍼트리는 자들은 초조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부조리한 현재에만 인기를 누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나의 운명은 부조리한 현재를 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미래/세계를 두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말을 함에 있어서, 인내심을 가지고 먼 미래를 향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먼 미래의 것은 반드시 와야 하는 것이고, 비현실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반드시 와야 하는 것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이어선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이상 사회다.
이상 사회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상 사회가 올 날이 멀다고 해서 내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흔들림 없이 양 발로 굳건히 서있다.
이 굳건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말이다.
모든 자유로운 존재들은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다가 한계를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묻는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악의*여, 여기서 웃어라.
그리고 이 곳에서 올바른 이해에 근간을 둔 사회 비판을 하라.
그리고 너의 올바른 이해로 사람을 꾀어내라.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를 말한다.
이 부조리한 사회에 따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 나 자신과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을 낚아 올려라.
나, 어부 중에서도 부조리한 사회에 악의를 품은 어부인 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저 밖으로, 저 사회 속으로 올바른 이해가 주는 행복의 미끼를 던져라.
사람들을 낚을 수 있도록, 올바른 이해가 주는 풍요로움을 저들에게 맛 보여라.
올바른 이해여, 사람들 속의 부조리함과 그에 따른 우울을 건드려라.
그렇게 그들이 올바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나의 눈이여, 다가올 미래를 보아라.
아, 이상을 바라는 자들이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 얼마나 숨겨져 있는가?
곧 이들이 깨어나지 않겠는가?
내 머리 위로 어찌 이리 아름다운 고요가 감돌고 있는가?
그릇됨이 없이 아름답게 노을이 지는 하늘이!
장밋빛 노을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운명을 긍정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평온함을 느끼고 있다.
생각해볼 거리들
동물들은 왜 차라투스트라가 행복을 고대하고 있다고 보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운명을 긍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복에 이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행복에 이르려고 한다면,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러지는 못하고 있다.
행복에 뜻을 두지 않은지 오래라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올바름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ㅡ왜냐면 고독과 배척당함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ㅡ이는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이제껏 차라투스트라는 자기를 중심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행복을 가르치면서 행복과 멀어지는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에, 모순적이기도 하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ㅡ문제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행복을 생각하면, 현재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행복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와 관련하여 행복을 추구하려던 모습을 보이는데,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의 모습이 그러하다.
차라투스트라가 행복보다 과업을 추구한다고 말했는데, 왜 동물들은 차라투스트라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말한다고 하나? 하늘빛 행복의 호수는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행복을 통해 안주하기 보다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업을 수행하려고 하게 된다.
ㅡ이 과정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많이 갖추게 되는데, 이를 두고서 좋은 것을 많이 가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하늘빛 행복의 호수는 구름이 없는 하늘을 담은 호수로 볼 수 있고, 구름은 그릇된 이해를 말하므로, 올바른 이해를 담은 호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 속에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잇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행복을 무거워서 흐르는 물결같지 않다고 하나? 왜 진득거리는 역청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발언은 자신의 행복이 자신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점성 높은 물질이라고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ㅡ하지만 이러한 행복은 역청/타르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약간의 심술을 부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동물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보고서 아마처럼 머리가 세었는데, 누레지고 검어진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표현에서 타르는 부정적인 오염물의 느낌을 준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뭔가 오염되고 변질된 느낌으로 동물들이 이해한 것 같다.
ㅡ그리고 누레지고 검어진다는 것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색처럼 변한다는 뉘앙스를 담을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 1권 9장」
죽음의 설교자들은 "누런 사람들"이라고 불리거나 "검은 사람들"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나는 그대들에게 저들을 다른 빛깔로 보여주겠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뭔가 종교적인 색채를 띄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영원회귀를 통해서, 삶을 긍정하게 되었지만, 결국 종교적 특징을 보이는 듯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일어난 일은 왜 익어가는 과일 모두에게도 일어나나?
ㅡ익어가는 과일은 당도가 점차 올라가는데, 이는 먹음직스러워지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를 채워가는 것 역시 사람들에게 흥미를 자극하므로,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이끌리게 하는 당도가 차오르는 것, 꿀이 생겨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꿀 봉헌을 말했던 것이 술책이라고 하나?
ㅡ꿀은 올바른 이해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서 보면, “올바른 이해를 봉헌한다,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나눈다기 보다는 신이나 그와 비슷한 무엇을 위해서 올린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하지만 실제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 올바른 이해가 생기면, 사람들에게 나눈다.
