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7장 가장 추악한 자
7장 개괄
7장은 자기 자신과 인간을 경멸하기만 할 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존재는 미완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수용하지 못했으므로, 자기 경멸만 남아있는 추한 상태가 된다.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존재는 자신의 추악함을 안다.
하지만,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파악한 자신의 의식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이 존재는 추악함을 느끼면서도 추악함을 피하려는 상태가 되고, 그렇기에 자기 경멸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자기 경멸로 인하여, 덧없어 하거나 남들에게 염세적인 말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이때 사회의 사람들은 이런 자기 경멸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동정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자기 경멸자는 이미 자기 자신의 추악한 면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들의 추악한 면을 인지하고 있기에, 이들의 동정이 달갑지 않다.
그래서 자기 경멸자는 이들을 피해 자기를 동정하지 않는 존재, 차라투스트라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과 숲을 걸었다.
그러면서 큰 고통 속에 외치던 자를 찾았지만, 그 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라투스트라가 뿌듯한 상태였고, 기쁨과 감사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시작이 나빴지만, 내게 정말 좋은 날이구나!
쉽게 보지 못할 사람들과 만났으니 말이다.
그들이 내게 해준 말을 오랫동안 곱씹을 것이다.
그들의 말이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내 영혼에 스며들 수 있을 때까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 앞에 놓인 바위를 돌아가자,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다.
죽음의 영역*에 들어섰던 것이다.
죽음의 영역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없는, 그저 검붉은 절벽만이 보이는 황량한 곳이었다.
그렇게 이곳을 가득 채운 것은 정적뿐이었다.
이곳은 모든 동물이 기피하던 골짜기였는데,
오직 한 종류의 동물, 자기를 경멸하는 자들, 추하고 두껍고 초록빛이 도는 뱀들**만이 나이가 들면 이곳에서 죽었다.
그래서 목자들은 이 골짜기를 <뱀의 무덤>이라 불렀다.
*후술되는 내용에 따르면, 죽음의 영역은 자기 경멸/혐오자가 머무는 영역이다.
이들의 심리를 보면, 자기 경멸/혐오에서 비롯된 절망감에 따라 세상을 황량하게 인식하는데, 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후술되는 내용에 따라 보면, 여기서 언급되는 뱀들은 추악한 존재, 자기 경멸자, 자기 혐오자를 나타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이 뱀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죽음의 골짜기
자기 경멸자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전의 어두운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마치 이 곳에 한 번 왔었던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거운 생각이 짓눌렀다.
그래서 그는 점차 천천히 걷다가 멈춰 서게 되었다.
눈을 감고 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길가에 앉은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기는 했지만 인간 같지 않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보였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전에 자신을 경멸하다가 극복하게 되었다.
예전에 한번 왔었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한 때 자신을 경멸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의 수치심이 볼을 넘어 머리카락까지 치닫으려 하자 그 존재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 장소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대지가 갑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땅에서 물이 울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소리는 사람의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차라투스트라여,
내 수수께끼를 풀어라.
말해라, 인간의 추악함을 목격한 자에 대한 벌은 무엇인가?
내가 너를 다시 끌어들였다.
여기 너의 긍지를 시험하고 있으니, 너의 긍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해라.
너는 너 자신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러니 이 수수께끼를 풀어라.
해결하기 힘든 문제도 해결하려 도전하는 자여.
나 자신이 너에게 내는 수수께끼다.
네게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영혼에는 동정심이 물밀듯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벌목꾼에게 저항하던 참나무가 도끼질에 쓰러지듯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자들이 겁먹을 정도로.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곧 다시 땅을 딛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단호함이 깃들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정신을 죽인 사람, 자기를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저를 가게 해주십시오.
당신은 추악한 자신을 보았지만,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추악함을 목격한 당신의 정신을 죽인 것입니다.”
말을 마친 차라투스트라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자가 차라투스트라의 옷자락을 붙잡았고, 다시 울컥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멈춰 달라.
나를 그냥 지나치지 말아달라.
나는 너가 어째서 쓰러졌는지 알아냈다.
차라투스트라여, 그럼에도 너는 다시 서있구나.
너에게 축복이 깃들기를!
자신의 정신을 죽인 자, 자신을 경멸하는 자가 어떤 기분일지, 너는 알 것이다.
그러니 여기 앉아 달라.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건 아닐 테니.
내가 간다면 너 말고 누구에게 가겠는가?
하지만 나를 쳐다보지는 말아달라.
