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9장 의역 (완) (귀향,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7. 10. 00:15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9장 귀향


         
9장 개괄

 
 
9장은 고독을 향해 나아가던 차라투스트라가 마침내 온전한 고독 속에 이르게 되는 상황이 그려진다.
이를 통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며 정리하는데, 고독이 어머니처럼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어머니를 향해 이야기하는 아이처럼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고독은 차라투스트라가 경험했을 소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고독 속에 있는 것과 소외 속에 있는 것의 차이점을 비교해준다.
고독의 경우, 올바른 이해를 위한 자유로움과 희망을 주는 반면, 소외의 경우, 자유를 억압당하고 좌절하게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많은 불편들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던 경험을 말한다.
즉, 올바른 이해를 위한 논의도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을 숨겨야만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억압하면서, 자신을 옥죄면서 이야기하고 지내야 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사람들 속에 있는 것보다 고독 속에서 지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본문

 
 
사람들 사이에서 거칠게 지내왔기에, 저는 눈물을 흘리며 고독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고독 속에서 자라났으니, 고독은 제게 어머니와 같습니다.
집을 매몰차게 떠나던 아이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들이 그러듯이,
제게 꾸짖기도 하고 미소로 반겨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고독은 제게 이렇게 말하겠지요.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겠다고 하던 사람이 누구였나?
     너무 오랫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다고 말한 이가 누구였나?
     그러던 네가 다시 돌아왔구나.
     이제는 침묵에 대해서 배웠느냐?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알고 있다.
     너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워했다는 것을.
     너가 사람들 사이에서 경험한 것은 소외이다.
     소외와 고독은 다르다.
 
     너 자신에 대해서도 배웠겠지.
     사람들 사이에서 너는 거칠고 낯선 존재로 여겨질 것이란 걸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보호해주고 존중해주는 걸 바라지만,
     너는 사람들의 감춰진 그릇됨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너는 너를 성장시켰던 곳,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했던 곳에 있다.
     그러므로 넌 여기서 니가 이제껏 경험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너가 사람들 사이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올바르게 이해되길 바라지만, 사람들의 그릇된 관점에 따라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너에게서는 올바르게 이해될 것이다.
     너는 우연한 현상들을 관찰하며 그 속에 숨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너에게 자신을 이해해달라며 아첨할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너는 늘 말을 가려해야 했겠지만,
     이 곳에서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눈치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이해해주는 것이고, 이는 세상 만물들이 바라던 것일 테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해주면, 만물은 마치 칭찬이라도 들은 듯이 너의 해석을 반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다
고독은 차라투스트라를 어머니처럼 반긴다.


 
     하지만 소외는 다르다.
 
     차라투스트라여, 기억하는가?
     너의 긍지가 울부짖던 때,
     너가 사람들에게 너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조롱을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
     과거 너와 같은 의견을 가진 자들의 책을 들고 서서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
     너의 지혜와 긍지가 너를 인도하기를 바라던 때,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동물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순간들이 모두 소외를 경험하던 순간들이었다.
 
     차라투스트라여, 기억하는가?
     네가 너의 앎을 사람들에게 나누었던 때를 말이다.
 
     너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만 할 뿐 받는 것이 없었지만,
     사람들을 이해한답시고 이렇게 생각하며 한탄했지.
          “본래 저들에게는 받기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고, 받는 것보다는 훔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 여겨지지 않은가?
           그들이 내게 뭔가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견뎌야 하는 것이겠지…”
     넌 그렇게 그들을 이해하는 게 맞다고 여겼겠지만, 그저 넌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여, 기억하는가?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실망하여 너의 꿈과 운명을 버리려고 했을 때를 말이다.
     그때 이제까지 너의 노력은 네게 고통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너의 용기는 꺾여버렸다.
     이처럼 의지가 꺾이고 운명을 벗어나려고 했던 이유는 너가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버림받음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절망하게 된다.


 
아, 나의 어머니로서의 고독은 얼마나 복되고 다정하게 제게 말하는지!
 
