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8장 배신자
8장 개괄
8장은 이상을 추구하다가 변절한 자들에 대한 비판과 그렇게 변절한 자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말미에는 신에 대한 입장을 나타낸다.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강한 의지를 지니는 니체 자신에게도 힘든 일이었기에, 이상을 추구하다가 변절하는 자들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절을 목격하게 되면 실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에 니체는 이에 대해서 비겁자라며 비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더라도 마음을 주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그렇게 변절하여 보여주는 모습은 그냥 일반적인 대중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종교와 사회의 부조리를 알면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들의 선택은 그렇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그래도 좀 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는 늘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이기는 하다.
신에 대해서도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장에서 니체는 유일신을 부정하고 다수신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글들을 통해서 니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들을 했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특정 조건의 신을 부정한다는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다.
본문
-1-
아, 얼마전까지 이상 사회를 긍정하던 자들이
이제는 이상을 부정하고 부조리를 긍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며 저는 희망을 얻곤 했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이 자신을 이어줄 후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상을 긍정하던 자들이 세속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이상을 추구하는 길에서 지쳤고, 안락을 추구하다가 미천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다시 경건해졌습니다!”
저는 저들이 아침마다 기대에 차서, 이상에 대한 의지를 다잡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제 저들은 지쳤고, 이상을 꿈꾸던 자신들의 씩씩함을 무지함과 무모함의 결과물이라고 비판하고 있네요.
저들은 한때 이상을 추구하고 행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들에게 제 앎을 나눠주면, 저들은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했었죠.
하지만 이제 저들은 종교로, 사회로,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 속으로 다시금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들은 사람들에게 부조리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비판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에게 고독이 찾아오자, 저들은 음울해졌으며,
그래서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려고 종교와 사회로 다시 돌아갑니다.
고독에 제가 절망하는 것을 보고, 저들 역시 낙담한 것일까요?
제가 좌절하면서 제가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자, 저를 기다리다 지친 것일까요?
아, 지속적인 용기와 고양감을 지니는 것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이런 자들만이 이상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참을성 있게 지닐 수 있죠.
이 외에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은 다 겁쟁이입니다.
황폐해지는 초원
이상 사회를 추구하던 자들이 변절하는 것을 푸르던 초원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저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에게는 제가 경험한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과거의 사람들의 책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접할 것이고,
주변에서 자신의 생각을 비난하고 질책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더 나아가면,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만나게 될 텐데,
이 추종자들은 분명 우리를 좋아해주는 존재지만, 어리석기도 하고 미성숙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에게 기대거나 마음을 주어선 안 됩니다.
이들은 우리의 기대에 충분히 응할 수 없는 자들,
우리의 이야기에 흥미만 지닐 뿐, 실제로 노력할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노력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면, 분명 우리의 노력에 부응해서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은 한계를 지닌 존재들일 뿐이죠.
이상을 추구하는데 한계를 지닌 존재가 실제로 한계를 갖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러니 저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실망할 일이 아닙니다.
한계를 지닌 자들에게 그 한계를 뛰어넘길 바란 우리가 잘못인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자들에게 기대하지 말고, 그들에게 마음을 주어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더 빨리 우리를 스쳐가게끔 해야 합니다.
떨어지는 나뭇잎
시들어 떨어지는 나뭇잎에게 왜 시드냐고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2-
이상을 추구하다가 변절한 자들 중에는 “다시 경건해졌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변절을 공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그나마 용기있는 사람들이고, 비겁한 자들은 자신이 변절했다는 사실도 숨기려고 하죠.
저는 이러한 자들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시 종교에 의존하는 자들이 되었군요.”
다시 종교나 사회적 규율에 귀의하는 것은 치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치욕은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올바른 이해를 갖추려고 노력했던 자들에게는 치욕입니다.
종교적/사회적 규율이 그릇된 걸 알면서도 이 그릇된 걸 따른다는 이야기니까요.
어떻게 사람이 더 나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릇된 것을 향해 나아간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는 '안락함'과 '고독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고독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종교와 사회로 다시 나아간 것이죠.
이로써, 변절자들은 올바른 이해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됩니다.
전에는 올바른 이해가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면, 이제는 그들의 삶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입장이 될 테니까요.
그러므로 이들은 앞으로 그릇된 이해 속에서, 막연한 이해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들의 선택은 어쩌면 적절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현재는 그릇된 이해와 부조리가 지배하는 시대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당장 축제를 벌이고 있지만, 축하할 게 없는 축제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축하할 만한 축제는 오직 올바른 이해를 나누고 계승하는 과정 속에만 있으니까요.
