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1장 의역 (완) (중력,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7. 19. 00:05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1장 중력


         
11장 개괄

 

11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 대해서 설명한다.

1절에서는 자신이 교양 없다고 평가받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평가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거친 언행과 교리와 다른 주장들, 교리 너머로까지 탐구하려는 모습 등이 차라투스트라가 교양 없는 존재로서 인식되게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신의 모습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중력을 이겨낸 새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묘사한다.

 

2절에서는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조언을 한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 이때 건강한 자기사랑을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그래야 고독이 찾아와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된다.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사랑을 위해선 섬세함과 노회함, 훌륭함, 인내를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데, 각각의 것들은 쉽게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작용으로 인하여,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 어렵다고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러면서 순응하는 모습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모습이 더 생기롭다고 말하며,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려는 자들에게 단번에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으므로, 천천히 노력하여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벗어나라고 이야기한다.


 

 

본문

 

 

-1-

저는 교양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거칠게 제 생각을 말하곤 합니다.

그들에게 제가 거칠게 말하는 이유는 제가 거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경각심을 갖기를 바래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게 “교양 없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은 적당히 교육받은 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왜냐면 그들이 배운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제게 “교양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글을 어리석은 사람의 글로 평가합니다.

제가 보기엔 저보단 강단에 앉아서 배운 사람들이 더 어리석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런 강단의 학생들에게 어리석음에 따른 화가 있기를, 그래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의심하고 파헤칩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사고하다가 올바른 이해를 얻는다면, 그 기쁨에 도취되어 버리죠.

그런 면에서 저는 자유롭게 어디든 나아갈 수 있는 정신의 발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받는 사람들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는 여우와 물고기, 토끼들은 모두 교양을 갖기 위해서 노력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교실이나 강단에서 학습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어리석은 존재로 본다.


 

사회적 규율에 순응한 존재, 저는 이들을 보면, 참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규율에 따르는 ‘어린 양’을 공격하는 독수리 같기도 하죠.

 

종종 생각해보건대, 저는 새의 특징을 지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냐면, 자유롭게 사유하면서 사회적 규율에 억압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순수한 것들, 올바른 것들을 좋아합니다.

제 목표를 위해 활동함에 있어서 사회적 동인*을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제 스스로의 만족감과 목표의식 만으로도 움직이는 존재이니까요.

그리하여 저는 사회적 규율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사회적 명예나 부를 말한다.

 

순수한 것들을 좋아하다 보니, 부조리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율은 오염된 것, 타락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저는 이러한 사회적 규율에 적대적입니다.

그에 따라 저는 제가 머물 수 있는 이상적 사회가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지만, 어디에도 없어 헤매기 일쑤였죠.

 

제가 처한 상황들에 대해서 저는 노래로 부를 수도 있고, 부르고 싶기도 합니다.

아무도 제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물론 저처럼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뽐내려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는 뽐내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을 공격하는 독수리

여기서 어린 양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순응하는 존재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존재들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공격한다.


 

-2-

사람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려는 사람은

사람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규율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규율들이 사라진다면, 그 개인은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겠죠.

 

사회적 규율에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올바른 이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만,

그릇된 이해 속에서 머물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있어 삶과 세상은 절망적이고 답답한 곳이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세상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적 규율이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절망한다면, 올바름을 추구한답시고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 대한 절망은 사회로부터의 이탈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면,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은 마음이 병든 자들의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들의 자기 사랑은 그야말로 병적이어서 이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하는 자기 사랑은 건강한 존재가 갖는 자기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다가 고독으로 인하여 흔들리는 상황이 오더라도, 잘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자신을 사랑하다가 고독에 지쳐서 방황하게 된다면,

다시금 사회로 돌아가게 되고, 그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어울려 지내려고 하게 되죠.

 

저는 이러한 모습을 이웃 사랑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주는 고독으로 인해서 자신을 더 사랑하지 않고, 고독을 잊게 해줄 이웃을 사랑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던 존재들, 사회의 부조리를 긍정하는 존재들이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것이라며 속여지며 주창되어 왔던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현재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함으로써, 이상적인 사람이 되고, 이로써 이상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으므로,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기술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기술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면, 섬세해야 하고, 노회*해야 하며, 훌륭해야 하고, 인내심을 갖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섬세한 사람이어야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고 있는지 분간할 수 있으며, 노회한 사람이어야 흔들림이 적고, 훌륭함을 추구하고 인내심을 갖춘 사람이어야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독과 시련 속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경험이 많고 교활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적 규율들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숨겨진 자기 사랑과 관련된 재능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사회적 규율은 자기 사랑과 관련된 능력들을 억압하고 제한하기 때문*인 겁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에 대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자신을 억압하고 제한하다가

최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능력을 긍정하고 자기 사랑을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존재로서만 인식되죠.