고독은 자신을 벗어나서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할지라도, 자세히 묻지도 비난하지 않고 저를 받아들여 줍니다.
고독은 늘 저를 받아들여주며, 저는 고독 속에서 탐구하고 사색하면서 몰입하게 됩니다.
그렇게 고독 속에서 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죠.
 
하지만 사람들 속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 갑니다.
매 순간순간의 그릇됨과 부조리를 통해서 나타난 답답함이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하는 것이겠죠.
 
고독 속에서 저는 만물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고, 그럴 기회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물은 고독 속에서 숨겨진 진리들을 드러내며, 명문화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만물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헛됩니다.
사람들과 논의하는 것은 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서,
누군가로부터 이상한 말을 듣더라도 잊어버리고, 지나칠 줄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죠.
 
사람들 사이에서 만물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면, 만물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부정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온갖 구설에 휘말려 더러운 꼴을 보게 될 겁니다.
저는 굳이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고독 속의 탐구자
차라투스트라는 고독 속에서 올바른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저는 이제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그릇된 이해와 그에 따른 부조리를 질리도록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아,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이상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고독이여!
고독은 어떻게 제게 이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지!
어떻게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생각을 말해도 잘 들어주는지!
 
사람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모두가 말하지만, 모두가 다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혹여라도 누가 올바른 이해를 나누려고 해도, 올바른 이해가 자신에게 얼마나 실리를 주는지 살피고, 더 실리를 주는 것을 선택하니까요.
 
누군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더라도, 그것은 피상적으로만 다뤄질 뿐입니다.
 
저들은 서로 대화하는 듯하지만, 서로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합니다.
모두가 말을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말을 하지만, 하나의 주제/이슈에 대해서 지겹도록 말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관심도 없었지만, 갑자기 오늘 들어서 관심을 가지고는 온갖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그만큼 선동당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지혜의 말이 퍼지더라도, 그것은 곧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기만 하는 자들과 경박스러운 자들이 자신을 위해서 온갖 방식으로 인용하면서 가치를 잃고 너덜너덜해지는 것입니다.
 

방치된 달걀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논쟁할 때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며 논하는 것을,
달걀을 낳고 품지 않은 닭으로 비유한다.


 
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여,
 
이제 저는 이들을 지나치기로 했습니다.
이제 제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것은 제 뒤에 놓여 있습니다.
 
보살피고 싶어하는 마음, 이것이 제게 가장 큰 위험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고, 저 역시 보살피고 동정하고 싶어하며 제 꿈과 운명을 포기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릇된 이해, 이로 인한 바보 같은 행동과 감정, 부조리에 시달리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으로 인해,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소한 거짓말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서,
사람들의 그릇됨을 견디기 위해서 제 자신을 속일 준비를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 중에도 분명 희망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람들에게는 서로 각자가 추구하는 것이 이미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만의 것들이 있는데, 제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지금 당장도 아닌 먼 미래를 바라보고 추구할 필요가 이들에게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저를 오해하여 비판했을 때에도,
저는 바보처럼 저 자신을 챙기기보다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때는 사람들에게 엄격할 게 아니라 제 자신에게만 엄격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그러면서도 저는 이런 제 자신에 불만을 갖기도 했었습니다.
 
또 저는 선하다는 평판을 지닌 사람들이 가장 맹렬히 비판하는 자라는 걸 알았습니다.
저들은 저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존재들을 동정하던 저에게 동정심은 왜곡된 인식, “저들이 저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는 그것을 견뎌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점차 무기력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그들을 돕고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려는 자들을 점차 무기력하게 만드니,
선하다는 자들은 정말 어리석고 무가치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독파리들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독파리들의 소굴로 보인다.


 
저는 사회 속에서 지내면서, 제 자신의 생각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숨겨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왜냐면, 제 생각과 이해를 받아주기에는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빈곤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제 동정심은 이런 사람들을 두고도 포용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상적 빈곤을 채워주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었죠.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착각이었습니다.
 