내 추악함을 보지 말아달라.
가장 추악한 존재
이 존재는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자로, 자신의 추악한 본성을 견디지 못하고 외면한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쫓아다니고 있다.
너가 내 마지막 피난처이다.
사람들이 나를 쫓아오는 것은 나를 증오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라면, 나를 더 생기롭게 해줄 것이다.
내가 저지른 행동이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세상에 영향을 끼쳤으니 이들이 나를 쫓는다고 느낄 수 있지 않겠나?
사회에서 성공한 자들은 타인의 뒤를 잘 쫓는 자들이 아니었나?
잘 뒤쫓는 자는 잘 따르는 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번 뒤에 있어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를 뒤쫓는 것은 내가 성공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동정하기에 그런 것이다.
내가 나의 본성에 질색하여 절망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들의 동정으로부터 도망쳐 너에게 피신하려고 한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나를 보호해달라.
너는 내 마지막 피난처다.
나를 알아본 유일한 자여.
너는 자기 자신을 죽인 자, 자신을 경멸하는 자의 심정을 알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여, 내 곁에 머물러다오!
그리고 만약 너가 가고 싶다면, 나처럼 자신을 경멸하기만 하지 마라.
자신을 경멸하기만 하는 것, 이것은 좋지 못하다는 걸 나는 여실히 깨달았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말하고, 또 너무 어설프게 떠들어서 화가 났는가?
내가 너에게 이렇게 충고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내 정신을 죽였고, 내 자신을 경멸하기만 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가장 추한 존재이고, 그래서 너에게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살아온 삶은 그리 좋지 못하다.
나의 자기 경멸로 모든 것을 무의미하고 헛되게 만들어 버려선, 상처를 주니 말이다.
네가 내 추악함을 보고 지나치며 침묵하고, 얼굴을 붉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점에서 나는 너가 차라투스트라임을 알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나를 동정하거나 연민을 했으니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추악한 본성에 대해서 부끄러워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동정하고 연민하며 달래주었다.
이런 점에서 추악한 본성에 대한 입장 차이가 드러나고, 사회는 추악한 본성을 용인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동정을 바라는 이가 아니다.
너는 그것을 알았지.
나는 부유하다.
나는 비록 자기 경멸과 혐오로 가득하지만, 그들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와 자기 경멸자의 만남
자기 경멸자는 동정을 피해 차라투스트라를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내 앞을 지날 때, 동정하는 자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나를 존중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경멸자가 동정받는 모습을 보며, 동정할 일이 아닌데 저러고 있는 모습에 수치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서 자기 경멸자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유일한 자로서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나를 동정하는 자들에게서 힘겹게 빠져나왔다.
오늘날 동정을 비판하는 유일한 자, 너를 찾기 위해서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신의 동정이든 인간의 동정이든 모두 자신들의 모습이 추악하다는 것을 몰라서,
즉 자신들이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남을 돕겠다고 제멋대로 나서는 것보다 함부로 도우려 나서지 않는 것이 더 고상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을 동정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큰 불행에 빠지거나, 추한 것을 행하거나, 올바른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행여나 그럴까 두려워하거나 조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 동참하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려고 한다.
이들은 그릇된 이해를 가진, 친절하면서도 절망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의 모습을 경멸하듯이 본다.
이 그릇된 사람들이 옳다고 너무나 오랫동안 인정해주었기에, 마침내 그들에게도 권력이 생겼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미덕, 그릇된 미덕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진리란,
그릇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을 진리라고 외쳤던,
기이하고 그릇된 이들을 옹호하던,
건방진 자가 했던 말들 뿐이다.
이 건방진 자로 인하여,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오만해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하며 사람들에게 아주 큰 오류를 가르쳤던 것이다.
건방진 자들 중에서 사람들이 이 자보다 더 잘 대해준 경우가 있었나?
동정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고통받는 이를 동정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함부로 동정하려고 하지만,
자기 경멸자는 이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그를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 세 번을 물어도 아니다!’
너는 동정의 위험을 경고한 자로서 그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이때 너는 너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만 경고를 했지.
너는 심한 고통을 받는 자들이 겪는 사회적 수치에 대해서 부끄러워한다.
‘동정으로 인해 우리에게 먹구름이 다가와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때,
실로 너가 ‘창조하는 자들은 모두 혹독하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동정을 초월해 있다’ 라고 가르칠 때,
오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너가 날씨를 통해서 동정의 문제를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를 느꼈다.
