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2장 의역 (완) (서판 2/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7. 22. 22:39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2장 서판 -2-


         
12장 11~20절 개괄

 

 

11~20절까지의 내용을 개괄해보도록 하겠다.

 

11절은 과거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현사회의 모습을 지적한다.

과거의 사람들도 분명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했을 것인데, 올바르게 인식되지 않고, 그릇되게 인식하여, 잘못된 규율을 만들고 그것이 올바른 것처럼 여기면서 사는 모습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 나와 과거의 노력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2절은 진정한 명예에 대해서 말한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종교적 명예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며,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 것만이 명예로운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13절은 삶의 덧없음을 삶에 대한 올바른 지혜로 여기는 것에 대해서 지적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는 삶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숙한 존재들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로 여겨지는 건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저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를 부숴달라고 요청한다.

 

14절은 세계를 절망적으로 보는 이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절이다.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이듯이, 부조리한 자들에게 세상이 부조리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세상의 일부 면 중 부조리한 면만 주목하여 세상을 오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15절은 현생에서 어떤 노력도 하지 말고 절망하게 만드려는 규율을 비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현생에서 희망을 찾고 행복을 누리길 바라기에, 이러한 입장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16절은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 하는 것을 왜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보는지 설명한다.

사람들이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고 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보는 이유는 사람들이 올바른 인식을 얻어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해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실패를 겪으니,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영역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시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는 개인의 능력 부족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선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는 시도가 필요하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사고를 하는 방법과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17절은 세상에 절망하여 노력할 의지가 꺾인 사람들에게 “너희는 아직 세상에 기대하는 바가 있으니 노력하라”라고 말하는 절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노력할 의지가 꺾인 사람들도 아직 세상에 기대하고 있기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삶을 등져야 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으므로, 아직 이들은 삶에 대한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18절의 경우, 올바름을 추구하다 지친 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올바름을 추구하다가 지치면, 차라투스트라가 그랬던 것처럼, 더는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런 상태의 사람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강제로 이들을 일으켜 세우거나 이들이 스스로의 경험을 복기하여 다시 올바름을 추구할 의욕을 가질 때까지, 이 사람이 의지를 갖는 걸 방해하는 대중들로부터 이 존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절의 경우,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에게서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들러붙는 기생충적 존재가 많은 이유를 설명한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은 누구보다도 올바른 이해를 발견하기에 좋은 자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허세를 부리려는 자들에게 있어 앎을 제공받는 좋은 소스가 된다.

 

20절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이해로 이끌 방도가 없는 자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설명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이끌 엄두가 나지 않는 존재는 빨리 포기하고 그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게 낫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오히려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본문

 

 

-11-

 

과거의 탐구가 현재의 사람들에 의해서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는 것,

저는 이런 처지에 있는 탐구자를 동정합니다.

올바르게 인식되지 않고 되려 그릇되게 인식되어지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니까요.

 

부조리한 사회가 과거의 올바른 탐구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로써, 부조리한 사회에 일조하게 만드는 것이죠.

 

관습이나 규율에 대해서 생각할 때, 왜 이런 관습과 규율이 생겼는지 살피지 않느 경우가 있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계속 따르는 것이니 따르는 것이죠.

이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자들이 사회의 주류가 된다면, 올바름을 위한 과거의 노력은 다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이해를 위한 과거의 탐구들을 왜곡하지 않고 올바르게 평가해줄 수 있는 고귀한 존재들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고귀함에 대해서 새롭게 규정할 필요도 있습니다.

현재 세상에서 말하는 고귀함은 진정한 고귀함과 거리가 머니까요.

 

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이해를 위한 노력을 왜곡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지속될 수 있으니까요.

홀로 올바른 것을 지키려고 한다면, 언젠가 지쳐 쓰러져 명맥이 끊기는 순간이 오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비유로 말한 바 있듯이,

하나의 이상적 존재가 세상에 홀로 주류로 자리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이상적 존재들이 있어야 이상적인 사회가 자리할 수 있는 법이죠.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이해를 담은 말입니다.

 

고귀한 자들과 귀족

이들은 과거가 그릇되게 이해되는 것을 막고, 과거가 미래의 이상 사회에 이바지하게 하려고 한다.


 

-12-

 

형제들이여,

저는 여러분을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지키는 자로 삼고, 인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상 사회를 위한 제 노력의 증인이 되고, 저를 이어 이상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건 하나같이 그 가치가 작은 법이죠.

 

여러분의 명예는 출신이 아니라 지향점에서 비롯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향해 삶을 이끄느냐에서 말이죠.