저는 사회에서 지내면서,
교조적인 현자들에게 교조적이라고 하지 않고, 지혜롭다고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 저승을 긍정하고 염세를 말하는 이들에게 사색가이자 탐구자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승을 긍정하고 염세를 말하는 이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을 현생에서 노력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차 건설적인 모습보다 향락적인 모습으로 물들어 가죠.
그렇게 사회는 병들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고독 속에서 지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생각들로부터 중독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다시 고독 속으로 왔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이상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저의 영혼은 이상한 생각들로부터 정화되어, 재채기하며 외칩니다.
“건강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홀로 지내다가 앎을 나누려고 사람들에게로 갔다.
이에 따라 일련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경험 속에서 차라투스트라가 결론으로 내린 것은 개인의 내적 건강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적 건강함을 추구하라는 의미에서 건강하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고독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은 생기로움이 가득한 산이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거리들

 
왜 차라투스트라는 고독을 어머니라고 부르나?
ㅡ차라투스트라는 고독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폭풍처럼 내게서 달아나버린 자, 너무 오랫동안 고독과 벗하여 살아왔기에 침묵하는 법을 잊고 말았다 라고 외친 자는 누구인가?
ㅡ차라투스트라로, 「차라투스트라, 2권 1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동경하면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고독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침묵하는 법을 잊게 된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입이 되었고,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냇물의 노호가 되었다.
     나는 내 말이 골짜기 아래로 쏟아지기를 바란다.
          (중략)
     모든 말이 내게는 너무도 느리기만 하다. 폭풍이여, 그래서 나는네 수레에 뛰어든다!
     그러고는 내 악의로 너를 채찍질하겠다!
 
     함성을 치듯, 환호를 지르듯 나는 저 드넓은 바다를 넘어가겠다.
     내 벗들이 머물고 있는 저 지복의 섬을 발견해낼 때까지.
 
왜 차라투스트라는 침묵을 배웠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침묵이 침묵을 통해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악의이자 기술이다.
          (중략)
     어느 누구도 내 바탕과 궁극적 의지를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나는 길고도 환한 침묵을
     생각해낸 것이다.
 
만물은 응석을 부려가며 네가 하는 말로 다가오고 네게 아양을 떤다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올바른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고, 만물을 올바르게 바라봐 준다.
ㅡ그런 면에서 만물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여기서 만물에게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을 건네도 되나?
ㅡ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에 대한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면 배척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ㅡ예를 들면,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이나 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숲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를 때, 시체 곁에 서있었을 때, 머리 위에서 새가 울던 때, 짐승들이 자신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던 때, 짐승들보다 인간들 사이에 있는 게 더 위험하다는 걸 깨닫던 때는 왜 버림받는 때인가?
ㅡ각각의 순간들은 서문의 장면으로,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려다가 실패한 이후에 나타난 장면들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설파를 하다가 실패하고, 그래서 곡예사의 시체를 메고 숲을 다니면서 자신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7장」.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정하게 되는데, 그때 독수리가 뱀을 감고 차라투스트라의 곁을 찾아왔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10장」.
ㅡ그러면서 사람들 틈에 있는 게 위험하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10장」.
 
차라투스트라는 왜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한층 더 복되지 않은가? 훔치는 것이 받는 것보다 한층 더 복되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탄식하나?
ㅡ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받는 것보다 훔치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을 언급하는 문장이다.
ㅡ이는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인데, 차라투스트라가 앎을 나눌 때,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받는 걸 좋아하고, 받는 것보다 훔치는 걸 좋아한다는 점을 되뇌는 것이다.
 
ㅡ사람들이 훔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은, 현자의 앎을 자신의 것인 양 선보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말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11장」
     하지만 국가는 선과 악에 대해서 온갖 혀를 총동원하여 기만한다.
     국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거짓말이다.
     또한 국가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훔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
     또 다른 이기성도 있는데,
     늘 훔치려고만 드는 너무나도 가난하여 굶주린, 병든 자들의 이기성, 병든 이기성이다.
 
