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0장 의역 (완) (세 가지 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7. 17. 21:08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0장 세 가지 악


         
10장 개괄

 

10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삶을 다시금 긍정하면서, 현 사회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욕구, 지배욕구, 이기심을 재조명한다.

즉 신체적 욕구와 지배욕구, 이기심이 부정적인 것이자 악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실제로 오용하지 않는 한 악하지 않고, 세상은 이 세 가지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적 욕구의 경우,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들,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신체적 욕구는 이상적 미래를 위한 존재를 낳고 양육하므로, 이상사회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이상을 추구하는 자라면, 이러한 신체적 욕구는 억압할 것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것이 된다.

자녀들을 낳고 이상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끔 노력한다면, 이는 이상 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있어 아주 유익하기 때문이다.

 

지배욕구의 경우도, ‘올바른 이해가 세상을 지배하길 바라는 것’으로서 지배욕구를 본다면, 이는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상적이게 하려는 것이므로, 오히려 추구해야 할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기심의 경우, 이상 사회를 바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미숙하고 그릇된 이해를 가진 존재들을 성숙하게끔 도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타적이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 이를 건강한 이기심으로 취급한다.

 

말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라고 말한다.

이는 니체를 조금이라도 접한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위해서 살라.” 식으로 이해되며, 방종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여 질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방비하려던 것이었는지, 차라투스트라는 비겁한 자기 행복 추구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비겁함에 대해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편협하게 자신만을 위하려고 하거나 안락함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올바름을 위해서 노력하며 얻는 자기 행복을 추구하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으므로,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며 살아라’라는 이해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본문

 

 

-1-

오늘 아침 저는 세상을 긍정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거기서 전 천칭을 들고 있었는데,

한쪽 저울판엔 세상에 대한 의문을 두고, 다른 한쪽 저울판에는 그에 대한 답을 올려두고 있었죠.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답을 얻었던 저는 꽤 고무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제 모습은 아침놀이 질투할 정도로 너무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아침 햇살에 잠에서 깨어버렸으니까요.

 

세상은 시간적 여유가 있고, 이상 사회를 추구하며, 면밀하게 통찰할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에서 저는 부조리한 이 세상이 과연 이상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답을 찾고 있었고,

그에 따라 긍정적인 답을 얻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세상을 긍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아마도 홀로 이상적인 생각만 하는 것보단,

이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어 현실이 되지 못하면, 가치는 잃는 법이니까요.

 

저는 꿈에서 세상을 확실히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의 부조리한 세상 그 자체를 말입니다.

현재의 세상에서 어떤 조건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부조리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은 제게 그야말로 온전한 것,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온갖 보물이 가득한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꿈 속에서 바라본 지구

차라투스트라는 꿈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얻는다.


 

세상의 부조리는 사람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고안한 부조리에 대한 대처도 고작 부조리를 참고 견디는 것뿐이니,

이는 부조리에 대한 완전한 답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절망적인 것으로, 자신들에게 있어 악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여겨지는 이 세상이

오늘 제게 사람들을 위한 좋은 것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오늘 아침 꿈에서 세상이 이처럼 희망적인 것으로 다가왔으니,

얼마나 저는 고무되고 그 꿈이 고마웠겠습니까?

이 꿈은 저의 절망을 치료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꿈의 희망적인 내용에 따라 낮에도 그렇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악하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를 놓고, 과연 정말 그러한지 따져볼까 합니다.

 

사회적 선을 가르친 자는 사회적 악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악하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적 욕구*, 지배 욕구, 이기심입니다.

이 세 가지는 가장 악한 것으로 취급받고, 가장 심하게 비난받았는데, 이 세 가지에 대한 평가는 올바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저는 이 세 가지가 정말 악하고 비난받을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 세 가지 악에 대한 사회적 규율과 인식이 과한지 아니면 적절한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성장을 바라는 당신이 이에 대한 증인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무엇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지.

어떤 이유로 인간은 타인을 가르치는지.

이미 충분히 성숙한 자가 왜 더 성숙한 자로 거듭나서 사람들과 마주하려고 하는지.

 

보십시오.

이 질문들에 대해서 세 가지 악을 저울판에 올리니, 조용히 수평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균형을 이룬 천칭

차라투스트라는 세 질문을 천칭의 한 저울판에 올리고, 세 가지 악을 올리는데, 이로써 천칭의 균형이 맞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세 악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었음을 의미한다.


 

-2-

 

먼저 신체적 욕구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을 중시하는 자들이나, 종교를 따르는 이들에게 성적 욕구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성적 욕구에 의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교리나 규율을 어기게 된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욕구는 목표가 없는 이들이 추구할 만한 가장 손쉬운 쾌락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이들은 성적 욕구를 위해서 살아가며, 삶에서 행복을 누리려고 하는데, 이는 향락적이게 되는 것이므로, 건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적 욕구는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순수한 것이자, 자유로운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행복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성적 욕구로 인해서 미래의 존재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

이 미래의 존재들에게 있어서는 현재의 존재들이 갖는 성적 욕구는 고마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성적 욕구는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자들에게는 만족을 주면서도 독이 되는 요소이겠지만,

이상 사회를 바라고, 올바른 이해를 바라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을 고양시켜주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자들은 애초에 성적 욕구를 위해서 행동하지 않으며, 적절한 순간에 성적 욕구를 통한 만족을 취하려고 하니, 독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후손을 발생시켜 이상적 사회를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성적 욕구는 단순히 성적 욕구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적 욕구로 인하여 결혼하고 그로 인해 자손이 번성하여, 미래로 나아가는데,

이는 곧 이상 사회로 나아감을 의미하니, 우리를 가장 큰 행복과 희망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이상적인 결혼은 두 남녀의 성성적 욕구를 허용하고 약속해주는 것과 더불어

미래의 존재들에게 존재와 이상 사회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적 욕구를 통해서 보장받는 것들은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약속되고 있습니다.