 

여러분이 왕을 섬겼더라도, 여러분은 명예로운 존재라 할 수 없습니다.

왕을 섬기지 않는 순간 사라지는 명예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관습과 규율을 수호하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해도, 여러분은 명예로운 존재라 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관습과 규율은 그릇된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교양 있는 존재로서 예절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고 해도, 여러분은 명예로운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명예롭지 않지만, 사람들이 명예라 일컫는 것들을 수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양을 지니고 예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궁정 신하들에게 있어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궁정 신하들은 죽으면 이러한 교양과 예절을 벗어나는 행복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죠.

 

또 여러분의 조상이 성령을 통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다 해도, 여러분은 명예로운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과 약속의 땅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고, 허황된 것이며 찬미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끈 것들은 가축이거나 죄인이거나 아첨하는 자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과거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미래를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거를 바라보며 사는 곳, 종교와 과거의 관습을 따르는 곳에서 추방당한 자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존재들의 세계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여러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기를!

아직 현생에서 보이지 않는 이 미래의 세계,

그 세계를 향해서 여러분은 현생의 부조리와 맞서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현생의 어떤 명예보다도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가 갖는 명예가 진정한 명예라고 본다.


 

-13-

 

   “삶은 의미가 없고, 허망하다.

    짚을 불태운 것처럼, 덧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여겨지곤 합니다.

이런 이해가 올바르게 여겨지는 이유는 오랫동안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오랫동안 공감되었다는 이유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겁니다.

 

어리숙한 인식을 갖춘 자라면, 삶에 대해서 저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리숙한 자들은 노력하다가 허망함을 느낄 때, 노력하는 것을 덧없게 여기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간의 지혜는 어리숙한 존재들의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삶을 허망하게 여기는데 일조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의 허망함을 두고 공허해하는 걸까요?

이런 사람은 공허해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야 합니다.

 

저들은 올바른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애초에 올바른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도 열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게 헛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이여,

올바른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을 헛되다고 하는 자들의 서판을 부숴주길 바랍니다.

 

불타는 볏짚

볏짚은 불이 타도 금방 꺼져서, 태워도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서 삶도 그러하게 여겨진다.


 

-14-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해봅니다.

    “돼지에게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

 

세상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 절망한 자, 의욕을 잃은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본래 부조리하다”

 

이들이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애초에 부조리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벗어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종교인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거칠게 저들에게 세상은 분명 부조리한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분명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것이 그릇되었다고 하지만, 이 그릇된 것들을 통해서 올바른 것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이상적인 인간도 그릇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상적인 인간도 여전히 더 이상적일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말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물 범벅인 사회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을 부조리하다고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부조리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함은 세상이 가진 하나의 면이라고 지적한다.


 

-15-

 

    “세상을 그냥 이대로 두어라.

     세상을 바꾸거나 비판하려고 하지 말아라.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게 둬라.

     여기에 맞서서 누구도 비판하거나 지적하지 마라.

     그래야 사람들이 현생의 무의미함/허망함을 배우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바라는 너의 정신을 죽여라.

     그렇게 해야 너는 이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내세에 온전히 향하게 될 테니.”

 

저는 경건한 종교인들이 자기 양심에 대고, 어떤 악의도 거짓도 없이 이런 말을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들이 말하는 잠언은 그야말로 악의적이고 거짓된 것이긴 하지만요.

 

형제들이여,

현생을 포기하게 하는, 현생을 잘못 받아들이게 하는 이런 잘못된 규율을 부숴주기 바랍니다!

 

현생을 포기한 사제

이들은 현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적하지 말고 현생에 대한 기대를 끊으라고 말한다.


 

-16-

 

    “현명한 사람은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삶을/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 뿐,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다.

     그러니 너는 올바름을 욕망해서는 안 된다.”

 

저는 이런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부숴 주길 바랍니다.

 

세상에 절망하고, 허무와 염세를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것을 올바른 것으로서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이 사회의 규율에 순응하게 하려고 말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서 잘못 배웠고, 세상에 대한 가장 올바른 관점은 배워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은 너무 쉽고 간편하게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세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관점에 따라 이들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조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은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은 부조리가 넘치는 곳이겠죠.

 

올바른 인식을 하는 것,

이것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친 자들은 올바른 인식을 원하지 않고, 다른 이로부터 인식을 얻으려고 하여 사회적 유행과 흐름 속에서 휘둘리게 됩니다.