*자기를 우선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사회를 우선적으로 여기지 않기에, 사회는 자기 사랑을 막으려고 한다.

**자기를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는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못하고, 그에 따라서 사회에 적응하길 포기하면서 자기 사랑을 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를 나타내고 있다.

 

땅에 머리를 처박은 타조

이들은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자들로, 자유롭게 사고할 능력을 지녔지만, 그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사회적 규율은 선과 악으로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관여합니다.

우리가 사회적 규율에 따름으로써,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승인받게 되죠.

 

부모와 주변 어른들은 아이가 사회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사회적 규율에 따라 살게끔 가르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적 규율이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에 따르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사회적 규율이 버거워지면, 말합니다.

     “그래, 삶이란 것이 본래 이런 것이지!”

 

하지만 자신의 삶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왜냐면, 인간들은 자기 자신만을 따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들도 따르며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타인이 사회적 규율이라는 짐을 싣게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규율을 잘 지키고 그에 따른 고통을 잘 견디는 사람일수록, 사회적 규율을 더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의 삶은 고되고 힘든 삶으로만 여겨지게 됩니다.

*1권 1장의 낙타와 관련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사회적 규율에 짊어지는 낙타만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본성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역겹다고 느껴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겨운 우리의 본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요.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짐도 제대로 지지 못한다는 점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지어야 할 짐은 사회적 규율이 아니라 본성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1권 1장의 낙타는 단순히 규율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본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필요한 것, 저는 고상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고상한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역겨운 본성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고상한 존재로서 자리하기 위해 역겨운 본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말만 고상할 뿐, 실제로는 자신에 대해서 보고싶은 것만 보는 고상한 척하는 존재가 될 테니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보고 역겹다고 회피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기 위해서 고상한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1권 1장의 낙타가 짊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역겨운 모습은 직면하지 않고, 포장하여 숨기려고 하죠.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역겹지만 올바른 것은 감추고, 보고 싶은 것만 취해서 선택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역겨운 것을 직면하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훌륭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섬세한 여인들은 <약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그들은 조금만 살이 찌거나 마른 것에 민감하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섬세한 사람들에게는 역겨운 본성을 인정하는 것과 역겨운 본성을 인정하지 않고 포장하는 것은 큰 차이로 보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겨운 것을 포장하는 것에 큰 문제를 느끼지 않습니다.

 

굴은 역겨운 개인의 본성을 비유하면서도 개인의 성장에 필요한 맛있는 음식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올바른 이해를 갖기 힘들어 하지만, 자기 자신에 있어서는 더더욱 발견하기 어렵워합니다.

왜냐면 사회 속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을 평가받고,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기준을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나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정한다”

그러면서 만인을 두고 선과 악을 정하는 사회적 규율을 비판하여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들을 침묵시킵니다.

 

저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만족해하는 사람, 현재의 부조리한 세계가 최선이라는 사람, 어떤 것에도 만족을 느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최고의 만족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까탈스러운 사람을 존중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좋고 싫음을 분명하게 판단할 줄 아니 말입니다.

 

모든 것을 만족하고 즐긴다는 것,

이것은 뭐든 가리지 않고 먹는 돼지들의 특징입니다.

모든 것에 긍정하는 것,

이것은 애초에 울음소리가 “예.”인 당나귀들의 특징입니다.

 

당나귀와 돼지

차라투스트라는 뭐든 만족하고, 뭐든 수긍하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오히려 까탈스러운 존재들이 최선의 것을 알기에 좋다고 말한다.


 

저는 생기로운 모습의 존재를 좋아합니다.

저는 모든 것에 생기로움을 더하고자 합니다.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자는 생기로움을 상실한 영혼을 드러낼 뿐이죠.

이로써 사람들은 이미 죽어버린 자를 받들거나 허구적인 존재를 추종합니다.

이러한 존재들을 추종하는 것은 생기로움에 적대적입니다.