이상을 추구하면서, 결혼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성적 욕구에 대한 제 입장은 향락주의자들의 입장과 다르며, 순결과 절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입장은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성성적 욕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를 주의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체적 욕구와 미래

신체적 욕구가 있음으로 해서, 자녀를 갖고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


 

이번엔 지배 욕구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배 욕구는 단순히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남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이해, 이상적인 사상이 지배되길 바라는 욕구를 나타내기도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지배 욕구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행동하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을 올바르게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배 욕구는 그들 자신을 고문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배 욕구는 허영심을 가지게 합니다.

남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기에, 현재의 자신보다 더 부풀리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대중이나 사회에서 인정하는 것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수준을 인정받고 허세를 부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대중이나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비웃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이해를 향한 지배 욕구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들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모두 부수고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들은 올바른 것만이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들은 사회적/종교적 규율들을 살피며 그것이 올바른지 그른지 살핍니다.

즉 사회적/종교적 규율들의 자기 진술이 그다지 올바르게 보이지 않으면, 의문을 가지고 파헤치는 것이죠.

 

사람들은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허영과 허세를 부리고, 그렇게 미숙한 존재들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스스로를 경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죠.

 

올바른 이해를 향한 지배 욕구를 가진다면, 이 지배 욕구에 의해서 우리는 사회의 부조리를 경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조리한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부조리한 것들을 비판하고 올바른 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성숙한 자들에게도 지배 욕구는 존재합니다.

이때 이 지배 욕구는 올바른 이해, 이상 사회를 위해 갖게 되며, 사회를 자신 앞에서 무릎 꿇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적이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나타납니다.

 

성숙한 자가 올바름이 세상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행동할 때, 누가 과연 이것을 탐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행동 속에는 어떤 병적인 것도 탐욕적인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는 성숙한 자가 자신만을 생각하며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고, 모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성숙한 자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저는 ‘탐욕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사하는 덕’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성숙한 자는 왜 남들에게 올바른 걸 나눠주고 선사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상 사회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올바른 걸 이해해야 자신이 바라는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상 사회를 바라는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란 이야기죠.

 

네, 그런 면에서 성숙한 자가 앎을 선사하는 것은 이기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기심은 <건전하고 건강한 이기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이기심을 복된 것이라고 말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기심은 아름다운 영혼,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승리를 원하는 영혼, 생기가 넘치는 영혼, 주변의 모든 것을 왜곡하지 않고 일치된 모습을 보이는 영혼에게서 솟아오릅니다.

 

지배욕이 강한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이상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

지배욕은 인간을 탐욕스럽게 만든다고 한다.


 

사회나 종교적 규율에 민감히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행복과 관련해서 반응하는 존재.

이상적인 것을 행동할 수 있는 존재

이러한 존재의 모습은 곧 자기 행복에 대한 의식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행동과 의식을 지닌 존재는 자기 행복과 관련된 것이 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행복은 자신을 중심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행복을 방해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경멸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고 추방하죠.

 

그렇다고 해서 자기 행복이 비겁하고 편협한 것을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겁하고 편협하게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악이라고 말하니까요.

 

자기 행복은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불평하거나 걱정만 하는 사람은 경멸스럽게 여깁니다.

불평하면서 적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경멸합니다.

 

또한 자기 행복은 허무주의자를 경멸합니다.

‘모든 것을 헛되다’고 여기는 허무주의는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에게 지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지혜라고 부를 것도 없습니다.

 

자기 행복은 회의적인 것도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증명을 믿지 않고, 맹세나 권위를 제시할 때 믿는 자들도 하찮게 여깁니다.

또 교리나 규율을 맹목적으로 믿으면서 올바른 것을 제시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모두 올바른 것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자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스니다.

 

자기 행복이 더 하찮게 여기는 것은 줏대가 없이 빠르게 순응하며 굴복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여겨지곤 합니다.

 

자기 행복은 안락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행동, 그러면서 부조리를 견디고 인내하는 자들, 그런 자신을 긍정하고 만족하는 자들을 증오하고 혐오합니다.

이런 자들은 노예 같은 모습을 지닌 자들이라면서 말이죠.

 

종교에 대해서든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서든, 자기 행복과 건강한 이기심은 이러한 노예 근성에 대해서 침을 뱉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순종하며 굴종하는 것이다.”

건강한 이기심은 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버린 자들은 규율 속에 속박되어 멍청하게 눈을 뜨고 깜빡입니다.

그들의 심장은 규율에 짓눌려 있어 늘 답답하죠.

그러면서도 규율에 굴종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이기심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모두 악이라고 말합니다.

 

노예들, 연륜이 있는 자들, 삶에 지친 자들은 부조리에 굴종하는 것을 두고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건강한 이기심을 지닌 자는 이를 그릇된 지혜라고 말합니다.

사제들이 말하는 종교적 지혜, 동정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릇된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릇된 지혜를 가진 자들이 건강한 이기심을 지닌 존재를 얼마나 괴롭혔었던지!

그들은 이처럼 건강한 이기심, 자기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을 괴롭히는 것을 덕이라고 했어야만 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지쳐서 이에 순응하는 사람들, 종교적 교리에 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삶이 부정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만족감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들의 그릇됨이 드러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바른 이해가 지배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숨겨졌던 많은 것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두고서 건전하고 신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건강한 이기심을 두고 복되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은 올바른 이해가 지배하는 세상의 예언자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올바른 이해가 지배하는 위대한 정오가 오고 있다. 가까이 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오를 알리는 예언자

위대한 정오는 올바른 이해로 가득한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예언하는 자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 건강한 이기심을 가진 자들이다.

 


생각해볼 거리들

 

아침의 꿈은 무얼 말하나?