 

올바름을 추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기존의 사회적 규율이 아닌 올바른 길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우선 그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로 올바름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올바름을 추구하며 겪는 고독이나 방황에 지치게 되죠.

그러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굳이 왜 올바름을 추구했을까?

     뭘 해도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인데.”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삶은 어떤 의미도 없고, 무언가를 원하는 것도 덧없다' 라는 말은 달콤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건강한 삶을 사는 걸 방해하죠.

 

형제들이여,

저는 이렇게 올바름을 추구하다 지친 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알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 속에 생긴 피로를 꺼내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끔 말입니다.

그들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게끔 말입니다.

 

제가 나누는 앎은 사람들의 지치고 억압된 정신에 울림을 줄 것입니다.

 

올바른 인식을 하려고 하는 것,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집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지를 갖는 것은 곧 자기를 중심으로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우선 올바르게 사고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지친 여행자와 시원한 바람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피로와 고독을 해소하게끔 도움을 주려고 한다.


 

-17-

 

종교는 사람들에게 내세라는 불확실한 희망을 보여주며, 자신들을 따르라고 합니다.

과연 누가 저 불확실함을 따라 가려고 할까요?

 

여러분 중 누구도 저 불확실한 희망을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왜 여러분은 세상에 지친 채로만 있습니까?

 

이 세상에 지쳤다고 말하지만, 여러분 중 누구도 세상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현생에 집착하고 있고, 세상에 지쳤다고 말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의 입꼬리가 못마땅한 듯하게 처져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아직 이 세상에 기대하는 바가 있기에, 못마땅한 듯이 입꼬리가 처져 있는 것이죠.

게다가 여러분의 눈은 이 세상의 쾌락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계에는 좋은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일부는 실용적이어서 좋고, 일부는 즐겁게 해주기에 좋죠.

또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은 여자의 가슴처럼 유용하면서도 즐겁게 해주는 것이죠.

이러한 것들이 있기에, 이 세계는 그나마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이 지친 자들이여,

여러분들은 채찍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쳐 늘어져 있지 못하게, 행동하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여러분들이 정말 현생을 부정하는 존재이거나, 노쇠한 존재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저 늘어져 있으면서 좋은 것만 취하길 바라는 게으른 고양이와 같은 상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계에서 어떤 노력도 기울이고 싶지 않다면, 여러분은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입니다.

정말 현생에 대해서 부정하는 존재라면,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현생을 부정하는 존재라면, 그냥 이 세상을 떠나는 편이 낫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을 끝내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죠.

그러니 사람들은 세상에 절망만 할 뿐 죽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절망만 하며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겁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처진 입꼬리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면, 입꼬리가 처질 일도 없다.


 

-18-

 

형제들이여,

규율 중에는 자기 행복을 추구하다가 만들어진 규율이 있고,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나타나는 규율이 있습니다.

이 둘은 다르게 보이긴 하지만, 사실 같은 상태에 있는 규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자기 행복/올바름을 추구하다가 탈진한 자를 보십쇼!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그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는데, 지쳐서 그는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지친 그의 곁에서 마음을 달래 주며 그가 떠나지 못하게 하여, 그로부터 혜택을 누리고자 하고 있네요.

 

아,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강제로라도 자기 행복을 향해 더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물론 그가 스스로 의욕을 찾을 때까지 그를 놔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이여,

이렇게 지쳐 쓰러진 자를 지켜주도록 합시다.

스스로 깨닫고 의욕을 가질 때까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를 통해서 혜택을 보려는 자들을 쫓아내도록 합시다.

교양을 추구하는 자들은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가 자기 행복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 말입니다.

 

탈진한 자와 개들

올바름을 추구하다 탈진한 자들 곁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올바른 이해를 얻고자 기회를 보고 있다.


 

-19-

 

올바름을 추구하며 나아갈수록, 제 곁에는 점점 사람이 적어지고, 어떤 진리의 영역을 의식하게 됩니다.

 

형제들이여, 이 진리의 영역으로 나아갈 때, 받기만 하고 보답하려 하지 않는 자들이 함께 오르지 않도록 주의하길 바랍니다.

받기만 하고 보답하려고 하지 않는 존재들,

그들은 기생충과 같아서, 여러분들의 고독을 무기삼아 여러분들로부터 앎을 받아 교양을 쌓으려고만 합니다.

 

이들은 여러분들이 사람에 대한 갈증과 박애정신,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귀신같이 압니다.

여러분이 갖는 이 결핍을 채워줄 것처럼 여러분을 속이고 여러분에게서 올바른 앎을 얻으려고 하죠.