저는 저들의 축제를 느낍니다.
이제 저들은 규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찾아내어 공격할 것입니다.
규율을 따르는 자들을 단합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규율에 대한 입장을 살피며 규율을 벗어난 자를 색출해 나가겠죠.
저들은 자신을 올바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릇된 이해에 따르는 자들일 뿐입니다.
이들은 그릇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데 뭉쳐 있고, 그렇게 그릇된 이해를 긍정하면서 올바른 것을 이해한 것마냥 행동하는 것입니다.
십자무늬의 거미
차라투스트라는 종교지도자들을 십자무늬의 거미로 보고,
교리를 통해서 사람들을 옥죈다고 보았다.
이들은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서, 종교와 사회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종교와 사회가 주는 안락함은 엄청나게 달콤한 과자와 같아서, 이들의 정신을 상하게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종교의 교리로 사람들을 붙들고는 그들을 착취합니다.
이들은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죠.
이들은 그릇된 이해 속에서 올바른 이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이미 그릇된 이해를 전제하므로, 올바른 이해를 구할 수 없지만,
그들은 궤변을 만들어내어선 이 궤변을 올바른 이해라고 말합니다.
저는 저들이 이미 그릇된 이해 속에서 앎을 찾고 있으므로, 거의 망상적인 이해를 가진다고 봅니다.
현상을 이해하는데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죠.
이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법을 배우고 터득해서, 부조리 속에서도 고양될 수 있는 자들에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들은 지혜를 찬양하는 것에 질렸기 때문이죠.
이들은 저승을 긍정하는 사람에게 저승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이성은 제 기능을 하기 힘들어집니다.
이들은 염세주의자를 만나 그들과 함께 세상을 두고 절망하기도 하죠.
종교/사회로 나아간 자들 중에는 말로만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와 사회를 지킨다면서 반규율적인 행동들을 일삼기도 하죠.
그러면서 이들은 신에 대한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신은 자녀인 인간을 충분히 살피지 않는다.
오히려 자녀를 대함에 있어서 인간들이 자기 자녀를 더 잘 살핀다.”
“신은 노쇠한 존재다.
신은 인간을 전혀 보살피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자녀가 맞기는 하나?
신이 이를 증명해주지 않는다면, 이와 관련해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증명? 신은 뭔가를 증명한 적이 없다.
신은 자신이 어떤 증명을 하지 않아도 믿기를 바란다.”
“맞다, 맹목적인 믿음이 그를 행복하게 한다.
이는 노쇠한 자들의 방식이다.
노인들도 그러지 않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우울해하곤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 웃깁니다.
하지만 마냥 웃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수준에 실망하여 답답함 속에 빠지기도 하니까요.
아마도 저는 평생 신에 대한 의심을 하는 저 모습들을 보며 답답해하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에 대한 의심은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까?
물론 종교를 가진 이들이야 신에 대한 의심을 묻어두고서 맹목적으로 믿고 있지만,
왜 저들은 신에 대한 의심에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저러고 있는 것일까요?
“단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
나 이외의 신은 섬기지 마라.”
이는 한 종교에서 나온 이야기로, 이는 신에 대한 참 우스운 소리입니다.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니 말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여러 신들이라기 보다는 신적인 자들, 위버멘쉬적 존재들을 말한다.
“다채로운 암소”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도시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은 이틀 정도의 거리였다.
아직 멀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에 가까워짐에 따라 기뻐했다.
야경꾼들
이들은 신에 대해서 의심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초원에 있던 푸르고 다채롭던 것들은 무엇인가? 왜 말라 비틀어져 잿빛이 되었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여기서 희망을 모아 날랐나?
ㅡ초원에 있던 푸르고 다채롭던 것들은 차라투스트라처럼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로 보인다.
ㅡ이런 존재들이 색을 잃은 것이므로, 이는 곧 이상을 추구하지 않게 됨을 말한다.
ㅡ이는 이 장에서 논하는 대상과 일치하므로, 적절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ㅡ이 존재들이 이상을 추구하려는 존재들이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같은 길로 나아가려는 이 사람들을 통해 희망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왜 젊은 심장은 지치고 천해지고 안일해졌나?
ㅡ후술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절망과 방황으로 인해서, 또는 이상을 추구하면서 얻는 고독감에 의해서 지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ㅡ이로 인하여 이상을 추구할지 아니면 다시 사람들에게로 나아갈지 고민하다가 변절한 것같다.
왜 저들은 이른 아침에 씩씩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나?
ㅡ아침은 하루에 대한 기대를 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하루를 보내면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ㅡ이것이 누적되면 지치는 것이다.