ㅡ후술되겠지만, 아침에 차라투스트라가 꾼 꿈은 부조리한 사회를 긍정하는 꿈이다.

     사람들의 사랑을 쫓아버릴 정도의 수수께끼도 아니지만,

     사람들의 지혜를 잠재울 정도의 해답도 아닌,

     사람들이 그토록 악담해댔던 이 세계.

     그것이 오늘 내게는 인간적인 좋은 세계다!

ㅡ이 구절처럼, 부정적인 세계가 긍정적으로 여겨진다.

 

저울로 잰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이에 대해서도 후술되는데, 어떤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이 평형을 이루는지 살피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냥 질문에 대한 긍정적 답이 나오는지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ㅡ만약에 질문에 대한 답이 부족하거나 과하는 등의 오류가 있다면, 저울은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

 

아침놀은 무얼 말하나?

ㅡ아침놀은 그야말로 뜨거운 물체를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세상을 긍정하는 꿈을 꾸면서, 고양되게 되는데, 이에 따른 열정을 아침의 태양이 질투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있는 자, 유능한 계량자, 강한 날개를 가진 자, 호두를 깨는 신적인 자는 뭘 말하고 왜 이들에게 세계는 재보거나 추측할 만 한가?

ㅡ시간이 있는 자는 사색할 시간이 있는 자를 말한다.

ㅡ유능한 계량자는 계측을 잘 하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올바른 사색을 할 줄 아는 자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ㅡ강한 날개를 지닌 자는 이상을 추구하는데, 막연히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의지에 따라 추구하는 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호두를 깨는 신적인 자는 호두부터 이해해야 한다

.ㅡ호두의 경우, 단단한 것인데, 깨야 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서술된다.

ㅡ그리고 앞서 말한 시간이 있거나 유능한 계량작들과 공통된 특징을 지닌 존재이므로,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긍정적 존재로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긍정하는 자로, 단단한 뭔가를 부숴야 하는데, 이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규율이나 부조리라고 생각해봄직하다; 사회적 규율이나 부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여겨지거나 올바른 걸로 여겨져 부수기 어렵기 때문이다.

 

ㅡ이처럼 이상 사회를 추구하거나 바라는 자라면, 세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꿈은, 담대한 항해자이자, 반쯤은 배이고 돌풍이며, 나비나 매와 비슷한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회를 놓고 바다로 이해한다.

ㅡ사람들이 바닷물을 마시면 죽게 되듯이, 사회적 규율이 그렇기에 사회를 바다로 비유하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이러한 바다를 넘어간다는 것은 부조리한 세계를 넘어간다는 것이고, 이는 곧 이상 사회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의 꿈은 이상 사회를 향하는 것이고, 이 부조리한 사회를 넘어서는 것,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배이자, 이 부조리한 사회가 가로막아도 부딪히고 넘어서는 돌풍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또한 나비는 사회적으로 영향을 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고도 보이며, 매는 간절히 바라고 어서 왔으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는 무한한 세계를 비웃나? 왜 깨어있고 웃음짓나?

ㅡ여기서 무한한 세계와 유한한 세계가 나뉘는데, 유한한 세계는 현생을 말한다.

ㅡ그에 따라 무한한 세계는 신적 세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이런 신적인 세계를 긍정하지 않으므로, 비웃는다는 것은 적절하다.

 

ㅡ또 「차라투스트라, 1권 2장」에서 언급되다시피,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것은 의식이 잠에 드는 것과 같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말하기에, 깨어있고 웃음짓는다는 것도 차라투스트라의 생각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가 꿈에게 말을 건넨 것은 무얼 말하나? 왜 지혜는 “힘이 있는 곳에서는 수가 지배한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지혜는 부조리를 세계에서 근절하려고 하는 것이다.

ㅡ이러한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꿈에 작용한다면, 부조리를 근절하는 세계를 목표로 삼게 된다.

ㅡ그러기 위해서는 차라투스트라 혼자서만 이상 사회를 긍정해선 안 된다.

ㅡ즉 사람들이 이상 사회를 긍정해야 하는데, 이는 혼자서는 이상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 깔려 있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는 수가 지배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꿈은 어째서 유한한 세계를 확신하는 것인가? 새로운 것, 옛것도 욕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애원하지도 않는다는 건 뭘 말하나?

ㅡ유한한 세계는 현생을 말하는데, 현생에 대해서 긍정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ㅡ차라투스트라가 현생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새로운 것, 옛것도 욕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생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현생을 긍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뭔가를 바라거나, 예전의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또한 현생을 긍정하기 위해서 추가로 욕망하는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즉 현재의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ㅡ그런데 부조리한 현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 앞으로 변화는 없는 것이 아닐까?

ㅡ이와 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는 현재는 부조리한 상태지만,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라고 보고 있고, 그 과정에서 현재의 모습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온전한 사과는 무엇을 말하나? 시원하고 부드러운 벨벳 껍질을 지닌 황금사과는 의미가 있나?

ㅡ실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고, 정말 단순히 잘 익은 사과를 말하는 것 같다.

ㅡ즉 잘 익은 사과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처럼, 세계가 그렇게 주어져서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왜 세계는 여행에 지친 자가 기대어 쉴 수 있는 늠름한 나무로서 차라투스트라에게 눈짓을 보내나?

ㅡ현재 차라투스트라에게 세계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물상으로 여겨진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세계가 이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으로, 그렇기에 현재의 부조리한 모습도 결국 늠름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고 여겨지게 된다.

 

ㅡ여행에 지친 자가 기대어 쉴 수 있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가 절망할 때, 세계에 대한 현재의 인식이 절망을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세계가 이상 사회로 어련히 나아가고 있다는 점, 이 점에서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는 휴식을 취하게 되는 듯하다.

 

세계는 왜 차라투스트라의 곶 위에 서 있나?