 

인간들 중에 가장 하찮은 존재가 바로 이러한 자들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고상한 존재들에게 이런 자들이 많이 꼬이죠.

고상한 존재들에게 올바른 이해가 많으니, 이들에게서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는 자들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존재,

자신을 가장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

올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서 현상들을 왜곡없이 관찰하는 존재,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존재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사색하는 존재,

이처럼 사색하려는 의지를 소유한 존재,

사회적 규율과 상식에 물든 자신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존재,

바보같다/어리석다는 사회적 평가가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존재,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

만물에 대해서 고정된 관점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존재,

 

아 이처럼 이상적인 존재에게 어떻게 앎을 얻으려는 자들이 꼬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상한 자와 아첨꾼

고상한 자에게서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는 자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며 그가 자신들 곁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고 한다.

 


 

-20-

 

저는 '떨어지는 것은 붙잡지 말고 더 밀어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 형제들이여,

이런 제가 잔인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가치를 잃고 절망하며 쇠락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누가 붙들려 한단 말입니까?

저는 되려 이들을 더 밀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을 포기하는 쾌감을 아십니까?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어떻게 제게 포기되는 지요.

 

저는 더 나은 자들을 알리기 위해 나타난 존재입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선례를 제공하는 자인 겁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할 수 없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빨리 사라지게끔 종용해야 합니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돌덩이

차라투스트라는 처치 곤란한 자들의 경우,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지난 일 모두가 포기된다는 건 뭘 말하나?

ㅡ”과거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이거나 “과거를 이해하기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ㅡ즉 과거가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과거는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한 과거이거나, 별 볼일 없는 과거를 말한다.

ㅡ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한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면 과거가 잘못 이해되는 상황이 생기고, 별 볼일 없는 과거를 잘못 이해하면, 역시 이상한 오해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

ㅡ이러한 과거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그릇된 이해가 판을 치게 되고, 과거의 노력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데, 이를 말하는 걸로 보인다.

 

과거에 일어난 일 전부가 모든 세대의 자비와 정신, 망상에 내맡겨져 그것의 다리로 해석된다는 건 뭘 말하나?

ㅡ과거의 일이 잘못 해석되고, 그로 인해서 어떤 것을 지향하는 계기가 된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ㅡ과거의 일을 종교적 사건으로 본다면, 그 과거를 바탕으로 종교를 정당화하는 계기가 된다; 예컨대 천국을 지향하게 하는 계기.

ㅡ이러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공할 폭군, 약아빠진 괴물은 뭘 말하나?

ㅡ그릇된 이해나 관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예컨대, 구원이라는 개념이라면, 이 개념을 바탕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이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성자로 해석하거나, 어떤 사태를 기적으로 만들면서 종교관을 강화하는 것이다.

 

기억이 할아버지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는 천민 부류는 뭘 말하나?

ㅡ이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규율에 대해서 단순히 이어져 온다는 이유로 받들고, 그 원류의 올바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존재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들은 그저 주어진 규율을 묵묵히 따르며 지내는 존재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일 모두가 포기되면, 왜 천민이 주인이 되나?

ㅡ올바름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하고 공감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천민이 다수라고 볼 수 있으므로, 무지한 다수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듯하다.

 

얕은 물에서 모든 시간이 익사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얕은 물은 얕은 이해력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즉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이 얕은 이해력 속에서 그 의미를 잃고 사라진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천민에 맞설 새로운 귀족이 필요한가?

ㅡ현재 얕은 수준의 앎이나 이해가 지배를 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깊은 수준의 이해가 왜곡되고 핍박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귀족이 출현하려면 고귀한 자가 많이 있어야 하나?

ㅡ귀족을 지키는 자라고 보자.

ㅡ귀족이 올바른 이해를 지키는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라면, 이 사람은 올바른 이해를 지키다가 고독을 맛볼 것이고, 삶이 피폐해질 것이다.

ㅡ따라서 이 귀족이 올바른 이해를 지킬 때, 잘 지킨다고 응원해주고 힘을 더해줄 존재들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 신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은 없다고 말하나?

ㅡ앞서 말한 것처럼,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상적 존재가 여럿이 있어야 하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신이 하나 있다면, 그 신이 다스리는 세계나 신에 대한 인식은 그릇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ㅡ그렇기에 신이 있으려면 여럿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왜 홍학처럼 알록달록한 옷차림으로 얕은 못에서 오랜 시간 서 있는 법을 배우는 건 명예가 아닌가? 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궁신들에게나 하나의 공훈이 되나? 모든 궁신은 앉아도 된다는 것이 죽음 이후의 복에 속한다고 믿나?