그런데 너에게도 많은 자들이 향하고 있다.
규율에 의해 고통받는 자,
규율을 의심하고 모든 걸 회의적으로 보는 자,
세상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
고독에 휩싸여 사회로 돌아갈까 고민하는 자,
고독 속에서 고통받는 자들 말이다.
그러므로 너는 너 자신에게도 경고해야 한다.
저들을 동정하지 말라고.
너는 내가 자신을 경멸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로 인해서 네가 내게 동정을 느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죽인 나 자신,
나의 정신은 내 추악한 본성을 모두 보았기에 죽어야 했다.
나의 정신은 나의 내면에 감춰진 수치스럽고 추악한 것들을 보았던 것이다.
나의 정신은 부끄러움도 없이 추악한 나 자신을 동정하려고 했다.
그렇게 나의 더러운 면들이 드러나고 의식되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많은 것, 함부로 들이대는 것, 지나치게 동정하는 것, 이런 정신은 삶을 괴롭게 하므로 없애야만 했다*.
*대화 속 자기 경멸자는 자신을 추악하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다가, 우연한 경험 속에서 자신이 추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때 자신의 추악함을 인정하거나 부정해야 하는데, 자기 경멸자는 추악함을 인정하지 않고, 추악함을 본 자신의 기억과 정신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로써 전처럼 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미 자신의 추악함을 경험했기에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기 경멸자는 자신을 경멸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자신의 추악함을 인정하고, 인간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해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 자기 경멸자는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상태로 나아가는데, 이를 정신은 삶을 괴롭게 하므로 없애야 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나의 정신은 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내면의 목격자를 벌하거나, 아니면 내가 죽어야 했다.
내 모든 것을 보았던 신, 정신이라는 신은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인간은 그런 목격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을 경멸하는 자가 이렇게 말했다.
동정의 먹구름
동정은 이상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태양 빛을 가리는 구름으로 표현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몸을 일으켜 떠날 채비를 했다.
왜냐면 그의 깊은 내면까지 한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여,
당신은 제게 자기 경멸자의 길에 대해서 경고해 주었습니다.
그에 대한 감사로 저는 당신에게 저의 길을 권하려 합니다.
저기 위로 가면 제 동굴이 있습니다.
이 동굴은 크고 숨을 곳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숨고 싶은 자라면, 그곳에서 자신이 숨을 곳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근처에는 동물들을 위한 여러 틈새와 통로도 있습니다.
정신을 죽인 자여,
당신은 사람들 속에서, 동정 속에서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와 함께 하시죠.
그렇게 하면 당신도 제게 배울 것입니다.
당신은 동정 속에서 벗어나려고 행동한 사람이니 말입니다.
우선은 제 긍지 높은 동물, 가장 똑똑한 동물과 이야기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길을 나섰다.
이전보다 더 사색하며 천천히.
왜냐면 그는 많은 질문을 자신에게 했지만, 이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인간은 얼마나 볼품없는가?
어떻게 이렇게도 추하고, 가래 끊는 소리를 내는가?
수치스러운 것이 내면에 얼마나 많은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할까?
얼마나 커야 자기 경멸을 넘어서 자기 사랑으로 향할 수 있을까?
저 자 역시, 자신을 경멸하면서 자신을 사랑했다.
그는 자신을 크게 경멸하면서도 사랑하는 자인 것이다.
나는 저 자보다 더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저 자는 분명 수준이 있는 자이다.
어쩌면, 저 자가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한 인간은 아닐까?
나는 자신을 경멸하는 자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경멸하는 자는 자신을 경멸만 하면 안 된다.
경멸하는 자신을 넘서야만 한다.”
독수리와 뱀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긍지와 지혜가 있다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긍지와 지혜인 독수리와 뱀에게 의지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왜 앞서 만났던 사람들의 말을 오래오래 곱씹으려고 하나?
ㅡ그들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듣기 좋은 말들이 주어져서 여러 번 떠올리며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는 듯하다.
왜 죽음의 영역에는 추악하고 굵직한 녹색 뱀들만이 오나?
ㅡ이에 대해선 정보가 없어 살필 수 있는 게 적다.
ㅡ여기서 언급되는 뱀들은 추악한 존재, 내용 상으로 볼 때, 자기 경멸자, 자기 혐오자를 나타내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어두운 기억으로 빠져들었나? 왜 이 협곡에 한번 들어섰던 것 같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 역시 자기 경멸과 자기 혐오를 한 존재여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기본적으로 “부조리를 느낌 > 자기 경멸 > 자기 극복”으로 나아가야 하므로, 차라투스트라 역시 자기 경멸하는 자들의 영역에 왔었던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는 무얼 말하나?