ㅡ바다는 여기서 소금물로 이뤄진 곳으로, 목이 마르다고 하여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에 따라 죽는다는 점에 따라 부조리한 사회를 나타내는 비유가 된다.

ㅡ이에 따라서 바다는 현생, 육지는 이상적인 사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ㅡ곶이라는 것은 바다를 향해 뾰족하게 나온 육지를 말한다.

ㅡ바다가 부조리한 현생이라면, 곶은 바다를 찌르는 듯한 육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ㅡ이에 따르면, 차라투스트라의 곶은 부조리한 사회를 찌르는 곳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ㅡ세계가 차라투스트라의 곶에 있다는 것은 세계가 바다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는 세계가 부조리 속에서 존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에게는 희소식이 된다.

ㅡ그런 면에서 늠름한 나무로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왜 세계는 눈을 매혹시키려고 함 하나를 열어놓은 것과 같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관점에서, 현재의 세계가 이상사회로 저절로 나아가는 과도기라고 한다면, 세계는 앞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펼쳐질 보물상자가 된다.

ㅡ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사랑을 쫓아버릴 정도의 수수께끼도 아니고, 지혜를 잠재울 정도의 해답도 아닌 이 세계는 무엇이고, 왜 사람들은 악담을 하는가?

ㅡ현재의 세계는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다.

ㅡ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당사자들은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고통받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 부조리를 없앨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ㅡ하지만 이 부조리를 없애는 문제는 쉽게 답이 보이지 않는데, 왜냐면 부조리를 근절하려고 감시하고 경계해도, 부조리를 지향하는 누군가가 또 나타나서 부조리를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부조리 근절은 해답이 없는 요소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ㅡ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부조리한 세상을 긍정할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서 절망하게 된다.

ㅡ즉 사람들에게 세계는 사랑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는 것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세계를 긍정하며 사랑하고 있다.

ㅡ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세계라는 곳이 사랑하지 못할 정도의, 답이 없는 문제를 지닌 수수께끼로 여겨지지 않는다.

 

ㅡ또 사람들은 부조리를 근절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나름의 생존법을 찾게 된다.

ㅡ그것이 부조리를 적당히 이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이러한 해법은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ㅡ왜냐면 부조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으로, 부조리한 현재를 위한 가장 좋은 답이 될 수는 없다.

ㅡ그렇기에 부조리를 적당히 받아들이고 살라는 이 해답은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답이 된다.

ㅡ그렇기에 ‘사람들의 지혜를 잠재울 정도의 해답도 아닌’이라는 구절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결과적으로 현재의 세계는 부조리가 가득하고, 그에 따라 부조리에 적응하는 것이 답처럼 되어져 있어서, 세계를 두고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부조리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악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축복하는 법을 가르치는 자는 저주하는 법도 가르친다고 하는데, 여기서 가르치는 자는 누구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꿈에서 본 대로 낮에 가장 악한 것 세 가지를 저울에 올려두고서 저울질을 하려고 한다.

ㅡ그러면서 언급되는 것이 ‘거기서 축복하는 법을 가르치고 저주하는 법도 가르치는 자’이다.

 

ㅡ그런데 ‘거기서’라는 표현으로 볼 때, 어떤 특정 상황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ㅡ그러면 ‘거기’는 어디를 말하는 걸까?

ㅡ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낮’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꿈에서 본 대로 낮에 가장 악한 것 세 가지를 저울질하겠다고 했는데, 이 낮이라는 시점은 현생을 살아가고 있는 시점이다.

ㅡ즉 현생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꿈에서 본 것에 따라 행하려는 것이다.

ㅡ따라서 낮은 현생이고, 현생에서 축복하는 법과 저주하는 법을 가르치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현생에서 축복하는 법과 저주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사회적/종교적 올바름과 그릇됨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세 가지, 가장 악한 것 세 가지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육욕/지배욕/이기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악하다고 여겨지는 이 세 가지를 가장 저주받았고, 고약하게 비방받고 왜곡된 것으로 본다.

ㅡ즉 잘못된 인식 속에서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다시 고찰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바다에서 백 개의 머리를 가진 나이 들고 충직한 괴물 개가 응석 부리며 다가온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바다는 부조리한 세계를 말하고, 이 부조리한 세계에는 여러 규율들을 지니고 있는데, 이 규율은 머리가 여럿 달린 존재로 취급된다; 「차라투스트라, 1권 15장」

     실로 이 선과 악이 행사하는 칭찬과 질책의 힘은 거대한 괴물 같다.

     그대 형제들이여, 말해보라, 누가 이 괴물을 제압할 것인가?

     말해보라, 누가 이 짐승의 천 개나 되는 목에 족쇄를 채울 것인가?

ㅡ이와 같이 본다면, 차라투스트라가 사회에서 악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고찰하게 되면, 사회적 규율에 따른 비판이나 비방이 나타날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한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나무를 증인으로 세우나?

ㅡ나무는 성장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ㅡ나무가 위로 자라나면서 단단한 지면을 뿌리로 부수어 나아간다는 점이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태양/올바른 이해를 향해 성장하는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고 여겨지는 듯하다.

 

“어떤 다리를 건너 현재는 미래로 나아가는가”와 같은 질문은 왜 갑자기 나타나는가?

ㅡ이 질문은 육욕/성욕을 긍정하기 위한 질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이상 사회로 나아가려면 몇 세대의 진행이 더 있어야 한다.

ㅡ그러기 위해서, 자손을 낳는 일이 필요하고, 이 자손을 올바른/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게끔 교육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ㅡ그런 면에서 육욕은 자손을 낳는 일을 수행하므로, 차라투스트라에게 분명히 좋은 일이라고 여겨진다.

 

강제에 의해 높은 것이 아래로 향하는 것은 왜 언급되나?

ㅡ이에 대한 답으로 지배욕을 언급하려고 내놓은 질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올바른 이해가 세상을 지배하여 부조리가 근절되기를 바란다.