ㅡ여기서 말하는 오래 서 있는 것은 교양이나 예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그리고 이러한 교양과 예절을 지니는 것은 궁정 내에서나 통용될 뿐, 실제 농민이나 천민들의 삶에서는 쓸데없는 짓으로 취급될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궁신들에게만 이러한 교양과 예절이 공훈이자 명예로운 걸로 취급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ㅡ앉아도 된다는 것은 교양과 예절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고, 사는 동안 궁정에 있다면, 교양과 예절을 벗어나 살 수는 없으므로, 교양과 예절은 죽으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된다.

ㅡ교양과 예절에 질려 있다면, 죽은 후에 더는 교양과 예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복되다고 여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귀족들이 뒤가 아니라 앞쪽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앞과 뒤는 미래와 과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과거를 바라보는 것은 전통이나 종교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이상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귀족들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라고 말하므로, 올바른 이해를 위해 나아가는 방향, 즉 미래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귀족들은 왜 아버지의 땅, 조상들의 땅에서 쫓겨난 자여야 하나?

ㅡ여기서 귀족들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고, 그래서 부조리한 전통과 규율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

ㅡ그렇기에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는 과거를 따르는 자들에게 배척되어야 하는데, 아버지와 조상이 과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땅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땅은 뭘 말하나?

ㅡ아이들의 땅은 미래의 땅을 말하고, 이는 이상 사회를 말한다.

ㅡ먼 바다에 있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땅 역시도 미래의 이상 사회를 말한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너희 아버지들의 아이라는 걸 좋게 작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올바름을 위해 노력한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미래지향적이며, 미래의 존재들을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ㅡ이러면 아이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둔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갖출 수 있게 된다.

ㅡ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지난 일 모두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과거를 반면교사 삼아서 올바른 것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아무리 그릇된 과거라도 미래에 이바지를 하게 된다.

ㅡ이러면 그릇된 과거는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데, 이를 구원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케케묵은 잡담이 지혜로 간주된다는 건 뭘 말하나? 왜 곰팡내가 나서 존중받는다고 하나?

ㅡ삶이 무의미하고 헛되다는 것이 지혜로 여겨진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것은 잡담인데 지혜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ㅡ즉 오래됨으로 인해서 인정받게 되었고, 이를 곰팡내가 나서 존중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불에 데어본 적 있는 어린애들이 불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현재 해당 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삶이 무의미하고 헛되다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 보면, 이 문장에서 어린애는 삶이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ㅡ그리고 불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삶을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여긴다는 걸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ㅡ따라서 불에 데였다는 것은 삶에서 노력하다가 무의미와 헛됨을 느껴봤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하고한 날 짚을 털어대는 자가 어찌 그 털어댐을 비방해도 된다는 거냐는 이야기는 뭘 말하나? 왜 입마개를 씌어야 한다고 하나?

ㅡ짚을 터는 것은 짚을 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ㅡ즉 무의미한 행위인 것이다.

ㅡ이에 따라 짚을 터는 자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는 자를 말한다.

 

ㅡ무의미한 행동을 하는 자가 무의미한 행동을 하면서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ㅡ스스로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런 사람은 불평을 하게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식탁에 아무것도, 배고픔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식탁은 지적인 배고픔을 느껴 찾는 곳을 말한다.

ㅡ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식탁에서는 앎을 얻으려고 한다; 관련해서 「차라투스트라, 2권 15장」과 「차라투스트라, 2권 16장」을 참고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 2권 15장」

    반면 나의 말은 변변치 않고 멸시당하고 유창하지 않은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이 식사할 때 식탁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기꺼이 줍는다.

 

    「차라투스트라, 2권 16장」

    사실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내가 학자들의 집을 나왔고, 나오면서 등 뒤로 그 문을 힘껏 닫아버린 것이다.

 

    내 영혼은 굶주린 채 저들의 식탁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저들과는 달리 나는 호두를 까는 방식으로 인식에 도달하도록 길들여지지 않았다.

ㅡ15장에서 언급되는 식탁은 지적인 대화를 하는 장소를 말하고, 사람들이 거부하는 지적 화제도 자신은 다룬다는 의미를 담는다.

ㅡ16장에서 학자들의 식탁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올바른 앎을 얻지 못하고 기다린 채로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다.

 

ㅡ이에 따라 식탁은 지적인 장소라고 볼 때, 식탁에서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잘 탐구하고 잘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광적인 자, 머리와 심장이 늘어진 의기소침한 자는 왜 세상 자체가 오물 덩어리 괴물이라고 하나?