ㅡ이 존재는 자기 경멸자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앞서 살핀 것처럼, “부조리를 느낌 > 자기 경멸 > 자기 극복”의 순으로 나아가면서 점차 인간다워지게 된다.
ㅡ문제는 자기 경멸만 하면, 인간다운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하지만 여기서 언급되는 존재는 이 장 말미에 언급되듯이, 자기 경멸만 했고, 자기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ㅡ그런 점에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지 못하고, 한계를 지니고 있는 존재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의 모습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것을 보며 수치심을 느꼈나?
ㅡ지금 차라투스트라가 마주하는 존재는 자기 경멸을 하는 상태인데, 이 상태에서는 추악한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제어하고 있지 못하다.
ㅡ부조리를 잘 따르고 있다면, 부조리를 잘 포장하고 있을 것이고, 자기 극복을 한다면 부조리를 자기 안에서 몰아내고 있겠지만, 자기 경멸을 하고 있는 존재는 부조리를 어떻게든 처리하지 못하고 경멸하고 있는 상태, 그래서 부조리가 자신 안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런 그릇되고 추한 상태를 보이고 있는 존재를 보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추악함을 보는 듯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흰 머리카락마저 붉어져 버린다는 건 뭘 말하나?
ㅡ얼굴을 붉히다 못해 머리카락마저 붉어졌다는 이야기다.
목소리는 왜 목격자에 대한 복수를 말하나?
ㅡ이 목소리는 자기 경멸자의 목소리인데, 자기 경멸자는 자신의 추악함을 목격하게 된다.
ㅡ추악함을 목격하면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날 수 있는데, 자신의 추악함을 걷어내려고 하거나, 자신의 추악함을 거짓되게 바꾸려고 하거나, 추악한 자신을 본 피하려고 한다.
ㅡ여기서 자기 경멸자는 추악함을 걷어내거나, 왜곡시키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추악한 자신을 보고도 외면한다.
ㅡ문제는 추악한 자신을 보고 외면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추악함을 느끼기에, 자신을 경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소리는 왜 차라투스트라를 유혹해 돌아오게 했나? 미끄러운 얼음은 무엇인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심에 의해 땅바닥에 쓰러지는가?
ㅡ목소리는 자신을 동정하지 않고 자신을 잘 대해줄 존재를 찾으려고 했고,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ㅡ앞서 언급된 다른 존재들처럼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를 찾았는데, 내용의 흐름상 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 되었기에, 유혹해서 돌아오게 했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미끄러운 얼음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의 동정심을 시험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기 경멸자를 보면서 동정심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긍지에 맞지 않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타인을 동정해선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ㅡ문제는 자기 경멸자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위대한 경멸을 경험한 자이기에, 차라투스트라가 챙기고 싶어하는 존재들 중 하나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이 존재를 보며 마음을 쓰게 될 수 있다.
ㅡ그래서 목소리는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옆에서 이야길 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런 점에 의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경멸자에게 동정심을 느끼는데, 이를 차라투스트라가 동정심에 의해 쓰러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긍지에 따라서 동정하지 않고, 그와 대화하게 된다.
목소리는 왜 자신을 보았던 자를 견디지 못했나?
ㅡ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를 개선하려고 하거나 거짓으로 꾸며서 넘어가려는 생각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ㅡ개선하려고 노력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것은 모두 자기를 사랑할 때, 올바른 방식으로든 그릇된 방식으로든 자신을 사랑할 때 나타나는 것인데, 이 존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ㅡ그래서, 결국 추악한 자신을 보는 자기 자신을 없애 버린다.
ㅡ그리고 자기 경멸하는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신을 죽인자는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신은 차라투스트라가 죽었다고 말하는 신, 종교적 신이 아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앞서 「차라투스트라, 4권 6장」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건함 속에도 좋은 취향은 있기 마련, 그 취향이 끝내 이렇게 말해버렸지.
'그런 신이라면 꺼져라!
차라리 신이 없는 게 더 낫다.
차라리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겠다.
차라리 바보가 되고, 차라리 나 자신이 신이 되리라!"