왜 저들은 아침의 씩씩함마저 헐뜯나?
ㅡ이상을 추구하다가 지친 이들은 이상 추구가 덧없다고 느끼게 된다.
ㅡ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왜 저들은 춤추는 자들처럼 발을 들어올리기도 햇나?
ㅡ춤추는 자란 디오니소스적 인물을 나타낸다.
ㅡ디오니소스적 인물은 자신의 생각이나 이상을 행동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를 말한다.
ㅡ그런 면에서 이상을 추구하면서 그에 따라서 이상적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던 자를 의미한다
.
왜 저들은 한때 모기나 젊은 시인처럼 빛 주변에서 파닥거렸다고 하나?
ㅡ이들은 이상을 추구하던 자들이다.
ㅡ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은 부조리에 대해서 비판적인데, 부조리 속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귀찮은 존재로 여길 것이다.
ㅡ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등에로 설명하며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고 했는데, 이 등에를 모기로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ㅡ젊은 시인들의 경우, 이상적인 것 올바른 것을 담으려는 경향이 있다.
ㅡ이에 따라서 이상을 추구하던 자들을 설명하고 있다.
ㅡ빛이라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
ㅡ이에 따르면, 이상을 추구하던 자들은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주변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저들은 어두운 자, 음모를 꾸미는 자, 난롯가 옆에 쪼그리고 있는 자가 되나?
ㅡ이것들은 이상을 추구하다가 좌절하면서 나타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ㅡ즉 좌절에 따라 의기소침해지고, 고독을 겪어서 고독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습을 말한다.
ㅡ난롯가 옆에 쪼그린다는 것은 따뜻함을 찾는다는 것인데, 이는 냉혹함 속에 있다는 것이고, 냉혹함은 곧 고독을 말한다.
고독이 차라투스트라를 삼킨 게 왜 저들에게 낙담으로 이어지나?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 왜 저들에게 헛된 일이 되나?
ㅡ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는데,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절망하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길에서 방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ㅡ즉 홀로 나아가기는 힘든 길이었기에, 차라투스트라의 방황이 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송장과 포센라이서는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 서문 6장」에서 나오는 곡예사와 포센라이서를 말한다.
ㅡ곡예사는 과거에 존재했던 이상을 추구했던 자를 말하고, 포센라이서는 이런 이상 추구자를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처럼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과거 사람의 책에서 공감을 얻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판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왜 차라투스트라가 두번째로 만나는 길동무는 어리석으면서 미숙하게 숭배하는 무리인가?
ㅡ이 추종자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실망하게 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흥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그 말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는 자들인 것이다.
왜 봄기운과 알록달록한 초원을 믿지 말라고 하나?
ㅡ앞서 추종자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희망적인 기대를 하게 하는데, 이를 봄기운과 알록달록한 초원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따라서 이런 희망을 주는 자들을 너무 믿지 말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저들이 달리 할 수 있었다면, 저들도 달리 원했을 것이란 말은 뭘 말하나? 나뭇잎 이야기는 뭘 말하나?
ㅡ추종자들이 애초에 차라투스트라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인 것, 그러지 못할 존재들이므로 못한다는 이야기다.
ㅡ나뭇잎은 시들기 마련이고, 저들은 이상을 추구하지 못하기 마련이므로, 저들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행위라고 말하며, 마음을 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차라리 저들이 빨리 곁에서 사라지게끔 행동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도를 다시 드리는 것은 왜 치욕인가?
ㅡ종교적 교리나 사회적 규율에 따른다는 것은 부조리한 것을 따른다는 이야기다.
ㅡ그런데 애초에 이것들이 부조리하고 그릇되다고 여겨서 벗어났는데, 다시 돌아가고 있으므로, 그릇된 걸 알면서 돌아가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ㅡ인간은 대체로 자기가 생각하기에 최선과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그릇되고 좋지 못한 것을 선택하므로, 우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그러므로 사회/종교적 규율을 따르는 것은 치욕적인 것이 된다.
왜 편안히 살고 싶어하는 비겁한 악마가 변절자에게 있다고 말하나?
ㅡ이상을 추구하던 자가 변절하게 되는 데에는 고독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정신적 안정을 취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ㅡ이것을 편안히 살고 싶어하는 비겁한 악마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왜 변절자는 빛을 두려워하는 부류에 속하나? 왜 밤과 안개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을 수 밖에 없나?
ㅡ변절자는 이상을 추구하다가 그릇된 이해 속으로 나아간다.
ㅡ빛이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올바른 이해는 변절자들의 삶에 대해서 부정하게 된다.
