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4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4권 10장 의역 (완) (정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14. 15:54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4권 10장 정오


         
10장 개괄

 

 

10장은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행복감에 젖어 든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이 담긴다.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사람들과 만나면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충만함을 고요 속에서 누리고자 한다.

 

이제까지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충만함이 주어진 적이 없다.

배척당하거나 떠돌아야 했다.

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주어진 충만함은 지친 차라투스트라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잠시 그 충만함에 빠져드는 것은 그에게 필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따르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 나아가기 위해서 행복감에서 벗어난다.

미래를 위해서 나아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잊지 않은 것이다.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계속 길을 나아갔지만,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홀로 걸으며, 자기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또 자신에게 주어졌던 기분 좋은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오 무렵이 되어서, 태양이 차라투스트라의 머리 위에 있을 때, 그는 포도 넝쿨에 의해 잘 보이지 않는, 휘어지고 울퉁불퉁한 나무를 지나쳤다.

포도 넝쿨에는 잘 익은 노란 포도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갈증을 해소하려고 포도 한 송이를 따려고 했지만, 팔을 뻗는 순간 나무 옆에서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요한 풀밭에 누워 잠을 청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듣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는 갈증해소보다는 잠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누운운 그는 눈을 뜨고 나무와 포도나무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저 나무와 포도 넝쿨의 사랑을 더 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에 들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심장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심장이여, 조용히 하라.

     방금 세계가 충만해지지 않았나?

     나는 고요하게 충만함을 느끼고 싶다.

 

     내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섬세한 바람이 물결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깃털처럼 가볍게 행복감이 내 위에서 춤을 춘다.

     행복감이 나를 설득하고 있다.

     행복감은 나의 내면을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토닥인다.

     그렇게 내가 행복감에 젖어 들기를 강요한다.

 

     나의 이 독특한 영혼은 얼마나 늘어져 있는가?

     내 영혼에게 휴식을 취할 시간이 주어진 것인가?

     좋고 성숙한 것들 사이*에서 너무 행복하게 거닐었나?

*앞서 차라투스트라가 만난 사람들은 예언자를 제외하고 차라투스트라의 뜻에 동의하거나 차라투스트라를 인정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나름대로 행복감에 젖어있는 것이다.

 

     나의 영혼은 행복감 속에서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다.

     너무 좋은 것들을 맛본 것이다.

     이런 내 영혼을 황금빛 슬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 짓누른다.

     내 영혼은 맘에 들지 않는지 입을 삐죽거린다.

 

     나의 영혼은 불안정한 사회에서 이상을 쫓아다니다가, 이제는 지쳐버려 사회를 벗어나 있다.

     사회를 벗어난 곳에서 우리는 더 안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사회를 벗어나 있는 데에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지 않다.

     미래에 대한 믿음, 이상 사회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나는 미래를 기다리며 쉬고 있다.

 

바다 위의 사랑스러운 바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행복감을 바다 위의 사랑스러운 바람으로 표현한다.

 


 

     아, 나의 영혼이여,

     너는 이 행복감을 노래하고 싶은가?

     풀밭에 누워 있는 나의 영혼이여.

 

     하지만 지금은 고요 속에서 행복을 누릴 시간이다.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가 초원 위에서 잠들어 있지 않은가?

     나의 영혼이여,

     노래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

     고요한 행복감이 주어졌으니.

 

     자, 보라.

     여기 차라투스트라가 행복감에 젖어 자고 있지 않은가?

     그는 조용히 행복의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신이 미소 짓고 있지 않은가?

 

     나는 행복해지는 데에는 적은 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똑똑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신성모독이었다.

     현명한 바보들이 현명한 사람들보다 말은 잘하지 않나?

*차라투스트라는 소박함이 더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차라투스트라, 3권 6장」

     화려한 잠자리보다는 소박한 잠자리가 나를 더 따뜻하게 해준다.

     내가 나 자신의 가난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은 어느 때보다도 겨울에 내게 가장 신실하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소박한 것보다는 가장 작고 가볍고 조용한 것이 행복에 이르게 한다고 하고 있다.