왜냐면, 죽어버린 자나 허구적 존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현생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현생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생을 사랑하며, 현생에서의 생기로움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제 취향에 너무도 거슬립니다.

 

저는 내세를 바라며 그릇된 이해로 점철된 곳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들과 살 바에는 반사회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살겠습니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면 죽음 이후에 처벌받는다고 사람들이 그러더라도, 이들은 개의치 않고, 행동하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저승이나 사후 세계를 긍정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아첨꾼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니까요.

 

타인에게 받기만 하고 자신에게 뭔가를 준 사람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도 있는데, 제가 가장 싫어합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듭니다.

저는 이러한 자를 기생충이라고 부르죠.

 

제가 보기에,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거나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게끔 지도해야 하는 자들 모두가 불행하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자들과는 함께 지내지 않을 것입니다.

 

또 왕이나 세관원, 상인처럼,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주변을 살피며 어떤 행동을 할지 눈치 보는 사람들도 불행하다고 봅니다.

생기로움

차라투스트라는 현생에서 생동감있게/긍정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물론 저도 상황을 살피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때 제가 상황을 살핀 이유는 저들과 다릅니다.

저는 저와 같은 이들이 나타나는지 살피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또 저는 사회적 규율을 이겨내고, 끝내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자유롭고 싶다면, 한 번에 사회적 규율로 벗어날 수는 없으니, 천천히 사회적 규율을 이겨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규율을 벗어나면서, 저는 사회적 규율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에게 주어진 큰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단번에 어떤 지름길을 통해 진리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도달하는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묻고 배워 보기도 했는데,

그러한 것은 제 취향에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직접 의문을 품고 파헤쳐가면서 시도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이죠.

 

의문을 가지고 답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제가 지금에 이르게 된 저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마냥 좋다고 할 수만도 없고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닌 저의 성장 과정인 겁니다.

 

제게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는 방법, 올바른 이해를 얻는 방법에 대해 묻던 이들에게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제가 성장을 꾀한 방법인데, 여러분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람들마다 저마다 다른 조건에서 성장을 꾀할 것이므로,

<성숙해지는 바로 그 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돛대 위의 작은 불

돛대 위의 작은 불은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평안을 준다.


 생각해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의 입담은 대중의 입담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거칠게 말하기도 하고, 교양을 지닌 자들에게서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앙고라 토끼와 먹물 뿜는 물고기, 펜대를 든 여우는 무얼 말하나?

ㅡ앙고라 토끼의 경우, 교양을 중시하는 자로 보여 진다.

ㅡ먹물 뿜는 물고기나 펜대를 든 여우의 경우,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존재로 보이나, 동물로 비유된다는 점에서 대중적인 지식인들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손은 바보의 손인가?

ㅡ손이나 손가락의 의미는 글을 쓰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의 글이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이 쓴 글로 여겨지는 걸로 보인다.

 

모든 책상과 벽 그리고 바보가 장식하거나 바보가 갈겨 쓸 여백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우선 책상과 벽은 교실을 말한다.

ㅡ또 여기서 언급되는 바보의 경우, 차라투스트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ㅡ왜냐면 현재 언급되는 바보는 차라투스트라가 ‘화를 입어라’라고 말하는 대상이기에, 차라투스트라와 분리되야 하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비판하는 교실 속의 존재로 볼 수 있고, 교조주의에 따라 배우는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ㅡ바보가 장식하거나 바보가 쓸 여백을 가진다는 것은 이 교실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교조주의에 따라서 자신의 정신을 장식하거나 교조주의에 따라 답습하려는 학생을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발은 말의 발인가? 온갖 역경을 헤치며 달가닥거리며 달린다는 건 뭘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빠르게 질주할 때 즐겁다고 하나?

ㅡ우선 역경과 관련하여, 해당 구절은 의역이 된 것으로 보인다.

ㅡ아래 구절에서 역경이 나타나야 하는데, 실질적인 표현은 나무와 돌이기 때문이다.

     damit trapple und trabe ich über Stock und Stein,

     그것으로 나는 나무와 돌을 넘으며 발을 구르며 달린다,

ㅡ이에 따라서, 역경은 ‘나무와 돌’로 보고 내용을 보아야 할 듯하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나무와 돌을 거침없이 달리는데, 이는 노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는 사회에서 다니라고 내놓은 길이 아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이에 따라서 보면, 어떤 곳이든 차라투스트라는 다닌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러한 차라투스트라의 활동을 사유 활동으로 본다면, 차라투스트라의 사유는 제한없이 자유롭게 이뤄진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자유로운 사색을 하고, 그러다 사색이 깨달음을 주듯이 뻗어 나가면, 즐겁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위장은 독수리의 위장인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양고기를 좋아하나?