ㅡ이는 변절자들에게 유쾌한 일이 아니므로, 올바른 이해를 기피하게 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ㅡ그리고 현재의 자신들을 긍정하려면 올바른 이해가 아닌 그릇된 이해를 긍정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기에, 그릇된 이해를 상징하는 밤과 안개로 머리를 밀어 넣는다고 하는 것이다.
왜 변절자는 때를 잘 골랐나? 밤새들이 다시 날아오른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변절자들은 현재 이상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서 곤란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변절했다.
ㅡ즉 부조리와 그릇된 이해를 아직 걷어내기 힘든 시기인데, 이때 변절한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편하게 살기에는 좋은 상태가 된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때를 잘 골랐다고 할 수 있다.
왜 빛을 두려워하는 대중들에게 휴식없는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고 말하나?
ㅡ여기서 휴식 없는 휴식의 시간은 “die Abend- und Feierstunde, wo es nicht – ‘feiert.’”의 번역이다.
ㅡ여기서 Feierstunde는 휴식시간이기도 하지만 축하 시간을 말할 수도 있고, feiert는 축하하다를 말할 수 있다.
ㅡ즉 직역서에서는 휴식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휴식 없는 휴식의 시간’은 축하함이 없는 축제의 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
ㅡ이에 따라서 보도록 하자.
ㅡ빛은 올바른 이해를 말하는데,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현재의 사회는 축제와도 같다.
ㅡ부조리한 자들이 즐비하고, 그로써 혜택을 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축제를 축하할 이가 없다는 것이다.
ㅡ반면 이상 사회의 경우, 이를 위해서 노력하고 계승하는 과정은 늘 축하가 함께한다.
ㅡ그런 면에서 축하가 없는 축하의 시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떤 소리와 냄새가 들리는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저들은 축제를 벌이고 있다.
ㅡ물론 그 축제에는 축하가 없지만 말이다.
ㅡ아무튼 이러한 축제를 벌이면서 희생양을 찾게 될 텐데, 그에 따라서 이 구절은 희생양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위선이 영혼에 가득한 자들을 사냥하는 시간은 무얼 말하나? 왜 변절자들이 이런 자를 사냥하나?
ㅡ위선이 영혼에 가득한 자는 위선자를 말한다.
ㅡ그런데 변절자들이 위선자를 사냥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ㅡ왜냐면 변절자들이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종교의 관점에서 위선자는 비종교인이면서 종교를 비판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종교인들이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자를 사냥하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왜 커튼을 걷어 올리는 이야기가 나오고, 왜 나방들이 있다고 하나?
ㅡ커튼은 종교인들을 살피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위선자를 찾는 종교인들을 살펴보니, 그들은 나방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ㅡ그럼 왜 하필 나방 이야기가 나올까?
ㅡ나방은 나비와 유사한 존재를 말한다.
ㅡ나비는 자유로운 존재, 이상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존재를 말하는데, 결국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를 말한다.
ㅡ그런 점에서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와 비슷한 존재로서 나방을 언급한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회중의 냄새는 무얼 말하나?
ㅡ회중은 많은 사람이 모인 걸 말하는데, 이는 곧 대중/군중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대중이나 군중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부정적인 존재, 즉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한 존재를 나타내는데, 저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특징이 나타났고, 그것을 차라투스트라가 인지했다고 볼 수 있다.
작은 방에서 기도 형제들이 만들어내는 연무는 뭘 말하나?
ㅡ연무는 연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이 모여서 탁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사람들이 모여서 연기를 내뿜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남들이 보기에 뿌옇게 보이므로, 이는 모호한 이해/그릇된 이해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다.
달콤한 과자를 구워대는 경건한 자들 때문에 입과 위가 상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달콤한 과자는 사람들의 고독을 잊게 해주는 것, 소속감으로 보인다.
ㅡ즉 소속감을 주면서 사람들의 정신을 그릇된 이해, 부조리 속에 있게 하는데, 달콤한 과자로 입과 이가 상하듯이, 소속감을 얻으면서 정신이 상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십자거미는 무얼 말하나? 왜 저들은 십자거미를 바라보나?
ㅡ십자거미는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종교지도자가 종교인들에게 교리를 통해 사람들을 구속하게끔 유도하고 설파하는 걸로 보인다.