이전에는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소박한 것을 추구해도 행복하다는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소박한 것도 떠나서 작고 조용하고 가볍게 해줄 수 있는 고요가 있으면 행복하다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최고의 행복은 가장 적은 것들이 만든다.

     가장 적은 것, 가장 조용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발소리, 찰나의 숨결과 눈빛.

     이런 것들이 만드는 것이다.

 

     쉿!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들어보자.

     시간이 정말 날아갔나*?

     내가 영원의 샘, 이상 사회 속에 떨어진 것인가?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과 같은 운명을 반복하여 결국 이상에 도달한 시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쓴 표현이다.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이 몇 번 반복된다는 것은 몇백 년, 몇천 년은 흐른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이 영원회귀 속에서 희귀한 존재 유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번 반복된다는 것은 시간을 세는 것이 무의미한 시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시간이 날아갔다고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이 여러번 반복되어 세상에 나타나면, 언젠가 이상적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영원의 샘(이상 사회)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와도 잘 이어진다.

물론 실제로 차라투스트라가 이상 사회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의 현재 기분상 그렇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쉿!

     운명이 나를 괴롭히고 있구나.

     부서져라, 나의 심장이여*.

     바라던 행복을 맛보았으니, 운명의 괴롭힘을 충분히 당했으니 말이다.

*심장은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는 기관으로, 이 심장이 부서지라는 것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

 

     세상이 방금 만족스러워지지 않았는가?

     세상은 영원한 반복 속에서 성숙해지지 않았나?

     운명의 황금빛 고리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그 뒤를 쫓자, 어서.”

 

운명의 고리와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행복감에 젖어들면서 자기 운명의 궤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기 운명에 따라 나아가려고 한다.


 

고요 -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기지개를 켰고, 자신이 행복감에 젖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일어나라!

     행복감에 젖은 자여.

     행복감에 젖어 있기에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

 

     너는 얼마나 행복감에 젖어 있었는가?

     영원의 절반 동안,

     즉 과거를 바라보며 행복감에 젖어 있었던 것 아닌가?

 

     이제 일어나라, 나의 늙은 열정이여!

     이제 얼마나 오랫동안 깨어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그는 다시 잠들었다.

그의 영혼이 그를 눕게 한 것이다.

그의 영혼이 말했다.

 

    “나를 내버려 둬라!

     세상이 이제 충만해지지 않았는가?

     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살아가는 자여!”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이 시간 도둑아!

     과거의 행복감에 젖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너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잊었는가?

     나의 영혼이여!”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깜짝 놀랐다. 왜냐면 햇살이 그의 얼굴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청명한 하늘*, 이상 세계여,

     당신은 저를 보고 있습니까?

     이 기이한 제 영혼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은 언제 저와 같은 자들을 거두어 들일 것인가?

*여기서 청명한 하늘은 구름이 한 점없이 밝은 하늘, 태양이 가려지지 않는 하늘을 말한다.

구름은 그릇된 이해를 말하고,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는 점에서, 청명한 하늘은 올바른 이해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 사회로 치환한다면, 올바름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 세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밝고도 무시무시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여!

     언제 당신은 제 영혼을 다시 당신 안으로 거둘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낯선 취기에서 깨어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은 여전히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이를 통해 누구라도 차라투스트라가 오래 행복감에 젖어 들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는 차라투스트라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비해서, 운명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들에게 가혹하다.

 


 생각해볼 거리들

 

정오가 되어 태양이 차라투스트라 머리 위에 떠있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ㅡ여기서 언급되는 정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ㅡ마지막에 차라투스트라가 얼마나 잠을 잤는지, 얼마동안 행복감에 젖어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시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ㅡ후술되는 내용으로 보면, 정오는 어떤 것이 충만한 시점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것은 10장 말미에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장치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휘어지고 마디 굵은 고목은 무엇을 말하나? 포도 넝쿨은 무엇을 말하나?