ㅡ그런 점에서 동물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ㅡ이는 후술되지만, 꿀/앎을 얻어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을 자극하려고 그러하다.
ㅡ즉 꿀/앎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ㅡ하지만 이러한 것이 어떤 상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기에, 문학적 표현의 장치로서 쓰인 것 같다고 보이기도 한다.
이 세상은 왜 거친 사냥꾼에게 낙원인가?
ㅡ이 세상은 어두운 숲과 같기에, 어수룩한 존재들이 자신도 모르게 사냥 당하는 곳이라고 보는 듯하다.
ㅡ이에 따라서 사냥 기술이 좋지 못한 자들,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사람을 꼬득이는 자들에게 낙원이라고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이 세상이 바닥을 알 수 없는 풍요로운 바다로 보이는가? 왜 신들은 어부가 되어 그물을 던지고 싶어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바다라는 세상, 부조리한 세상 속에 자신이 바라는 대상들, 올바름을 추구하는 대상들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ㅡ따라서 이것들을 건져 올리려면,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ㅡ그렇기에 앎을 자꾸 던지면서 이러한 존재들의 입질을 기다리는 것이다.
최상의 미끼로 최고로 진기한 사람-물고기를 꾀어낸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던지는 미끼는 올바른 이해다.
ㅡ그렇기에 이를 통해서 꾀어내는 것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다.
자신의 행복을 저 먼 곳, 모든 방향으로 던지는 이유는? 일출부터 정오를 거쳐 일몰에 이르기까지 내던진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올바른 이해를 갖춤으로써 얻는 행복을 모든 방향으로 던져서, 그에 반응하는 존재를 보고자 한다.
ㅡ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이상 사회를 위한 존재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또 일출에서 정오, 일몰의 과정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개인의 삶을 나타낸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태양으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삶 전반에서 행복, 즉 올바른 이해를 세상을 향해 던지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물고기들이 자신의 높이로 올라올 때까지 행복을 던진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수준까지 사람들이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악의적인 어부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반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악의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빈말이나마 “너 자신이 되라” 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뭘 말하나? 이제까지 차라투스트라는 “너 자신이 되라” 라고 말하지 않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너 자신이 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위 문구를 보면, 전혀 그러지 않은 존재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ㅡ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빈말이나마”라는 표현이다.
ㅡ이는 곧 “빈말이 아니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진심으로 “너 자신이 되라”라고 말하는 존재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내려갈 조짐을 기다리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근본적으로 고독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ㅡ탐구를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독할 필요는 느끼지만, 결국 자신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길 바라는 것이다.
ㅡ이러한 차라투스트라의 의지에 따라서, 언제든 사람들에게 나아가고 싶어한다.
ㅡ하지만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ㅡ그렇기에 절망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나아갈 시점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높은 산에서 술책을 쓰고 조롱하며 기다린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이는 산 아래 도시, 사람들의 사회를 비판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렇게 올바른 이해를 하나씩 던지면서 사회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인내심이 있는 자이며, 인내라는 것을 잊어버린 자로 표현되나?
ㅡ우선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나아가고 싶어하는 자신을 참고 견디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인내심을 가진 자다.
ㅡ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삶이 끝나지 않았기에, 삶을 만족해하기에 인내할 필요 없이 사람들에게로 나아갈 기회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ㅡ그래서 인내를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걸로 알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숙명은 차라투스트라를 잊어버렸는지 묻나? 커다란 바위 뒤의 그늘에 앉아 파리를 잡는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운명을 이해했음에도 현재 죽지도 않은 채 계속 살고 있기 때문에, 숙명이 자신을 잊은 게 아닐까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어떻게 보면 현재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의 과제를 모두 완수한 상태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진행할 것이 마땅치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숙명이 바위 뒤의 그늘에 앉아서 파리를 잡는다는 것은 휴식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ㅡ숙명 역시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따라 지친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한숨 고르며 자신 주위에서 귀찮게 하는 파리나 잡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산 속에 있는 것이 낫다고 하나?
ㅡ사람들 사이에 있게 되면, 거드름을 피우며 분노하는 자, 「차라투스트라, 3권 7장」에서 언급하는 바보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 3권 7장」에서 바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서 자신도 그 바보의 모습처럼 있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 3권 7장」에서 바보는 마냥 사람들을 보며 비판하는 재미로 사는 모습을 보여 비판받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 사이에서 화가 나 있는 자를 원망하지 않나?