ㅡ여기서 양고기는 Lammfleisch의 번역어인데, 어린 양의 고기를 말한다.

ㅡ여기서 어린 양은 순응하는 존재를 말한다.

ㅡ그런 점에서 독수리는 순응하는 존재의 고기를 좋아한다는 걸로 볼 수 있다.

 

ㅡ독수리가 양고기를 좋아한다면, 양을 잡아서 고기를 획득할 것이므로, 순응하는 존재들을 공격하는 것을 즐긴다고 볼 수 있다.

 

때 묻지 않은 것을 먹고, 조금만 먹고도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먼저 때 묻지 않은 것을 먹는다는 건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하거나 그릇된 것을 바라지 않으며, 순수하고 올바른 것을 바란다는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다.

ㅡ또 조금만 먹고 날아간다는 것은 많은 섭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며, 활동을 하기 위한 소비가 적다는 이야기다.

ㅡ즉 활동함에 있어서 동력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말하는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ㅡ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는 어떤 다른 동인없이 제 스스로의 동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데, 조금만 먹고 나아간다는 점이 유사하다고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중력의 정신과 적대적인가?

ㅡ중력은 사람들을 지면으로 잡아 끄는 힘을 말한다.

ㅡ이를 통해서 짓눌리게 되는데, 이러한 양상은 사회적 규율의 양상과 비슷하다고 보여 진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새와 비슷하다고 보고, 자신은 중력과 대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와 중력의 정신은 조상 대대로의 원수인가?

ㅡ이 구절을 통해서 사회적 규율에 해당되는 중력에 대해서 대항하던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 외에도 있었을 것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적의는 이미 날아보지 않은 곳이 없고, 날다 헤매 보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는데,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적의를 가지고서 사회를 떠나고, 그러면서 자신이 머물 곳을 찾게 된다.

ㅡ하지만 자신이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헤매는데, 이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2권 14장」.

     그 어디에서도 나는 고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도시에서도 정주하지 못했고, 어떤 성문에서든 또다시 출발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그것에 관해서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다고 했나? 왜 혼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자신의 속내에 대해서 어디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디서든 혼자서라도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유형의 가인은 누구를 말하나? 왜 그들은 청중이 가득해야 목이 풀리고 손이 수다스러워지나?

ㅡ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인기를 끌려고 노래하는 자들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들처럼 인기를 끌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내를 진정성있게 말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자는 왜 경계석을 옮기나? 왜 대지는 가벼운 것이라는 세례명을 받나?

ㅡ경계석이란 경계를 나타내는 돌을 말하는데, 이는 사회적 규율이 제한하는 한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사람들에게 나는 법을 알려준다는 것은 중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고, 중력은 사회적 규율이므로, 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을 말한다.

ㅡ따라서 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사회적 규율의 한계를 무너뜨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ㅡ이때 대지, 즉 개인은 억압하던 것이 사라진 존재, 가벼워진 존재가 된다.

 

타조가 말보다 빠르다는 건 왜 나오나? 왜 타조는 머리를 무거운 대지 속에 처박고 있나?

ㅡ타조가 머리를 대지에 처박은 것은 사회적 규율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ㅡ말이 언급되는 이유는 앞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발을 말의 발이라고 했던 것과 연관되는 듯하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말의 발을 가지고서 질주하는 즐거움, 자유로이 사색하는 재미를 느꼈는데, 사람들 사이에는 자신보다 더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 대지와 삶이 무거운 것이 중력의 정신이 바라는 것인가?

ㅡ이 부분은 오류인 듯하다.

ㅡ대지와 삶이 무겁다는 것은 삶이 고되고 힘들다, 절망스럽다는 것인데, 사회적 규율이 애초에 이를 목적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ㅡ사회적 규율이 사람들을 부조리 속에 두기는 하지만, 이는 사회적 규율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규율을 악용하거나 올바른 것을 거부하는 세태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가벼워지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가?