ㅡ고목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을 살아가는 올바름 추구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포도 넝쿨은 이 올바름 추구자가 만들어 놓은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자신과 같은 운명을 사는 존재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포도를 먹으려다가 잠을 자게 되었나?

ㅡ포도는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ㅡ잠은 행복감을 느끼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다음의 구절을 보면 그러하다.

     노래하지 말라, 그대 풀밭의 새, 오, 내 영혼이여!

     속삭이지도 말라!

     자, 조용! 보라, 저 늙은 정오가 잠을 자고 있다.

     그가 입을 움직인다.

     그가 방금 한 방울의 행복을 마시고 있지 않은가?

ㅡ이에 따라서 올바른 이해를 얻기 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존재 곁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의 격언처럼 한 가지가 다른 것들보다 더 필요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차라투스트라의 격언의 의미는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ㅡ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격언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말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만을 바라고 다른 것을 바라지 않기에,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라는 점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고목과 포도 넝쿨의 사랑을 응시하고 기리는 일에서 아직 성이 차지 않았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같은 운명의 존재의 의미를 계속해서 기리고 싶어하는 중이다.

ㅡ왜냐면 자신이 기리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존재들의 가치를 알아봐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이 드는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심장에 두고서 말을 하나?

ㅡ고요함을 바라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심장의 소리가 크게 느껴져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방금 충만해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 벌어진 좋은 경험들을 떠올렸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유사한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ㅡ이를 통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의 충만함을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충만함을 세계가 충만해졌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스러운 바람이 바다 위에서 가볍게 춤을 춘다는 것은? 잠이 자신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ㅡ바다를 사회라고 한다면, 바람은 바다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즉 자유로운 정신이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ㅡ잠은 행복감이라고 한다면, 행복감이 차라투스트라의 위에서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잠은 왜 눈을 감겨주지 않고, 영혼을 깨어 있게 하나?

ㅡ잠이 행복감이라고 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행복감에 도취된 상태가 된다.

ㅡ그러면 오히려 더 영혼은 각성되어지고 의욕적이게 될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눈을 감겨주지 않고 영혼이 깨어 있게 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잠은 왜 차라투스트라르 설득하나? 잠은 왜 차라투스트라를 가볍게 토닥이고, 재촉하는가?

ㅡ잠은 행복감인데, 행복감은 차라투스트라가 편안히 행복감을 누리기를 재촉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의 영혼은 왜 길게 늘어져 지쳐 있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최근에 조우한 사람들을 통해서 충만함에 가득 차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지쳐있다는 표현이 부정적 의미로서의 지침이 아니라, 충만함에 따른 지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ㅡ다시 말해, 충만함을 누리고 싶은 상태에 놓였다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너무나 오랫동안 좋고도 원숙한 것들 틈에서 행복을 누리며 떠돌아서 그런 것인가?

 

     내 영혼은 길게 늘어지고 있다.

     길게, 더 길게! 내 별난 영혼은 조용히 늘어져 누워 있다.

     좋은 것을 이미 너무 많이 맛보았던 것이다.

 

일곱 번째 날의 저녁이 이 정오에 영혼을 찾아오기라도 했냐는 물음은 뭘 말하나?

ㅡ일곱 번째 날의 경우, 성경의 주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주일의 경우, 모든 것을 창조하고 휴식에 들어간 날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도 휴식의 날이 온 것이냐는 질문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황금빛 비애는 무엇을 말하고, 왜 차라투스트라의 영혼은 삐죽이나?
ㅡ황금빛 비애는 황금과 슬픔을 합쳐 표현한 것으로, 황금은 대가 없이 선사하는 것이고, 슬픔은 그에 따른 슬픔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었지만, 노력의 헛됨을 느끼고 절망을 느끼는데, 이때의 슬픔을 말하는 걸로 보이는 것이다.

ㅡ즉 황금빛 비애는 차라투스트라의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고 그에 따라 슬픔을 겪는 차라투스트라의 운명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그리고 이 운명에 대해서 영혼이 불만족스러운 듯이 입을 삐죽거리는 것인 듯하다.