ㅡ세상이 부조리로 가득하여 오물 덩어리 괴물이라고 한다.

 

ㅡ여기서 광적인 자, 의기소침한 자는 모두 세상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자들을 나타낸다.

ㅡ그래서 전부 불결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언급된다.

 

왜 배후세계론자들은 세상을 뒤에서 보지 않으면 진정도 쉬지도 못하나?

ㅡ배후세계론자들은 종교인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종교인들은 과거 종교적 인물의 행적이나 그에 따른 전통들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과거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다.

ㅡ그에 따라서 과거부터 비롯된 전통에 따르는 게 아니라면 불편해한다.

 

구역질 자체가 날개를 만들어내고, 샘의 원천을 예감하는 힘을 만들어 낸다는 건 뭘 말하나?

ㅡ구역질은 세상의 부조리를 겪으면서 나타나는 반응을 말한다.

ㅡ이 부조리에 따른 반응이 날개, 즉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게 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샘의 원천의 경우, 삶이라는 기쁨의 샘을 언급하는데, 삶을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ㅡ즉 세상의 부조리를 통해서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고, 현생을 긍정하는 방향까지 나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왜 최상의 인간에게도 구역질을 일으키는 뭔가가 있다고 하나?

ㅡ최상의 인간은 현생에서 이상적인 존재를 말하는데, 이 존재는 이상 사회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에, 사회적 규율을 강제로 교육받고 그에 따른 흔적을 가지고 있게 된다.

ㅡ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을 목 졸라 죽이라고 하나? 이 세상으로부터 온 이성이라면 어떤 문제를 갖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사람들은 배후세계론자다.

ㅡ이들은 개인이 이성을 갖추고 사색하기 보다 종교적 규율에 따라 살기를 바란다.

ㅡ그런 점에서, 개인이 이성을 갖추지 않는 걸 바란다.

 

ㅡ그런데 왜 이 세상으로부터 온 이성이라는 표현이 나타날까?

ㅡ이 세상으로부터 온 이성은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이성이기 떄문이다.

ㅡ종교 입장에서는 이런 이성은 없애야 하는 것이다.

 

많이 배운 자는 격렬한 욕망을 모두 잊는다는 건 뭘 말하나?

ㅡ많이 배운 자, 현명한 자, 깨달은 자는 욕망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왜냐면 삶의 덧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 올바른 것을 알려는 욕심은 무지한 자의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지혜는 왜 피곤하게 하나?

ㅡ지혜가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질문을 낳고, 그 질문에 따라서 여러 사람을 귀찮게 하는 일을 벌이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사회적 규율이나 관습에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이 존재 하나로 인해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된다.

ㅡ그러므로 지혜를 갖지 않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왜 저들은 제대로 배우지 않고, 가장 좋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다고 하나? 또 왜 모든 것을 신속하게 일찍 배웠다고 말하나?

ㅡ여기서 저들은 지혜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데, 이들은 올바른 이해를 갖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이들이 그릇된 이해에 순응했다는 것이 되고, 올바른 이해를 배워야 할 이유, 이를 통해서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좋은 것도 배우지 못했으며, 성급하게 세상을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다.

 

삶은 기쁨의 샘인데, 탈이 난 위장, 비탄의 아버지가 말을 해대는 자의 샘은 왜 독으로 오염되어져 있나?

ㅡ이미 탈이 난 위장을 가진 자는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ㅡ그렇기에 삶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렇다 보니 기쁨이 가득한 이 삶을 부조리가 가득한 삶으로 오해하게 된다.

ㅡ이를 나타내는 구절이다.

 

인식한다는 건 왜 사자의 의지를 가진 자에게 기쁨이고, 지쳐버린 자에게는 그 자신이 의욕 대상이 될 뿐이며 물결에 희롱 당하나?

ㅡ여기서 인식한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사자는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사회적 규율과 맞서는 자를 말하므로, 이런 사자 같은 자에게 올바른 이해를 인식하는 것은 기쁨이 된다.

 

ㅡ지쳐버린 자의 경우, 올바른 인식을 시도하다가 지친 자를 말하는데, 이들은 이미 지쳤기에, 자기 스스로 올바른 인식을 얻으려고 의욕하기 보다는 사회나 타인으로부터 의욕할 것을 받기를 바란다

ㅡ의욕 대상이 될 뿐이란 이야기는 의욕할 것을 외부로부터 받고자 한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ㅡ이는 곧 사회적 관점을 따르는 것이 되는데, 결국 사회적 유행과 흐름 속에서 부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그래서 물결에 희롱당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여로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광풍으로 다가서나?