저들이 늪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건 뭘 말하나? 왜 저들은 늪에 낚싯대를 드리우며 깊이가 있다고 믿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을 피상적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ㅡ저들은 올바른 앎을 얻기 위해서 늪에 낚싯대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ㅡ문제는 저들이 애초에 종교적 교리/그릇된 이해 속에 있기에, 올바른 앎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릇된 이해 속에서 무언가 단상을 얻고,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이해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저들의 모습이 올바른 이해와 무관하기에, 피상적으로 옳지도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들은 왜 하프타는 법을 배워서 젊은 여자들의 심금을 울리려고 하나? 왜 늙은 여자들과 그녀들의 칭찬을 지겨워하나?
ㅡ하프를 통해서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들이 어떤 성향인지 상관없이 타인을 고양시키는 것을 말한다.
ㅡ여기서는 하프가 감성적인 말, 그럴듯한 궤변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리고 젊은 여자의 경우, 좀 더 감성적인 말에 잘 휘둘리는 존재로 묘사되는 듯하며, 이에 따라서 저들은 궤변을 하고 그에 잘 휘둘리는 사람과 함께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늙은 여자의 경우, 지혜나 냉철한 인식을 할 수 있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변절자들의 경우 올바른 이해/지혜를 원치 않으므로, 거기에 질렸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반 미치광이에게서 오싹해지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ㅡ이 미치광이는 유령을 긍정하기에, 저승세계를 긍정하는 자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투덜거리고 불평하면서 피리를 부는 늙은이는 누구인가?
ㅡ이들은 음울한 바람으로부터 비탄을 배웠고, 비탄을 설교하므로, 염세주의자를 나타낸다.
야경꾼은 무얼 말하나?
ㅡ야경꾼은 밤에 깨어있는 자를 말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2장」에서 말하는 야경꾼과 같아 보인다.
ㅡ즉 밤은 사유의 시간으로, 밤에 자야 사유를 하지 않는데, 종교나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사람이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은 종교나 사회적 규율에 대해 사색하거나 반감을 갖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그런데 야경꾼은 밤에 사람들이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경계를 서는 존재들이다.
ㅡ그런 점에서 이들은 사회적 규율을 지키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역시 밤에 잠을 자지 않으므로, 사회적 규율 지킨다고 천명하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ㅡ이러한 면은 뿔피리를 불고 밤에 돌아다닌다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다.
야경꾼들이 오래전에 잠들어버린 낡은 일들을 깨워 일으킨다는데, 뭘 말하나?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야경꾼들 중에는 신에 대한 의심을 갖는 자들이 있다.
ㅡ기본적으로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미 신에 대한 의심 문제는 덮어놓고 사회를 지배해왔기에, 오래전에 언급되었을 지 언정 현재는 언급을 해선 안 되는 주제다.
ㅡ그런 면에서 오래전에 잠든 문제를 야경꾼이 신을 의심하면서 깨운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아버지인데도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고, 인간 아버지들이 더 잘한다는 이야기는 뭘 말하나?
ㅡ여기서 아버지는 신을 말한다.
ㅡ즉 인간의 아버지인 신이 인간을 잘 돌보지 않음을 지적한다.
ㅡ이후 후술되는 그는 모두 신/하느님을 말한다.
신앙은 왜 늙은 자들의 방식이라고 말하나?
ㅡ신은 자신이 증명을 하든 안 하든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따르길 바란다는 점이다.
ㅡ이는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믿고 따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겨서 쓴 표현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스워하다가 횡경막 속으로 가라앉았나?
ㅡ저 야경꾼들은 신에 대해서 의심하는데, 사실 이 의심은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너무나 단순한 문제이며, 오래전에 해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저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ㅡ하지만 저들이 세상에 다수를 차지하므로, 한켠으로 답답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경꾼이 신을 의심하는 소리를 듣고서 질식하게 되면, 왜 그것이 차라투스트라이 죽음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신에 대한 의심처럼 아주 단순한 문제를 고심하는 자들을 보다가 죽을 운명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낡고 잠들어버린, 빛을 기피하는 사항들을 아직도 일깨우려 하냐고 질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사항은 신에 대한 의심으로 보인다.
ㅡ이것은 현재 교회가 득세하는 시점에서는 누구도 쉽게 꺼내지 않는 의심이다.
ㅡ하지만 올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문제이기도 하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양측면에서 이러한 의심을 품고 고민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왜 옛 신들은 오래전에 끝장이 났나?
ㅡ유일신 종교가 나타나면서 다른 종교들이 사라지게 되는데,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신들은 좋고도 즐거운 끝을 맞이하게 되나?
ㅡ유일신 종교에서 신은 유일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신이 유일하다는 말이 우스운 이야기로 취급된다.
ㅡ이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ㅡ다신론을 논하는 것이 더 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구분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도 같지만, 정확하지 않다.
ㅡ어쨌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유일신이고, 다신론은 긍정하는 니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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