 

차라투스트라의 영혼이 길었던 여행과 불확실한 바다에 지쳤다고 하는데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설파하려는 여행, 이상 사회를 찾으려는 여행을 떠난다.

ㅡ그 과정에서 바다로 표현되는 사회를 다니게 된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게 되는데, 이를 여행과 바다에 지쳤다고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뭍에 몸을 기대고 있나? 왜 뭍이 더 믿을만 하나?

ㅡ뭍은 바다가 아닌 곳이고, 바다는 사회를 말하므로, 사회가 아닌 곳에 몸을 기대고 있다는 이야기다.

ㅡ즉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홀로 있다는 이야기로, 고독을 말한다.

 

ㅡ뭍, 즉 고독은 부조리나 그릇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바다라는 사회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보고 있고, 이에 따라 뭍이 더 믿을만 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왜 뭍에 배가 정박할 때, 거미줄만으로도 충분한가? 가느다란 실은 무엇을 말하나?

ㅡ뭍에 정박한다는 것은 사회를 벗어나서 고독 속에 있는다는 이야기다.

ㅡ고독 속에 있는 것은 그리 만족스러운 일이 아니기에, 다시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려고 하게 된다.

ㅡ하지만 그렇게 다시 사람들에게 나아가게 하지 않는 수단으로서, 거미줄과 가느다란 실이 언급되는 것이다.

ㅡ그럼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것을 통해서 고독 속에서 자신을 둘 수 있을까?

ㅡ이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나도 지금 뭍 가까이에서 쉬고 있다.

     가장 가느다란 실로 뭍에 묶여 신실하게, 신뢰하면서 기다리며 쉬고 있다.

ㅡ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영원회귀를 통한 자신을 이해할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 이상 사회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노래를 하지 말라고 하는가?

ㅡ충만함을 느끼기에 노래는 필요하지 않고 고요함이 필요하다고 보는 듯하다.

ㅡ노래는 발성하는 활동을 통해서 충만함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고양되어져 버린다.

ㅡ그렇기에 자신의 충만함을 온전히 느끼려면 노래보다는 고요함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신이 웃는다고 하는데, 어떤 존재를 말하나?

ㅡ여기서 신은 차라투스트라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올바름을 분별할 줄 아는 존재는 신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4권 6장」

     '그런 신이라면 꺼져라!

     차라리 신이 없는 게 더 낫다.

     차라리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겠다.

     차라리 바보가 되고, 차라리 나 자신이 신이 되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왜 행복해지는 데 적은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했나? 왜 이제는 가장 작은 것, 가장 조용한 것, 가장 가벼운 것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소박함이 더 좋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3권 6장」

     화려한 잠자리보다는 소박한 잠자리가 나를 더 따뜻하게 해준다.

     내가 나 자신의 가난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은 어느 때보다도 겨울에 내게 가장 신실하다.

ㅡ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소박한 것보다는 가장 작고 가볍고 조용한 것이 행복에 이르게 한다고 하고 있다.

ㅡ이전에는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소박한 것을 추구해도 행복하다는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소박한 것도 떠나서 작고 조용하고 가볍게 해줄 수 있는 고요가 있으면 행복하다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갑자기 시간이 날아가 버렸다고 말하나? 영원의 샘에 떨어졌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행복감에 젖어 들면서, 영원회귀 속에서 나타나는 이상 사회를 그리고 마주한 모양새를 보인다.

ㅡ이때 영원회귀를 마주함으로써 시간이 무의미해지게 되는데, 이를 시간이 날아가 버렸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영원의 샘의 경우, 이상 사회를 말하는데, 말미의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대는 언제, 지상의 모든 것 위에 떨어져 내린 이 이슬방울을 마시려는가?

     언제 이 별난 영혼을 마시려는가?

     언제쯤인가, 영원의 샘이여!

ㅡ여기서 이슬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원의 샘이므로, 올바름을 받아들이는 곳, 이상 사회로 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심장을 찔리는가? 왜 심장이 부서지기를 바라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운명은 고독과 절망이 깔리고, 그에 따라서 고통받는 지경에 이른다.