     「차라투스트라, 3권 5장」
     그대 왜소한 도덕군자들이여, 그대들은 받을 때도 훔치듯이 한다.
     무뢰한에게도 명예라는 것이 있어 "빼앗을 수 없을 때에는(만) 훔쳐야 한다"라고 하지.
ㅡ각각의 구절들은 사람들이 훔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ㅡ훔치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다.
     「차라투스트라, 2권 9장」
     나는 받는 자의 행복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훔치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를 꿈꾸곤 했다.
ㅡ이 구절의 경우, 누군가의 현명함을 훔쳐 자신의 것처럼 치장하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를 생각하곤 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결국 해당 구절은 사람들이 앎을 나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대에 충족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찾아온 고요한 시간은 왜 차라투스트라가 버림받은 순간인가?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실망하면서, 좌절하게 되는데, 이 좌절 자체가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음, 소외됨을 의미한다; 소외되었기에 좌절한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고독이 버림받음/소외의 예시로 언급한다.
 
왜 고독과 차라투스트라는 서로 묻지도 탓하지도 않나?
ㅡ고독 자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탓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거니와, 언제나 원하면 고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고독에서 시간은 날렵한 걸음으로 가나? 빛이 아닌 어둠 속에서 시간은 왜 더 무겁게 느껴지나?
ㅡ빛은 올바른 이해를 말하고, 어둠은 그릇된 이해를 말한다.
ㅡ올바른 이해는 고독 속에서 얻을 수 있는데, 그릇된 이해는 사회 속에서 얻게 된다.
ㅡ이는 곧 사회 속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지만, 고독 속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간다는 이야기와 같다.
ㅡ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회 속에서는 부조리나 그릇된 이해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반면, 고독 속에서는 탐구하는 등의 몰입을 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존재의 말과 그 말이 담긴 상자 일체는 무엇인가? 왜 고독 속에서 모든 존재가 말이 되기를 바라고, 모든 생성이 말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고 말하나?
ㅡ고독은 올바른 이해를 위한 탐구를 하기에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고독한 상태에서는 만물에 대해서 올바른 앎을 가지고 명문화할 수 있다.
ㅡ이로써 인간 사회/학문에 문자화되는 것이다.
ㅡ즉 고독은 만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에 따라 학술적으로 승인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저 아래서는 모든 말이 허사인가? 왜 잊어버리는 것과 지나치는 것이 최고의 지헤인가?
ㅡ저 아래는 사회를 말한다.
ㅡ사회에서는 올바른 이해보다는 자극적인 이해를 보다 추구한다.
ㅡ그래서 올바른 이해를 사람들 사이에서 말해도 덧없게 된다.
     세상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돌아간다.
     배우를 중심으로는 대중과 명성이 돌아간다.
     세상의 운행이라는 것은 이런 모양새다.
     (중략)
     그는 내일이면 새로운 믿음을, 모레는 더 새로운 믿음을 갖는다.
     대중과 마찬가지로 재빠른 감각을, 변덕스러운 날씨를 갖고 있으니.
 
     뒤집어 엎기.
     이것이 배우에게는 증명이다.
     열광시키기.
     이것이 배우에게는 설득이다.
     그리고 피야말로 그에게는 모든 근거들 중 최상의 근거다.
 
     배우는 섬세한 귀에만 스며드는 진리를 거짓이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실로 배우는 세상에 커다란 소음을 불러일으키는 신들만을 믿는다!
 
ㅡ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극적인 이해가 중시되다 보니, 갖가지 궤변이 난무하게 된다.
ㅡ이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면, 공통된 궤변을 가진 이들로부터 사상검증을 당하고 배척당하게 될 수 있다.
ㅡ그러므로 이상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잊어버리는 것과 그냥 지나치는 것이 지혜로 여겨지게 된다.
 