ㅡ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

ㅡ그래야 다수의 사람들이 접하고, 그럼으로써 세력이 생기고, 그 세력을 기반으로 해서 올바른 이해를 중시하고 따르는 세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ㅡ따라서 올바른 이해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욕구, 올바른 이해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욕구가 성숙한 자가 미숙한 자들에게 나아가게 하는 이유로 언급되는 것이다.

 

최고로 높은 것에게 더 높이 자라나라고 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이기심이다.

ㅡ즉 더 성장하려는 것,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기심이란 이야기다.

 

ㅡ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기심은 편협한 이기심이 아니라, 건강한 이기심으로 자신을 위해 이타적이게 되는 이기심을 말한다; 이는 후에 다시금 이야기가 된다.

 

저울이 조용히 수평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ㅡ수평을 이룬다는 것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말하고, 이에 따라서, 올바른 답이 나왔다는 걸 말한다.

ㅡ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육욕/지배욕/이기심이 올바르게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ㅡ이는 곧 악에 대한 현재의 입장은 그릇된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왜 육욕은 참회복을 걸친 채 신체를 결명하는 자들에게 가시이자 말뚝인가?

ㅡ참회복을 걸친 채 신체를 경멸한다는 것은 신체 경멸자를 지칭하며, 이는 신체보다 정신을 우선하는 존재를 나타낸다.

ㅡ신체를 경멸한다는 것은 감각을 경멸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러한 자들에게는 신체는 정신을 가둔 감옥, 정신을 번민하게 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데 방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ㅡ그런 점에서 정신을 괴롭히는 요소로서 신체적 욕구를 제시한다.

 

배후세계론자는 왜 육욕을 세속이라며 저주하나?

ㅡ배후세계론자들은 종교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종교적 교리에 의하여 육욕을 절제하고 정숙해야 구원받는다고 이해한다.

ㅡ그런 점에서 육욕은 세속적인 것이자 종교적 구원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므로, 저주하게 된다.

 

육욕은 왜 혼란과 오류를 가르치는 교사 모두를 조롱하고 바보 취급하나?

ㅡ여기서 혼란과 오류를 가르치는 교사는 신체 경멸자와 종교인들을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을 통해서 ‘나’를 규정하고 이해할 때, 신체를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차라투스트라, 1권 3장」을 통해서 종교적 세계관을 비판한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신체를 경멸하는 자와 종교인들은 그릇된 것을 가르치는 자로 취급된다.

 

ㅡ여기서 제시되는 것은 이렇게 신체 경멸자와 종교인들이 아무리 가르치고 따르려고 해도 육욕에 의해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ㅡ그래서 그들의 앎과 다른 행동을 하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육욕을 악한 것으로 취급한다.

 

육욕은 왜 잡것들에게 그들을 불태우며, 천천히 타오르는 불길이 되나?

ㅡ여기서 말하는 잡것들은 그리 대단하지 못한 사람들로 평범한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이들의 경우, 삶에서 중대한 목표가 없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 육욕은 그들에게 삶의 목적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ㅡ문제는 그렇게 육욕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ㅡ왜냐면 그들은 거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올바른 것을 도외시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그들은 육욕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을 불태운다고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벌레 먹은 목재와 악취 나는 누더기는 무엇인가? 왜 육욕이 난로가 되나?

ㅡ벌레 먹은 것이나 악취나는 것은 모두 좋은 상태에 있지 못한 것을 나타내며, 이를 사람에게 대입하면, 이상/올바름과 거리가 먼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러한 자들의 경우, 세상에 열정을 가지기 힘들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육욕은 이들이 세상에 열정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육욕은 왜 자유로운 자들에게 죄가 없는 것이자 자유로운 것인가? 왜 지상의 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인가? 왜 온 미래가 현재에 바치는 넘쳐흐르는 고마움인가?

ㅡ육욕은 기본적으로 개체의 존속과 관련된다.

ㅡ그런 면에서 육욕을 통해서 이상적 존재가 존속된다면, 이는 분명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ㅡ여기서 자유로운 자는 사회적 규율이나 부조리에 자유로운 자를 말하므로, 이상적 존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이런 존재들에게 육욕은 악한 것으로 취급받지 않고, 좋은 것, 순수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ㅡ또 육욕은 억압할 것이 되지 않으므로, 자유로운 것이 된다.

 

ㅡ그리고 육욕은 인간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쾌감 중에서 큰 쾌감을 제공하므로, 삶을 살면서 누리는 행복이기도 하다.

ㅡ이런 것을 억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ㅡ육욕을 통해서 우리는 번식하고 이를 통해서 미래의 존재들이 나타나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과거 세대의 육욕이 없었다면, 현세대나 미래 세대의 존재들은 없었을 것이기에, 이들에게 있어 과거 세대의 육욕은 고마운 것이기도 하다.

ㅡ물론 부조리한 세상에 자신들을 내놓은 것이기에, 과거 세대의 육욕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계승된다면, 이상을 바라볼 줄 안다면, 미래 세대는 과거의 세대보다 한층 더 이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또 이상을 향해 나아가게끔 노력할 수 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 세대의 육욕은 고마운 것이 된다.

 

시들어버린 자에게만은 왜 육욕은 달콤한 독인가?

ㅡ시들어버린 자라는 것은 이상 사회에 대한 의지가 없는 자들을 말한다; 의지가 시들다.

ㅡ이런 자들에게는 육욕은 삶의 무료함을 해결해주는 요소가 되는데, 그러면서 이상을 추구하지 않고 육욕에 목매는 상황이 나타난다.

ㅡ그러면 결국 성숙해지지 못하고 향락적이게 되는데, 이를 독으로 보았다.

 

육욕은 왜 사자의 의지를 지닌 자들에게는 강심제일까? 왜 아껴온 포도주일까?