ㅡ이를 심장을 찌른다고 표현한다.

     더 깊이 맞혀라!

     한 번 더 맞혀라!

     이 심장을 찌르고 파헤쳐라!

     무딘 이빨의 화살로 하고 있는 이 고문은 대체 뭐란 말인가?

 

ㅡ심장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을 바란다는 것인데, 영원회귀의 진리를 알아버린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다.

ㅡ왜냐면 조금 일찍 죽는다 하여도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나 자신이 했던 노력을 계승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충만해지고, 둥글게 성숙해졌는데, 왜 황금의 둥근 고리가 어디론가 사라지는가?

ㅡ현재 차라투스트라에게 충만한 세상, 둥글고 성숙한 세상은 이제까지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ㅡ아직 완전히 충만한 세상도 아니며, 둥글고 성숙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행복감에 따라서 안주하기 보다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서 다시금 올바름/이상을 위해 노력하려고 나아가야 한다.

ㅡ그런 점에서 황금의 둥근 고리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황금의 둥근 고리의 경우, 영원회귀나 운명의 궤도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가 행복감에 젖어 있는 동안 자기 운명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이야기로 보이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기 이해서 쫓아간다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기 자신에게 말하나?

ㅡ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행복감을 더 누리고자 하는 자신과 운명에 따라 다시 길을 나아가려는 자신이 대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 구현을 위해서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영원의 절반쯤 잤다고 말하나?

ㅡ잠이 행복감이라고 한다면, 이 행복감은 과거를 기반으로 느낀 것이다.

ㅡ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환 속에서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현재는 찰나의 순간이므로, 크게 과거와 미래의 이어짐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ㅡ그런 점에 따라서 영원의 반은 과거고 반은 미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정리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과거를 기반으로 느끼는 것이고, 과거는 영원을 이루는 두 축 중 한 축이므로, 절반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그런 점에서 앞의 미래도 행복에 이르게 해야 하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영혼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늙은 심장에게 얼마나 오래 깨어 있을 수 있냐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낀다.

ㅡ이제 깨어나면 다시 현실이 시작되고, 그에 따라서 묵묵히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ㅡ이런 상황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늙어버렸다.

ㅡ과연 이제야 느낀 행복감이 자신의 여생에서 얼마나 열의로서 작용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황금빛 둥근 공은 무엇을 말하나?

ㅡ황금빛 둥근 공은 황금의 둥근 고리를 따라 나아가는 존재를 지칭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즉 영원회귀 속에서 올바름 추구자로서의 운명을 사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차라투스트라를 부르는 별칭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기 자신을 도둑이자 게으름뱅이라고 부르나?

ㅡ현재 차라투스트라는 행복감에 젖어서 운명을 위한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존재로, 시간을 훔쳐간다던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여전히 축 늘어져 하품을 하고 한숨을 쉬면서 저 깊은 샘 속으로 떨어지겠다고?

ㅡ현재 행복감에 젖은 차라투스트라가 노력도 하지 않고 이상 사회 속에 머물려고 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 깊은 샘이 영원의 샘이고 이는 이상 사회를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영혼에게 대체 누구냐고 묻나?

ㅡ영혼에게 자신의 올바름 추구자로서의 운명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햇살은 무엇을 말하나?

ㅡ햇살은 태양이고, 이는 올바름/이상을 말한다.

ㅡ이상/올바름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추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영혼에서 이상/올바름으로 대화의 대상을 바꾼다.

 

왜 하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자신의 영혼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를 묻나?

ㅡ자신의 삶을 하늘/이상/운명이 돌보고 있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후술되듯이, 언제 이슬을 거두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한다.

ㅡ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노력하다가 고독 속에서 처량하게 죽어갔다.

 

왜 영원의 샘은 명랑하면서도 소름 돋나?

ㅡ영원의 샘은 이상 사회/올바름을 말하는데, 이것은 분명 삶을 긍정하게 하지만, 그에 맞춘 절망을 제공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낯선 취기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이나?

ㅡ행복감에 젖어 들었다가 깼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