인간들에게서 벌어지는 모든 걸 파악하려는 자는 왜 모든 걸 붙들고 싸워야 하나? 손이 깨끗하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왜 하나?
ㅡ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에 대해서 파악하려는 것을 말한다.
ㅡ즉 사람들과 함께 탐구를 하는 것이다.
ㅡ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해를 중시하다 보니, 사람들과 탐구를 진행하기가 수월하지 못하다.
ㅡ그런 면에서, 사람들과 온갖 것들로 다툼이 생기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그리 좋은 꼴을 보이지 못한다.
ㅡ그런 것을 기피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저들이 내쉬는 숨조차도 마시기 싫어하나? 무얼 의미하나?
ㅡ이 문장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아니면 무의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숨쉬는 것으로 비유하여, 어떤 의견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물로 떨어지지만, 깊은 샘 속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샘은 개인의 정신으로 볼 수 있다.
ㅡ즉 샘에 무언가 자극하는 것/생각거리가 주어진다고 할 지라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즉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걸 말한다.
 
온갖 것들이 다 말을 하지만, 이루어지거나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ㅡ서로 이야기를 하지만 어떤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걸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꼬꼬댁 울어대지만, 누가 자기 둥지에 조용히 알을 품으려 하냐고 묻는 건 뭘 말하나?
ㅡ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알만 내놓고 사라진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내뱉고 책임지지 않는 걸 말하는 것이다.
 
왜 저들은 온갖 것이 말해지지만, 왜 지겹도록 쪼개져 씹히나?
ㅡ사람들이 하나의 주제를 겪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의견들을 내놓는다는 의미로 보여 진다.
ㅡ즉,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선동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왜 사람들에게서 말해지는 것이 누설된다고 하나? 왜 깊은 영혼의 비밀이 나팔수와 나비의 것이 되나?
ㅡ여기서 말하는 나팔수는 어떤 이의 말을 따라서 전하는 존재를 말하고, 나비는 경박스러운 사람을 말한다.
ㅡ깊은 영혼은 현자나 탐구자를 말한다면, 탐구자의 사색의 결과물이 똑같이 읊거나 경박스러운 사람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ㅡ즉 사람들이 현자의 말을 인용하거나 차용하는 경향을 말한다.
ㅡ문제는 그 깊이 있는 통찰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 현자가 누리는 현명함의 덕을 보려고 하는 경향성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즉 똑똑해 보이고 싶어하기에 인용하는 것이란 이야기다.
 
인간은 왜 어두운 골목길의 소음인가?
ㅡ사회 속의 존재들은 빛, 올바른 이해를 원치 않기에 어두운 공간에 있는 존재다.
ㅡ게다가 그들의 이야기는 올바른 이해가 아니므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소음이다.
ㅡ이러한 특징들을 조합하여 어두운 골목기르이 소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골목길이 언급되는 이유는 대로에서 취급되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간이 차라투스트라의 뒤에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할까?
ㅡ차라투스트라가 이제 인간에 대해 무관심해졌다는 것으로 보인다.
 
왜 최대의 위험은 보살핌과 동정 속에 있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앎을 나눈 것은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살피고자 해서, 동정해서 그렇다.
ㅡ그러나 이에 따른 결과는 차라투스트라를 절망에 빠뜨렸었다.
 
억압된 진리와 바보의 손과 바보가 된 심장은 뭘 말하나? 왜 이것들과 동정으로 인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나?
ㅡ억압된 진리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ㅡ즉 그릇된 이해를 나타내는 것 같다.
 
ㅡ바보의 손은 바보 같은 행위를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바보가 된 심장은 우둔한 감정을 갖는 걸 표현하는 걸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도우려고 했고, 그 돕는 방식이 바로 올바른 이해를 나누는 것이었다.
ㅡ이런 이해를 나누려면,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 부조리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견디면서 지내야 했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부조리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견디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봤지만, 이는 현재에 이르러 무의미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저때 당시 자신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ㅡ즉 상황을 냉정하게 올바르게 보지 않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며 사람들 곁에서 노력을 해왔단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장하고 있을 때, 자신에게 “사람을 잘 모른다”고 타일렀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올바른 이해를 나누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에 미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ㅡ이러한 모습에 실망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초기에는 투자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좀 더 기다리면 자신의 말에 따를 것”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ㅡ이를 표현한 것 같다.
 