ㅡ사자의 의지를 지닌 자들은 「차라투스트라, 1권 1장」에서 나오는 사자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ㅡ이들은 사회적 규율이라는 황금용들과 맞서므로,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ㅡ그렇다는 것은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이란 걸 나타내고,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육욕은 강심제, 심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란 이야기다.

ㅡ여기서 심장은 열의/열정을 나타내는데, 심장이 약화된다는 것은 의지가 약해지고 의욕이 사라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ㅡ즉 육욕은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의지를 다잡게 해주는 수단이란 이야기가 된다.

ㅡ육욕이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의지를 다잡게 해주는 이유는 자신의 자녀나 후대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를 주고자 하는 의지와 육욕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ㅡ또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존재들과 어울리며 육욕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비슷한 존재를 마주칠 때까지 육욕을 참는 경향이 있다.

ㅡ이를 아껴온 포도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육욕은 왜 한층 높은 행복과 최고 희망에 대한 비유적 행복인가?

ㅡ이상적 존재가 추구하는 행복과 희망은 이상 사회의 실현이다.

ㅡ육욕은 미래로 인류가 나아가게 하고, 미래에는 이상 사회가 펼쳐질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가정하기에, 육욕에서 누리는 행복은 결국 다가올 미래의 이상 사회의 행복과 관련된다.

 

많은 이들에게 혼인과 혼인 이상의 것이 약속된다는 건 뭘 말하나?

ㅡ사회에서 육욕은 혼인을 약속하게 된다.

ㅡ육욕을 정당하게 취하려면 혼인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ㅡ여기에 더해서, 앞서 말한 대로면, 육욕은 혼인을 넘어서서 미래의 이상 사회도 약속한다.

ㅡ그런 점에서, 해당 표현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사내와 여자 사이보다 자기 자신이 더 낯선 많은 사람에게 약속된다는 건 뭘 말하나?

ㅡ기본적으로 육욕은 혼인이라는 육욕의 정당한 획득과 더불어 미래를 약속한다.

ㅡ문제는 이러한 약속이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으로 보인다.

ㅡ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인지하지 못한 자들에게 육욕이 혼인과 미래를 약속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인지하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올바름을 탐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ㅡ그렇게 되면,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나아가므로,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혼인과 혼인 이상의 것이 약속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사내와 여자가 서로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인지를 그 누가 완전히 파악하고 있냐는 질문은 왜 나오나?

ㅡ현재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ㅡ그러한 존재들은 자신도 이해를 제대로 못하므로, 교제하는 대상이나 배우자도 완전히 이해하거나 파악하고 못한다고 할 수 있다.

ㅡ이런 점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현재 나타나는 결혼의 경우, 이상적이지 못한 결혼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말에 울타리를 치나? 왜 돼지와 광신자가 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지금 제시하는 육욕에 대한 입장은 향락주의자(돼지)나 절제를 중시하는 자들(광신자)의 입장과 다른, 중간적 입장이다.

ㅡ왜냐면 이상을 바라는 자들에게 있어서, 육욕은 반드시 필요하고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향락주의를 긍정하는 모양새로 보일 수 있다.

ㅡ또 이상을 바라는 존재가 나타날 때까지 육욕은 참아야 하므로, 절제를 중시하는 모양새로도 보일 수 있다.

ㅡ하지만 니체가 바라는 것은 이 둘이 아니므로, 둘과 명확히 다르다고 보여주는 듯하다.

 

지배욕은 왜 단단한 심장을 지닌 자들의 벌겋게 달아오른 채찍인가?

ㅡ여기서 단단한 심장을 지녔다는 것은, 감정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ㅡ즉 이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자이자 행동할 때 감정에 따르지 않고 올바른 것을 찾아 행동하는 자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이러한 자들은 올바름을 추구하고, 올바른 것이 세상을 지배하길 바라는데, 이러한 지배욕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이 성장하게 하고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한다.

ㅡ이러한 특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배욕을 두고, 가장 잔인한 자가 자신을 위해 아껴 둔 고문이자 화형장 장작더미의 불꽃이란 말은 왜 나오나?

ㅡ가장 잔인한 자는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자로 보인다.

ㅡ이런 자들에게 지배하려는 욕구는 허영이나 허세로 나아가고, 그래서 그릇된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이 상황에 놓인 개인은 자기 내면의 행복을 놓치고 자신을 홀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ㅡ그렇기에 위와 같은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허영기에 차 있는 대중들에게 왜 지배욕이 들러붙어 있나? 왜 대중들은 확실치 않은 덕 일체를 비웃고, 조롱하나?

ㅡ지배욕이 있으면,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한다.

ㅡ하지만 남들 위에 군림하려면, 노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노력을 덜 하면서 군림하려면,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들을 행하고, 익히면 된다.

ㅡ그에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공인될 수 있는 ‘교양’을 중시하고 따르게 된다.

ㅡ이 상황에 이르면, 사람들은 교양에 해당되지 않는, 상식에 해당되지 않는 올바름/덕을 마주하게 될 때, 말도 안 된다며 비웃고 조롱하게 된다.

ㅡ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지배욕은 왜 지진이라고 불리나? 왜 회칠한 무덤을 파헤치나? 왜 설익은 대답 곁의 의문부호인가?

ㅡ여기서 언급되는 지배욕은 올바름이 세상을 지배하게 하려는 지배욕을 말한다.

ㅡ이 지배욕에 따르면, 그릇되거나 부조리한 것은 사라져야 하는 것에 해당이 된다.

ㅡ그렇기에 썩어 푸석거리는 것과 속이 텅 빈 것이 부숴지는 것이다.

 

ㅡ또한 회칠한 무덤은 석회를 바른 무덤을 말하는데, 무덤은 과거의 것과 죽음을 말하므로, 종교나 사회적 관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이에 부조리한 종교적/사회적 규율을 말하며, 이것들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향한 지배욕을 가진 사람들은 파헤쳐서 부수려고 하게 된다.