ㅡ그들은 나름대로 올바름을 말하고 있지만 남을 지적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는 우스꽝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원망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화급하다고 소음을 일으키는 커다란 북은 누구이길래 초조하나? 왜 오늘을 향해 말하나? 차라투스트라와 그의 숙명은 왜 오늘을 향해 말하지 않나?
ㅡ이 사람은 소음, 그릇된 이해, 사회적 규율을 설파하는 자들을 말한다.
ㅡ이들은 현재에 대해서만 말하는데, 이들은 이상적 미래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현재에 즐겁게/만족스럽게 살기를 권하고, 이는 부조리로 이어진다.
ㅡ따라서 현재 시점을 놓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ㅡ차라투스트라와 차라투스트라의 숙명의 경우, 현재를 두고서 말하는 게 아니라, 다가올 미래, 다가올 이상 사회를 두고서 말한다.
ㅡ이 이상 사회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 속에서 반드시 올 것이라고 가정된다.
ㅡ왜냐면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의 노력이 쌓이면 언젠가 이상 사회가 올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확실한 진리를 바탕으로 이를 긍정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언제 오든 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서 있는 영원한 땅, 단단한 태고의 바위는 뭘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땅은 차라투스트라의 전망/예측의 기반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전망의 기반은 영원회귀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영원한 반복 속에서 이상 사회가 올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ㅡ그렇기에 영원한 땅이라고 표현되는 듯하다.
ㅡ이 세상의 이치는 세상이 존재했을 때부터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태고의 바위라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바람이 “어디에? 어디로부터? 어디로?”를 물으며 불어 닥치는 곳은 어디인가? 날씨를 갈라놓는 경계라는 건 왜 나오나?
ㅡ여기서 바람은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존재,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를 말한다.
ㅡ이러한 존재들이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묻는 곳이 언급된 것이다.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들은 “왜소한 자가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속에서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차라투스트라처럼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며 희망을 얻게 된다.
ㅡ즉 영원회귀를 마주한 시점을 기준으로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ㅡ좌절하는 것을 먹구름이 낀다고 본다면, 희망을 갖는 것을 청명한 하늘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ㅡ이런 점에서 영원회귀를 날씨를 갈라놓는 경계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의 밝고 건전한 악의는 무엇인가?
ㅡ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악의, 이상을 향하는 악의를 말한다.
반짝거리는 조롱의 웃음을 던지라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반짝거린다는 것은 빛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올바른 이해의 특징을 담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 반짝거리는 조롱은 올바른 이해에 따른 조롱이라고 볼 수 있다.
ㅡ이러한 조롱을 던지면 자극받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가 나타나고 이를 통해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를 낚을 수 있게 된다.
바닷속에 있는 것 중에, 내게 속한 것, 나 자신과 나를 위해 있는 것은 뭘 말하나? 왜 이걸 낚아 올리라고 하나?
ㅡ바다는 사회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보면, 사회 속에 있으면서도 ‘나에게’ 속한 것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늘 바라는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를 말한다.
심장의 꿀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란 말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 내면에 있는 올바른 이해에 따른 행복감을 퍼트리라는 이야기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낚시바늘을 물어 삼키라고 말하나? 왜 검은 비애의 배 속으로 물어뜯으라고 하나?
ㅡ이 구절은 해석이 조금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 구절이다.
ㅡ”Beisse, meine Angel, in den Bauch aller schwarzen Trübsal!”로 표현되는 구절인데, 이는 “물어라, 나의 낚싯대여, 모든 검은 우울의 배 속을!”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르면, 물어뜯는 것이 낚싯대이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낚싯대에게 “바다 속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의 우울함을 건드려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렇게 건드림으로써,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붉은 장밋빛 고요는 무엇을 말하나? 구름 한 점 없는 침묵은 뭘 말하나?
ㅡ해당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한데, 하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낚싯대를 던져 사람을 건지려고 하지만 실제로 건져지지 않음을 말한다고 보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평온한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ㅡ장밋빛이나 구름 한 점 없는 침묵은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아름다운 상황, 평온한 상황을 나타낸다고 보여질 여지가 많기에, 후자의 해석이 좀 더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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