ㅡ여기서 말하는 여로는 올바름을 위해서 여행을 떠나다가 겪은 피로를 말한다.

ㅡ이들은 올바른 이해를 찾다가 고독과 방황으로 인하여 피로를 느끼게 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이 방황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주고, 고독해 할 때 고독감을 없애는데 도움을 주므로, 여로이 지친 자들에게 시원한 바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많은 코가 재채기 하나?

ㅡ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면서 갖게 된 좋지 못한 것, 부정적인 것들이 내뱉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욕은 왜 자유롭게 하나? 의욕이 곧 창조라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의욕은 올바름에 대한 의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올바름에 대한 의욕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거부를 낳고, 이로 인하여 삶의 기준이 사회가 아닌 자기로 나아가게 한다.

ㅡ그러면 자기를 위한 통찰을 해 나가게 되는데, 이로써 자기 행복을 위한 가치관이 창조되게 된다.

ㅡ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로 나아가는 조각배는 뭘 말하나? 왜 사람들은 저 죽음의 배에 올라타기를 원치 않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조각배는 천국이나 내세로 이끄는 조각배, 종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사람들은 내세로 이끄는 배에 올라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ㅡ사람들이 내세로 이끄는 배에 올라타지 않는 이유는 아직 내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현생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을 두고 쾌락의 고양이라고 하는가?

ㅡ삶이 괴롭다고 하면서 기회가 되면 재미나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모양새를 고양이 같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고양이의 의미는 받기만 하고 나눠주려고 하지 않는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므로, 쾌락만 누리려고 하고 남에게 쾌락을 주지 않으려는 이기적 존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4[100]

    그대들이 늑대, 고양이와 무슨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늘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며,

    받는 것보다는 훔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것들과 말이다.

    그대들은 언제나 선사하는 자들이다.

 

치유불가인 자들에게 의사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되는 법이란 이야기는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생을 진정으로 부정하는 자들은 치유할 수 없다고 본다.

ㅡ그에 따라서 이런 자들은 사라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끝장을 내려면 시구 하나를 새로 지을 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현생을 부정하는 자들은 죽어야 하는데, 실제로 죽으려면 현생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ㅡ그런데 그런 용기가 없으니 저들이 계속해서 살면서 현생을 부정하고만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피로감이 만든 서판과 게으름이 만든 서판은 왜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나?

ㅡ결국 올바름을 찾다가 지쳤든, 올바름을 찾을 의지가 없든 결과적으로 행동은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탈진한 자는 어떤 목표를 한 뼘 정도 두고서 누워있나?

ㅡ자기 행복으로 나아가려는 목표를 지향하며 나아가다가 눕게 되었다.

ㅡ이 존재가 드러누운 이유는 생각보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받고 위대한 양 취급받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양이 작열하고, 개들이 그의 땀을 핥는다는 건 뭘 말하나?

ㅡ태양을 올바른 이해라고 본다면, 올바른 이해가 이 존재에게 투영되고, 그에 따라서 올바른 이해가 방출되게 되는데, 이를 주변의 개들이 흡수한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즉 자기를 추구하며 나아가다가 절망해서 남들에게 올바른 이해만 제공하고 있는 모양새다.

ㅡ그런데 개들이 땀을 핥아준다는 것은 땀을 닦아준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므로, 지친 이 사람을 위해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ㅡ이는 다르게 말하면, 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 곁에서 위로하고 달래주면서 혜택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지쳐서 쓰러진 이 자를 시원한 비와 잠이 오게 내버려 두자고 하나?

ㅡ스스로 정신을 다잡고서 올바름을 추구하게끔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ㅡ즉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이야기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개들과 구더기를 쫓아버리라고 하나?

ㅡ저들의 경우, 자기를 향해 나아가는 자,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가 의지를 다시 가지게 되면, 그와 멀어져야 할 수도 있으므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가 현재에 안주하게 하려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도 좌절했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르고 싶어서 고독으로 나아가지 않았었다;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저 존재가 의지를 다잡을 수 있게끔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는 존재들로부터 저 존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 주위에 원을 그려 결계를 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고독의 결계를 치는 게 아닐까 싶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가 형제들에게 말할 때, 기생충이 붙지 않게끔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신성해지는 산들로 산맥 하나를 만든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올바름을 얻을수록 어떤 하나의 올바름의 영역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ㅡ즉 진리의 세계, 진리의 영역을 마주하는 듯한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기생충들이 따라붙지 않도록 살피라고 하나?