 

ㅡ문제는 이때, 종교적/사회적 규율이 올바른 해명을 하지 못한다면, 의문을 가지고서 파헤친다는 점이다.

ㅡ따라서 현재의 지배욕은 올바른 이해를 향한 지배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지배욕의 시선 앞에서 기어 다니고 전전긍긍한다고 하는가? 왜 이들은 뱀과 돼지보다도 비천하게 되나?

ㅡ이 구절은 사람들이 지배욕에 휘둘리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ㅡ지배욕에 휘둘리는 경우, 허영과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권력에 대한 탐욕을 바라게 되는데, 이 모습이 향락주의자들의 모습보다 좋지 못하다고 보는 듯하다.

 

사람들 내부에서 크나큰 경멸의 소리가 터져나오는 건 뭘 말하나?

ㅡ지배욕에 휘둘려서, 즉 탐욕을 가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8장」에서 젊은이가 자기 경멸을 하는 모습을 보면 좋을 듯하다.

 

커다란 경멸을 가르치는 여교사는 무얼 말하나?

ㅡ커다란 경멸이란 사회 부조리를 경멸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 서문 4장」에서 위대한 경멸이 나타나는데, 이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르면, 이 여교사는 사회의 부조리와 그릇됨을 경멸한다.

ㅡ그렇기에 사회라 부를 수 있는 도시와 나라에 대고, 부조리와 그릇됨을 비판하며, 부조리와 그릇됨을 향해 “물러나라”라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그리고 실제로 부조리와 그릇됨이 물러날 때까지 한다고 했는데, 이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의 모습과 비슷해진다.

 

ㅡ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지배욕은 올바른 이해를 향한 지배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배욕은 왜 순수한 자, 고독한 자, 자족하는 높은 자에게 올라가나?

ㅡ이러한 자들은 성숙한 자를 말하는데, 성숙한 자들은 성숙한 사회/이상적인 사회를 갖고 싶어하기에, 올바른 이해가 세상을 지배하길 바라기에, 지배욕을 갖는다.

ㅡ이때 그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에, 그들은 사회를 사랑해서 지배욕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왜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갈망할 때, 탐욕이라고 부르지 않나? 왜 병적이지도 않나?

ㅡ앞서 살핀 대로면, 성숙한 자가 ‘올바른 이해가 세상을 지배하길 바라면서’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된다.

ㅡ이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다.

ㅡ그렇기에 탐욕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병적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것이다.

 

왜 고독의 높은 경지가 자족하며 머무르려고 하지 않나?

ㅡ앞서 말한 것처럼, 성숙한 자는 성숙한 사회가 나타나길 바라기에, 자기 자신의 성숙함에 안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이기성은 무얼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여기서 말하는 이기성은 건전하고 건강한 이기성이며, 아름다운 영혼, 부조리를 이기려는 영혼, 삶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는 영혼, 주변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영혼에게서 나오는 이기성을 말한다.

ㅡ이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의 특징을 말하는데, 그릇됨이 포함되지 않기에 아름다우며, 부조리에 맞서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세상/세계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있으며,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혼은 주변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므로 거울에 상이 비치듯이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연하고 설득력 있는 신체는 무엇을 말하나?

ㅡ신체는 정동을 나타내는 곳을 말하며, 우리가 배고픔이나 슬픔 등을 느끼는 신체 현상의 장이다.

ㅡ이때 우리가 어떤 이유로 슬픔이나 기쁨을 느낄 때, 그 이유가 올바른 경우가 있고, 그릇된 경우가 있다.

ㅡ즉 비합리적인 이유로 슬픔이나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ㅡ이런 경우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불안을 합당하지 못한 것, 설득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종교 교리를 따르지 않아서 불안해하는 것.

ㅡ반면 우리의 슬품과 불안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면, 설득력이 있는 슬픔과 불안이 될 것이다.

 

ㅡ유연한 신체의 경우, 경직되지 않은 신체를 말하는 걸로 보이는데, 이는 억압당한 신체를 나타내거나 강제되는 신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런 점에서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신체를 말하는 걸로 볼 수 있고, 사회적 시선에 따라 정동이 나타나는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서 문제가 생길까 불안감을 느낀 경우.

 

ㅡ이러한 점에서 유연한 신체는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사회적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왜 유연하고 설득력 있는 신체와 춤추는 자라는 비유와 정수가 자기 희열적 영혼인가?

ㅡ정동적 반응은 개인이 어떤 정신적 상태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ㅡ즉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민감하다면, 그에 따라 신체적 반응들을 얻는다; 예를 들어, 기도하지 않음에 따라 불안해하거나, 특정한 종교적 기념일에 슬퍼하는 것.

ㅡ신체적 반응은 곧 개인의 정신을 나타내므로, 신체적 반응은 정신에 대한 비유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다.

 

ㅡ유연하고 설득력 있는 신체는 어떤 억압이나 부조리에 따라 반응하는 신체가 아니며, 그에 따라서 사회적/종교적 규율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ㅡ그리고 이때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는 것은 자기 희열, 즉 자기 행복이다.

 

자기 희열은 좋음과 나쁨이라는 말로 자신을 감싸는 이유가 무엇인가?

ㅡ자기 희열/행복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을 사회적 규율이나 종교적 교리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에 두기 때문이다.

 

자기 희열이 자신에게서 경멸스러운 것 일체를 추방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자기 행복을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면서,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은 자기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을 허용하냐이다.

ㅡ이렇게 되면, 부조리를 허용하는 것과 그릇됨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경멸스러운 것을 배제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이때 배제/추방되는 것은 비겁함이다.