ㅡ여기서 언급되는 걸로 보면, 자기 자신이 신이 되는데, 현재 목소리/자기 경멸자가 죽인 신이 이 신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로써 자기 경멸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신을 자신 안에 두지 못하면서도 사회적/종교적 신도 자신 안에 두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다.
ㅡ그러면서 자기 경멸만 하게 되는 것이다.
왜 목소리는 자신의 추악함에 경의를 표해달라고 하는가?
ㅡ목소리/자기 경멸자는 자신을 경멸하는 상태에 이르기는 했다.
ㅡ그런 점에서 자신의 추악함을 거짓으로 꾸미는 자들보다는 나은 상태다.
ㅡ이에 대해서 경의를 표해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사람들은 이 목소리를 쫓고 있나?
ㅡ이 목소리는 자기를 경멸하고 있는 상태다.
ㅡ즉 자기 자신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상태로, 일반 사람들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된다.
ㅡ그래서 쫓는 것이다.
왜 목소리는 모든 성공이 제대로 쫓기는 자의 것이라고 하나?
ㅡ성공한 자들의 뒤를 많은 사람들이 쫓기 때문이다.
왜 목소리는 자신이 왔던 길로 가지 말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자기 경멸의 길로 가려는 것으로 보아서 그런 듯하다.
ㅡ아니라면, 그저 자기 경멸의 길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언급하는 듯하다.
왜 목소리는 가장 추악한 인간이라고 자기를 말하나? 크고 무거운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왜 말하나? 왜 목소리가 지났던 곳은 길이 험난해지나?
ㅡ이 존재는 자기 경멸을 하면서 있는 존재다.
ㅡ즉 자기애가 없는 상태의 존재이므로, 거짓으로 자기애를 말하는 자보다 추악함이나 그릇됨이 더 바로 드러난다.
ㅡ그런 점에서는 거짓으로 자기애를 꾸리는 사람보다 추하게 느껴질 수 있다.
ㅡ이러한 존재는 자기 경멸을 내뿜으므로, 주변을 음울하게 만들 수 있고, 이로써 주변에 상처를 주게 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목소리를 지나치면서 얼굴을 붉히나?
ㅡ앞서 말했던 것처럼, 추악한 본성을 마주하면서 자신도 뜨끔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 목소리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동정을 던졌을 것인데, 자신은 그 정도로 거지가 아니라고 하나? 왜 목소리는 거지가 되기에 풍부하다고 하나?
ㅡ자기 경멸자는 자기가 자신을 경멸하기는 하지만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의 관심을 구걸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 존재는 오히려 그들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명확하고 분명하고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ㅡ하지만 추악한 그 상태, 음울한 그 상태로 알고 있기에 부정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동정은 왜 주제넘은 짓이며, 수치심에 반하나?
ㅡ현재 자기 경멸자는 자신의 추악한 본성을 경멸하고 있다.
ㅡ그런데 동정하는 자들 역시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경멸자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다.
ㅡ그런 점에서 동정하는 자들이 제 모습도 제대로 모르면서 동정하는 꼴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는 걸로 보인다.
저들이 불행과 추악함과 실패에 외경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불행, 추악함, 실패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두려움도 갖지 않는 경각심이 없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ㅡ즉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정해준 방식에 따라서 무분별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ㅡ올바른 이해를 추구하거나 사태를 바르게 보는 사람은 자신이 불행으로 나아가는지 아닌지, 추악한 상태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하려고 한다.
ㅡ이는 자신이 불행과 추악함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염려/두려움 때문인데, 일반적으로는 이에 대한 경각심이 없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이에게 경고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만 경고를 했나?
ㅡ「차라투스트라, 서문 9장」에서 나왔던 것인데,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설파하다가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게 된다.
ㅡ이에 따라서, 자신과 비슷한 부류를 타겟으로 놓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게 되는데, 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동정으로부터 거대한 구름이 몰려온다는 것은 뭘 말하나? 날씨의 조짐에 대해서 제대로 배웠다고 말하는 건 뭔가?
ㅡ동정을 하게 되면, 이상 사회나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데 장애가 생긴다.
ㅡ왜냐면 동정은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됨/부조리를 견디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올바름을 위한 개선을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든다.
ㅡ따라서 동정은 올바름을 가리는 구름, 장애물이 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날씨를 통해서 표현이 된다.
ㅡ구름이라던가 가혹하다는 것을 날씨를 통한 비유로 보는 것 같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날씨의 조짐을 통해서 잘 이야기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오는 자는 누구인가?