ㅡ기생충들의 경우, 앎을 나눠도 노력하지 않는 존재들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3권 11장」

    그리고 나는 내가 발견했던 가장 역겨운 인간짐승에게 기생충이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이 짐승은 사랑은 하지 않으려면서 사랑을 먹고 살기를 원했다.

ㅡ이런 존재들의 경우, 앎을 나눠도 실망만 주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싫어한다.

 

기생충들이 그대들의 병들고 상처 난 구석구석에 붙어 살찌운다고 하는데, 뭘 말하나?

ㅡ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은 고독한 상태의 존재다.

ㅡ그러므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하고 싶어한다.

ㅡ기생충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이러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의 상태에 맞춰 행동하면서, 그들로부터 앎을 얻고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인 척하려고 하는 것이다.

 

ㅡ이처럼 고독에 약한 것, 사람에게 호의적인 것을 잘 노려서 기생충들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 곁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가장 멀리 달리고,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포괄적인 영혼은 뭘 말하나?

ㅡ자기 내면을 알기 위해서 자기 내면을 깊게 파헤치며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면서 자신의 온갖 면에 대해서 포괄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듯하다.

ㅡ즉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많은 통찰을 갖춘 영혼을 말하는 것이다.

 

기뻐서 우연 속으로 돌진한다는 건 뭘 말하나? 왜 이게 가장 필연적인 영혼인가?

ㅡ우연은 단순한 현상을 말하고, 이 우연들 속에 자리한 필연을 발견하는 것이 탐구자의 일이다.

ㅡ그러므로 우연 속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어떤 의문이 가거나 호기심이 가는 현상을 파악하려고 나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ㅡ그렇게 나아가면서 우연 속에 숨겨진 필연을 찾아내므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필연적인 영혼이라고 지칭되는 듯하다.

 

존재하면서도 생성 속으로 잠겨 드는 영혼은 뭘 말하나?

ㅡ생성은 이 세계의 만물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즉 이 세계의 만물에 잠겨 드는 영혼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만물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바라본다는 의미로 보인다.

ㅡ따라서 일반적인 존재들이라면 만물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 존재는 만물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갖는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ㅡ즉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할 줄 아는 영혼을 말하는 듯하다.

 

의욕과 욕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속으로 빠져들기 원하는 영혼, 소유하는 영혼은 뭘 말하나?

ㅡ올바른 이해를 원하면서도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영혼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이 존재는 그런 능력을 소유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만, 넓은 원 속에서 자신을 따라잡는 영혼은 뭘 말하나?

ㅡ기본적으로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는 존재는 자기 자신에 내재한 사회적 상식이나 규율을 벗어나려고 한다.

ㅡ이런 존재는 그렇게 사회적 자아를 벗어나면서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만물이 그 속에서 흐름과 역류, 밀물과 썰물을 갖는 영혼은 뭘 말하나?

ㅡ만물이 고정된 가치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파악되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따라서 좀 더 면밀하게 가치나 사실을 파악하는 영혼이란 의미를 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추락하고 있는 것을 밀어야 한다고 말하나?

ㅡ추락하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의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치유불가인 자들에게 의사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되는 법,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대들은 사라져야 한다!

ㅡ이런 존재는 빨리 이 세상에서 살아지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돌덩이를 심연으로 굴릴 때의 쾌감은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돌덩이는 현생을 부정하는 자들, 치유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ㅡ이런 존재들은 그야말로 “지나쳐야” 하는 존재들이다.

ㅡ그리고 심연으로 굴린다는 것은 “그들을 지나쳐 버린다”는 의미로 보인다.

ㅡ따라서 현생을 부정하는 자들을 포기해 버릴 때의 쾌감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이 쾌감은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쾌감일 수 있는데, 현생을 부정하는 자들을 일일이 계몽시키는 것은 꽤나 수고로운 일이고, 그들은 다시금 삶을 부정하는 태도로 돌아설 수 있기에, 너무나 반복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ㅡ그래서 여기서 나타나는 쾌감은 해방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더 나은 연주자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라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미래 이상 사회의 존재들이 등장할 것을 알리면서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한다.

ㅡ그런 점에서 더 나은 존재들의 등장을 알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선례를 따라 행하라고 하나?

ㅡ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때, 현생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에너지를 쏟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자에게는 추락하는 법을 가르치라는 건 뭘 말하나?

ㅡ부조리를 벗어나고 현생을 긍정할 수 없는 자들은 빨리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