ㅡ가벼워진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ㅡ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의 기준을 사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ㅡ만약 여기서 삶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 놓으면, 사회적 규율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문제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좋지 못하고, 그와 더불어서 많은 걸 포기하게 만든다면, 자기 자신을 삶의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는 것이다.

ㅡ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사랑해야 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맹목적인 자기 사랑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자기 사랑은 건강한 자기 사랑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서술한 것처럼, 병든 자나 찌들어 있는 자의 자기 사랑은 해선 안 된다고 한다.

ㅡ즉 자기만을 고려하여 남에게 피해를 일부러 주는 등의 편협한 자기 사랑은 긍정핮 ㅣ않는 것이다.

 

왜 자기 자신으로 버티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헤매게 되나? 왜 헤메는 건 이웃사랑이 되게 되나?

ㅡ자기 자신을 삶의 기준으로 놓게 되면, 사회를 삶의 기준으로 놓는 사람들과 부딪히게 된다.

ㅡ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고독이 찾아온다.

ㅡ그렇게 찾아온 고독은 꽤나 힘들어서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 않다면, 고독에 의해 사람들을 찾아 가게 된다.

ㅡ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삶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서 사람들로 바뀌게 되고, 그러면 이웃을 우선시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된다.

 

왜 이웃사랑은 가장 고약한 기만과 위선으로 행해졌나? 세상에 짐이 되었던 자들은 누구인가?

ㅡ우선 세상에 짐이 되었던 자들은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데 걸리적 거렸던 존재들을 말하고, 이들은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를 설파하는 자들을 말한다.

ㅡ이때 설파되던 것 중에 하나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야기인데, 그러면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것이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것인 양 말하게 된다.

ㅡ이를 기만과 위선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건 왜 오늘 내일만을 위한 계명이 아닌가?

ㅡ오늘 내일만 위한 것의 경우, 당장의 현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건 미래/이상 사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쓴 구절 같다.

 

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온갖 기에 중에서도 섬세하고, 책략적이고, 큰 인내를 요하는 궁극의 기예인가?

ㅡ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의 조건을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ㅡ섬세함은 후술되는 까다로움으로 이해될 수 있다.

ㅡ섬세해야 자신에게 맞는 것을 알고 분별하여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책략적이라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자신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것 같다.

ㅡ자기 사랑을 하다 보면, 사회를 중시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갈등 속에 놓일 수 있는데, 이때 노련하게 상황을 해결하고 자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ㅡ큰 인내를 요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생기는 고독을 견뎌야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이러한 요건들이 있어야 자기 사랑이 덧없게 끝나지 않을 수 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두고서 가장 훌륭한 기예/궁극의 기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왜 소유자에게 자신의 것들이 잘 숨겨져 있다고 하나? 왜 자신의 것이 가장 늦게 발굴되며, 중력의 정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나?

ㅡ앞서 말한 섬세함, 책략적임, 인내 등의 자기 사랑을 위한 것들이 숨겨진다는 것을 말한다.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사회화를 하면서 자기 사랑을 위한 능력 개발을 막기 때문이다.

ㅡ또한 자기 사랑을 위한 능력을 사회부적응으로 보면서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란 걸 인지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왜 오직 자신만이 짊어지기 힘든 짐인가?

ㅡ이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의 삶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은 인간 뿐이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ㅡ후술되는 부분으로 보면, 자신의 행복과 무관한 사회적 규율을 많이 따르며 살다 보니 삶이 고단해지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사회적 규율에 의해서 고통받는 존재가 인간 뿐이란 이야기다.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서 한껏 짐을 싣게 놔둔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낙타는 「차라투스트라, 1권 1장」 낙타와 같나?

ㅡ이 구절의 낙타는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의 낙타와 다르다.

ㅡ1권 1장의 낙타와 이 장의 낙타가 다른 이유는 낙타의 등에 올리는 짐이 다르기 때문이다.

ㅡ1권 1장의 낙타가 지는 것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면 좋다;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

     162.

     인간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

     우리의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에서 떠나는 것.

     진리를 위해서 외경심에 저항하는 것.

     병들었을 때 위로해주려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

     차갑고 더러운 물 속에 들어가는 것.

     비둘기와 우정을 맺는 것.

     유령이 우리를 겁 주려고 할 때, 유령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했고 그걸 떠맡고 있다”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리고 작은 것을 얻기 위해 나는 오늘 이 모든 것을 주어버릴 것이다

     —아이의 미소를 얻기 위해.