사람들에게 많은 전경이 있는 것과 멀리 보는 먼 곳을 갈망하는 눈은 왜 언급되나?
ㅡ사람들이 갖는 전경은 저마다의 인생의 목표/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런 것이 있는 상태에서 인생의 목표를 이상 사회로 바꾸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그다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사람들이 오해해도 사람들을 감쌌나?
ㅡ후술되지만, 오해하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준 것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 1권 17장」
     그대는 말해야 한다.
     "어찌 너희가 나를 정의롭게 대하겠는가!
      나는 너희의 불의를 내 몫으로 선택하는 바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는데 익숙한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정의는 자신에게만 엄격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1권 19장」
     나는 그대들의 냉혹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대들 판관의 눈에는 늘 사형집행인과 그 냉혹한 칼날이 번뜩인다.
 
     말하라. 주시하는 눈을 지닌 사랑인 정의는 어디 있는가?
     모든 벌 뿐만 아니라 모든 죄까지도 짊어지는 그런 사랑을 창출해다오!
     판관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무죄선고를 하는 그런 정의를 창출해 다오!
 
왜 차라투스트라는 왜소한 것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미숙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의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ㅡ이를 긍지로 표현한 것이 「차라투스트라, 1권 12장」에서 나온다.
     나는 독파리들에 지쳐버린 그대를,
     백 군데나 쏘여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그대를 보고 있다.
     그렇게 되어 있으면서도 그대의 긍지는 화 한 번을 내려 하지 않는구나.
 
선한 자 틈에 사는 자에게 왜 동정은 거짓말을 가르치나? 왜 동정은 자유로운 영혼의 대기를 음습하게 만드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선한 자는 차라투스트라를 맹렬히 공격하는 독파리를 말한다.
ㅡ그러므로 선한 자 틈에 산다는 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걸 말한다.
ㅡ즉 사회 속에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동정심에 의해서 그릇된 이해를 올바른 이해로 여기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이러한 선한 자 틈에 있는 존재이므로, 차라투스트라의 동정심이 그릇된 걸 올바른 걸로 착각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때 착각하는 것은 저 사람들에게 노력하면 변화할 것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노력했다가, 차라투스트라는 좌절한다.
ㅡ이로 인해서 자유로운 영혼인 차라투스트라가 활달해지지 않는, 의욕을 잃는 상태가 되는데, 이를 대기가 음습해진다고 표현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을 알아차렸다고 한 것은 왜 동정에서 나온 거짓말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받으면 삶을 긍정하고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ㅡ이게 바로 사회 속 사람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오판, 그릇된 이해였다.
ㅡ이것을 말하고 있다.
 
경직된 현자와 무덤 파는 자는 무얼 말하나?
ㅡ경직된 현자는 교리를 따르는 학자를 말한다.
ㅡ이들은 책에서 배운 것만을 말할 수 있다.
 
ㅡ무덤파는 자는 둘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염세주의자고 하나는 저승을 긍정하는 자다.
 
왜 무덤파는 자들은 질병을 파내나? 그들은 무슨 병에 걸리게 하나?
ㅡ염세주의자나 저승을 긍정하는 자는 모두 현생에서의 삶을 덧없게 만든다.
ㅡ이로 인해서 현생은 노력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이로써 사회는 부조리가 판을 치게 된다.
ㅡ따라서 무기력이나 절망을 사람들이 달고 살게 만든다.
 
인간 존재가 내뿜는 악취는 무얼 말하나?
ㅡ사회 속 사람들이 갖는 자극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이상한 말들을 말한다.
ㅡ궤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듣고 있을 수 없단 이야기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건강하라’는 이야기를 할까?
ㅡ차라투스트라는 홀로 지내다가 앎을 나누려고 사람들에게로 갔다.
ㅡ이에 따라 일련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경험 속에서 차라투스트라가 결론으로 내린 것은 개인의 내적 건강이라고 보인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적 건강함을 추구하라는 의미에서 저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