ㅡ비겁함은 올바른 걸 알아도 행하지 않거나, 자신만을 위한 편협한 행동을 하거나, 타인을 착취하는 등의 행동으로 비춰볼 수 있다.

 

자기 희열은 왜 걱정하고 푸념하고 한탄하는 자를 경멸스럽게 여기나? 소소한 이익을 주워 모으는 사람을 경멸스럽게 여기나?

ㅡ자기 행복은 불평만 하지 말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ㅡ그렇기 때문에 걱정하고 푸념하고 한탄하는 자는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ㅡ소소한 이익을 주워 모으는 사람의 경우, 불평을 하면서 적당히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ㅡ이 역시도 실제 행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기에, 지적하는 듯하다.

 

비애에 차 있는 지혜는 무엇인가? 왜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지혜이자 밤그림자 지혜라고 불리나?

ㅡ이러한 지혜는 “모든 것은 헛되다”라고 표현하는 지혜인데, 이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ㅡ즉 비애에 차 있는 지혜는 허무주의인 것이다.

ㅡ이러한 허무주의는 세상에 대해서 절망한 사람들이 주로 갖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올바른 생각/지혜인 양 여겨지게 된다.

 

ㅡ문제는 세계가 허무하다고 여기거나 절망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ㅡ즉 부조리를 근절하는 방법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해당 생각이 대두되는 것인데, 그릇된 이해를 어두운 것으로 비유한다면, 밤/어둠 속에서의 지혜가 된다.

 

자기 희열이 하찮게 여기는 소심한 불신은 무엇인가? 눈길이나 손길 대신 맹세를 원하는 자는 누굴 말하나? 지나치게 불신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왜 이것들은 비겁한 영혼의 속성인가?

ㅡ소심한 불신의 경우, 확신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회의적 시선을 갖는 걸 말한다.

ㅡ눈길이나 손길 대신 맹세를 원하는 것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증명에 대한 내용이라고 볼 경우, 증명의 수단으로 경험되는 것보다 맹세를 중시한다는 의미로 보여 진다.

ㅡ지나치게 불신하는 지혜는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믿으면서, 전혀 수긍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종교적/사회적 규율에 대해 맹신하는 자를 말하는 듯하다.

 

ㅡ이들이 공통적으로 비겁한 특징으로 불리는 이유는 올바른 것을 보더라도 외면하기 때문이다.

 

재빨리 영합하는 자, 곧장 드러눕는 개와 같은 자, 굴복하는 자는 왜 자기 희열이 하찮게 여기나?

ㅡ후술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자들은 너무 쉽게 자기 자신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신들과 사람들 앞에서 노예처럼 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종교적 규율과 사회적 규율에 순응한다는 것을 말한다.

 

노예/늙은이/지쳐 있는 자의 익살은 왜 사이비 지혜가 되나?

ㅡ노예/늙은이/지쳐 있는 자의 공통점은 부조리와 같은 것을 보더라도 문제시하지 말고 따르라는 입장을 이야기하는 자들이다.

ㅡ노예는 노예기에 따르라고 하고, 늙은이는 살아보니 갈등이 없는 게 낫다고 봐서 그러하며, 지쳐 있는 자는 휴식이 중요하니 갈등을 피하려고 해서 그렇다.

ㅡ이런 것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많이 언급되는 것이자, 올바른 사회 생활로 취급되어, 삶의 지혜로 여겨지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사제들의 어리석음도 왜 사이비 지혜가 되나?

ㅡ사제들은 저승을 긍정하고 사회에서 동정하며 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어리석다고 표현한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저승은 허황되고, 동정은 오히려 사회를 악화시킨다고 보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ㅡ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종교적 규율에 따라서, 이를 지혜로 여기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사이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혼의 속성이 여자나 노예인 자라는 언급은 왜 나오나?

ㅡ영혼의 속성이 여자라는 것은 다양한 것을 존중하면서 그릇된 것마저 존중하려는 경향성을 지닌 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 1권 14장」에서 나오는 여자의 특징에 대해서 참고하도록 하자.

     여자의 사랑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것 전부에 대한 불공정과 맹목이 들어 있다.

     심지어는 여자의 지적 사랑 속에까지 빛과 나란히 불의의 기습과 번개와 밤이 여전히 깃들어 있다.

 

이기성을 괴롭히는 짓거리들은 왜 덕이라고 불렸나?

ㅡ여기서 말하는 이기성은 건강한 이기성으로, 올바른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설파하려는 것을 말한다.

ㅡ이런 상황에서 이기성은 사회 부조리나 종교적 규율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때 이 이기성에 맞서서 괴롭히게 된다.

ㅡ이때, 이들은 자신들의 규율을 지키는 활동을 하는 것이기에, 덕이라 불리는 것이다.

 

세상에 지친 비겁자들과 십자거미는 왜 자기 상실을 소망했나?

ㅡ세상에 지친 비겁자들은 삶의 지혜를 터득한 자들, 부조리에 순응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자들이고, 십자거미는 사람들을 종교적 규율 속에 가두는 사제들을 말한다.

ㅡ이들이 자기 상실을 소망하는 이유는 규율을 위해서 자기를 잃을수록 덕을 갖춘 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오는 왜 심판의 칼이라 불리는가?

ㅡ위대한 정오는 태양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뜬 상태를 말하는데, 이때 모든 것이 가장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고 보기에, 올바른 이해가 가능한 시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ㅡ또한 태양은 이데아를 상징하기도 하므로, 이데아가 세상을 비추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ㅡ이데아가 비추는 빛은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하므로, 마찬가지로 올바른 이해가 지배하는 시기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런 경우, 그릇된 이해나 부조리들은 그 그릇됨과 부조리함이 드러나서 비판받게 된다.

 

‘나’를 두고 건전하고 신성하다고 말하는 건 무엇인가?

ㅡ여기서 ‘나’는 자기를 말하고, 신체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4장」을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