ㅡ위 구절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서술하는 것을 보면, 모두 사회적 규율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려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미소를 위해서 해당의 것들을 주어버린다는 것은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고 차라투스트라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ㅡ반면 현재 장의 낙타는 자신의 행복과 무관한 것들을 너무 짊어지는데, 이때 나타나는게 사회적 규율이다.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해도 짊어지기 어려운 것은 무얼 말하나? 인간 내면에 담긴 것은 것 굴 같나?

ㅡ인간이 짊어지기 힘들어 하는 것은 역겨운 자신의 본모습이다.

ㅡ이러한 것들은 인정하기에는 내키지 않기에 대체로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모양을 보인다.

ㅡ이러한 것을 미끄러워 잘 잡기 어려워하고 역겨워 보이는 모습의 굴로 비유하는 것이다.

 

고상하게 치장한 고상한 껍질은 왜 언급되나?

ㅡ개인이 자신의 역겨운 본성을 인정하기 힘들어 하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지 못하게 된다.

ㅡ왜냐면 자신을 자꾸 왜곡하게 되면서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직면하고도 인정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추가적인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ㅡ그리고 그러한 추가적인 장치가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모습인데, 여기서는 고상함이 언급된다.

ㅡ즉 고상함을 추구하는 자라면, 자신의 본모습이 역겹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고상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왜곡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ㅡ또 만약 실리를 추구하는 자라면, 자신의 본모습이 역겨운 경우, 그것이 자신의 실리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왜곡하거나 숨길 것이다.

ㅡ이러한 점에 따라서, 개인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내키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도 인정하냐 못하냐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본성이라는 굴에 고상함이라는 껍데기를 갖추면 본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결국 역겨운 걸 받아들여도 고상해지는 독특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인간의 많은 면은 왜 왜곡되고, 왜 그것이 볼품없고 빈약한 껍질의 문제인가? 왜 숨겨져 있는 그 많은 선의와 힘은 드러난 적이 없나?

ㅡ앞서 살핀 것처럼, 역겨운 자기 모습을 수용해도 이롭지 못하다면, 사람들은 역겨운 자기 모습을 숨기거나 왜곡한다.

ㅡ이때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리를 추구하거나, 사회적 평판 등을 추구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실리 추구나 사회적 평판을 중시하는 걸 볼품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또, 이렇게 왜곡하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자 성숙하게 하는 것, 즉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가장 맛있는 것이 맛을 음미할 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나?

ㅡ역겨운 자기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은 곧 내면의 성장을 일으킨다.

ㅡ그런 점에서 내적 성장을 바라는 자에게 자기 모습을 인정하는 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아진다.

ㅡ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역겨운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맛있는 것을 음미하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섬세한 여인들의 약간 더 살찜과 약간 더 마름이 언급되나? 왜 약간이라는 것에 많은 숙명이 담겨 있나?

ㅡ사람들은 자신의 역겨운 본모습을 대충 왜곡하거나 덮어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한다.

ㅡ하지만 고상한 사람들,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본모습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고상함을 드러낸다.

ㅡ이 두 행동은 결국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면밀히 살피면 차이를 지닌다.

ㅡ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이렇든 저렇든 자신이 잘 포장되면 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ㅡ하지만 이 두 사람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약간의 차이는 그들이 사는 운명과 관련하여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ㅡ이를 섬세한 여인들이 약간의 차이에 대해서 민감하듯, 섬세한 자들이 이러한 포장과 고상함의 차이를 잘 인식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왜 발견해내기 어려운 존재이고,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내는 건 가장 어렵나?

ㅡ인간은 보통 상황을 인식할 때,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기에, 올바른 발견을 하기 어렵다고 한다.

ㅡ여기에 더해서 자기 자신은 사회적 평가와 자기중심적 해석이 더해지고, 게다가 자기의 바람이 더해지다 보니, 더 객관적으로 자기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이것이 나의 선이과 악”이라고 말하나?”

ㅡ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삶의 기준이 사회에서 자신으로 바뀐다.

ㅡ그렇게 되면, 자기 중심으로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구성된다.

 

두더지와 난쟁이는 누구를 말하나?

ㅡ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존재를 말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매사에 만족하는 자를 좋아하지 않나?