ㅡ고통받는 자는 올바름을 추구하며 고통받거나 부조리에 의해서 고통받는 자로 보인다.
ㅡ올바름 추구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은데, 왜냐면 고통받는 자가 동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ㅡ정말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라면, 차라투스트라가 동정하기 보다는 만족감을 얻지 않을까 싶다.
ㅡ어쨌든 둘 다 해석은 가능하다.
ㅡ확신을 잃은 자는 규율의 부조리를 느끼면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길을 잃은 자가 아닐까 싶다.
ㅡ절망한 자는 부조리에 따라 삶에 대해서 절망하는 자를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물에 빠진 자는, 사회를 바다/물로 보면, 사회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르면 강제로 사회적 규율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상태의 인물을 말하는 것 같다.
ㅡ추위에 떨고 있는 자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고독 속에 빠져 있는 자를 말하는 것같다.
ㅡ이런 자들은 차라투스트라가 동정을 품을 수 있는 자이기에, 조심하라고 목소리가 조언하는 것이다.
목소리가 죽여야 했던 자는 왜 수치심을 모르는 동정을 했나?
ㅡ목소리가 죽인 것은 자기 자신이다.
ㅡ자기 자신이 추악한 자기 자신을 보고 동정하는 상태에 있었다.
ㅡ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자기 자신의 추악함을 인정하는 꼴이기에, 견디기 쉬운 부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ㅡ그래서 나름의 방법으로 고안되는 것이 자신의 추악함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ㅡ그러나 문제는 이미 의식되었기에 개선을 하든 포장을 하든 해야 하는데, 마주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 경멸을 품고 있게 된다는 것이다.
ㅡ애초에 자신의 추악한 면을 몰랐으면 가장 좋았을 것인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과 용감함, 동정심이 어우러지면서, 자신의 추악함을 바라보는 의식을 없애버리게 된다.
ㅡ자신의 추악함을 보고 있기가 힘드니 말이다.
ㅡ그래서 목격자를 죽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목소리에게 “행동하는 자만이 배운다”고 말하나?
ㅡ현재 목소리는 어떤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다.
ㅡ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자신을 포장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ㅡ그래서 행동을 해야만 하는데, 목소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따라서 자신처럼 행동하면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긍지 높은 짐승과 영리한 짐승은 차라투스트라와 목소리에게 올바른 충고자가 되나? 왜 목소리에게만 되는 것이 아닌가?
ㅡ긍지와 지혜는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조언해주는 존재들을 말한다.
ㅡ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10장」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좀 더 영리해지고 싶다! 내 뱀처럼 철저히 영리해지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긍지에게 간청한다.
언제나 영리함과 함께 하라고 말이다!
언젠가 내 영리함이 나를 떠나버린다면, -아, 영리함은 달아나기를 좋아하니!
내 긍지 또한 내 어리석음과 함께 날아가버리기를!'
ㅡ차라투스트라 역시 자신의 여정에서 이들이 자신에게 잘 조언해주어서 행동할 수 있기를 바라기에, 차라투스트라 자신과 목소리에게 좋은 조언을 해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인간이 궁핍하다고 차라투스트라는 탄식하나?
ㅡ목소리의 경우를 보면서, 자기애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를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목소리는 자기애가 없는 상태, 빈곤한 상태인 것이다.
ㅡ그리고 온통 추악함과 수치심만 있는 것인데, 이를 빚이라고 본다면, 인간은 빚만 있는 상태라고 지적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자기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하냐고 묻나?
ㅡ현재 자기 경멸자는 자기를 경멸하기는 하지만 그 경멸의 수준을 넘는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ㅡ그래서 현재 자기 경멸자로서 음울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
ㅡ그래서 자기 사랑은 얼마나 더 커야만 하는지를 논하고 있는 듯하다.
ㅡ이를 통해서 보면, 자기 경멸과 더불어서 자기에 대한 큰 사랑과 기대가 있어야 건전한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ㅡ그리고 이에 따라서, 자기 경멸하는 자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경멸하기만 해선 안 되고, 자기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라투스트라 - 4권 9장 의역 (완) (그림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 | 2024.08.13 |
---|---|
차라투스트라 - 4권 8장 의역 (완) (자발적 거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 2024.08.11 |
차라투스트라 - 4권 6장 의역 (완) (실직,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 | 2024.08.09 |
차라투스트라 - 4권 5장 의역 (완) (마술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 2024.08.08 |
차라투스트라 - 4권 4장 의역 (완) (거머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 2024.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