ㅡ매사에 만족하는 자는 최선의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극도로 반항적이고 까탈스러운 혀와 위장을 좋아하나?

ㅡ이 사람은 사회적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입장을 개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이-아’하는 것은 왜 나귀와 나귀의 정신을 가진 자만이 배운다고 하나?

ㅡ나귀가 ’이-아’하고 소리를 내는데, 이는 “예”하고 대답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ㅡ이에 따르면, 나귀는 늘 “예, 예”하고 수긍하는 예스맨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예스맨은 뭐든 긍정하기에,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한 존재도 짐승과 같다고 비하하고 있다.

 

심원한 노랑과 뜨거운 빨강은 무얼 말하나?

ㅡ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생기 있는 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노랑은 피부이고, 빨강은 혈색이 도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색에 피를 섞나?

ㅡ피가 생명이라고 하고, 모든 색이 모든 만물을 말한다고 한다면, 모든 만물에 생기를 섞는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렇게 본다면, “세상을 생기로운 것으로 만든다, 삶을 긍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ㅡ이는 현생을 긍정하라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장과 관련될 수 있는데, 명확하지는 않다.

 

자기 집에 회칠하는 자는 누구이고, 왜 회칠하는 영혼을 드러내나?

ㅡ회칠한다는 것은 석회를 바른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는 하얗게 칠한다는 것이다.

ㅡ이는 창백해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상태는 현생을 부정하는 자들의 상태로 보는 것 같다.

ㅡ따라서 회칠하는 영혼은 현생을 부정하는 상태의 인물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왜 어떤 자는 미라에, 어떤 자는 유령에 빠지나?

ㅡ이는 앞서 회칠하는 자가 보이는 양상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죽은 자를 추종하거나, 저승을 긍정하는 모습을 말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가 피를 사랑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피는 생기로움을 말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인간들이 침을 뱉고 토하는 곳에서 살기 싫다고 하는데, 이곳은 어디인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도둑들과 위증자들 틈에서 살려고 하나? 왜 이들 중 누구도 입에 금덩이를 물고 있지 않다고 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모든 인간은 종교적 인물로 보인다.

ㅡ왜냐면, 도둑과 위증자는 이미 천국으로 갈 수 없고, 그에 따라서 규율에 따라 살지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 입장에서는 종교인들과 지내는 것보다 종교적 규율을 어기면서 사는 사람이 더 자신에게 맞다고 보는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6장」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다.

 

ㅡ입에 금덩이를 무는 것은 사후세계를 긍정하는 존재들이 장레식에서 저승에 갈 여비로 금덩이를 주는 것이다.

ㅡ이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저승을 긍정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랑은 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먹고 살기 바라는 사람을 기생충이라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앎을 나누어 주었지만,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았다.

ㅡ그러면서 실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존재들을 기생충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늘 기다려야 하는 자들은 왜 가련하다고 보나? 왜 세무관, 소상인, 왕, 땅을 지키고 가게나 지키는 자들을 기다려야 하는 자들로 보나?

ㅡ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존재들로 보인다.

ㅡ즉 능동적이지 못한 존재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자기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가 없어서, 이런 사람들을 가련하다고 보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기다리는 법을 배웠나? 왜 자신을 기다리는 법을 배운 것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나 자신은 아마도 차라투스트라 자신과 비슷한 존재, 동료를 말하는 것 같다.

ㅡ아니면 미래적 존재인데, 차라투스트라와 유사한 후학을 말하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깨우침의 높은 돛대에 올라 있는 것을 지복으로 여겼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높은 돛대에 올라서, 자신과 비슷한 표류하는 존재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했다.

ㅡ이것을 행복으로 여겼던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하나의 사다리만 타고 진리에 도달한 게 아니라고 하나?

ㅡ누군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차라투스트라는 고단한 과정이 있다고 언질해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가 길에 대해 물었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성숙한 자로 거듭나기 위한 길과 방법을 누군가에게 물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묻는다고 해서 방법이 찾아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

ㅡ스스로 시도하고 노력하는 게 더 좋다고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길은 어디에 있냐”라고 묻는 것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개인마다 성장을 꾀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봤다.

ㅡ왜냐면, 유년기라던가, 여러가지 조건이 서로 다르기에, 서로 접근할 수 있는 용이한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기는 하지만, 각자의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여겨, 반문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