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2장 의역 (완) (서판 1/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7. 21. 23:14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2장 서판 -1-


         
12장 1~10절 개괄

 

 

12장은 30절로 구성되며, 각각의 내용들이 이어지면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1절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의 심경을 나타낸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만나 자신이 아는 것을 전해주고 싶어한다.

이때 조건이 있는데,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그러한 때가 아니라고 보이기에, 차라투스트라는 혼자 이야기를 한다.

 

2절의 경우, 사회적 규율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정확히는 그 이유를 언급하지 않지만, 선악이나 세상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갖추지 않은 존재들이 만든 규율이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자들만이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상적인 곳이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나열한다.

 

3절의 경우, 이상적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 부조리한 현생에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이상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와 본성을 인정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4절의 경우,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삶의 기준을 사회나 이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두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생길 문제들 때문에 겁먹지 말라고 한다.

실제로 사회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생각보다 보복당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겁먹지 말고,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고 살피는 존재가 되라고 말한다.

 

5절의 경우, 올바른 이해를 가질 재능을 갖춘 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능력에 따라서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6장」에서 판관들에게 하는 이야기와 관련된다.

또 자신이 고귀한 영혼을 지녔는지 판단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찾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6절의 경우, 이상 사회보다 먼저 태어났기에 희생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같은 이가 이상 사회를 위해서 희생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 더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상적 존재로서는 부조리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본인을 이상적 존재라고 말하지 않고, 이상 사회의 예지자라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절의 경우, 진실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회적으로 선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며, 정신이 병든 자들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진실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악하다고 여겨진다는 점, 그리고 사회적 악을 단순히 하나만 지닌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지닌다는 점을 말한다.

 

8절의 경우, 고정된 가치관을 따르는 것을 비판한다.

고정된 가치관을 따르는 건 대체로 억압이 강할 때 그러한데, 차라투스트라는 고정된 가치는 없고, 사태의 흐름 속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제의 선이 오늘의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9절의 경우, 기존 사회적 규율들이 올바른 이해에 근거하지 않고 망상에 근거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규율들은 제대로 된 규율이 아니라고 말한다.

 

10절의 경우, 사회적 규율이 가진 악함을 지적한다.

사회적 규율은 도둑질하거나 살인하는 악한 규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둑질과 살인이 개인에게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을 착취하고 사회를 위해 희생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본문

 

 

-1-

 

저는 그릇된 사회적 규율들을 비판하고, 또 올바른 새로운 규율들을 고안하면서,

제가 다시 사람들에게 나설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앎*을 나누기 위해 다시 사람들에게 나아가고 싶은데,

과연 그럴 기회가 언제 올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문제에서 앎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이 앎을 나누고자 한다.

 

사람들에게 다시 나아갈 때에는 제 멋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저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고도 만족하며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는 저는 혼자 말합니다.

아무도 제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니, 제가 제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새로운 규율 서판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그릇된 서판을 부수고, 새로운 서판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2-

 

제가 사람들에게 갔었을 때, 그들은 낡은 규율을 중심으로, 선과 악에 대해서 잘 아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선과 악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피곤한 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마음 편하게 잠들고 싶어하던 이들은 잠들기 전 사회적 선악을 떠올리며 자신을 진정시키고 잠들었습니다.

 

저는 잠드는 자를 향해 이렇게 외치며, 잠드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당신은 모릅니다.

오직 스스로 가치를 창조자하는 자만이 선과 악에 대해서 아니까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창조자는

현생에서의 삶의 목표를 잃은 사람들 다시 부여해주고

현생을 더 이상 헛되게 여기지 않게 하며,

희망 찬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처음으로 선과 악을 창조해냈었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회적 규율을 뒤엎으라고,

사회에서 위대하다 하는 자들, 덕을 지녔다고 칭송받고 덕을 찬양하고 세상을 구원한다고 하는 자들을 비웃으라고,

현생과 삶을 부정하는 음울한 현자들도 비웃으라고 말입니다.

 

저는 죽음을 찬양하는 이들 곁에 앉아서, 그들의 모든 과거와 영광의 그릇됨을 비웃었습니다.

 

정말로 저는 저들이 위대하다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하찮은 모습들을 보고,

참회를 바라는 설교자처럼 어리석은 자처럼 탄식하며 외쳤습니다.

“이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위대하지 않은 것이고,

이들이 가장 악하다고 말하는 것도 실제로 악한 것이 아니다!”

 

저의 올바름에 대한 갈망이 이렇게 외치고 웃었던 것입니다.

고독 속에서 거듭난 올바름에 대한 갈망 말입니다.

 

이 올바름에 대한 갈망은 저를 성장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올바른 이해가 주는 황홀경을 느끼며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꿈을 꿔 본적도 없는 미래의 이상 사회로,

어느 창조자가 상상했던 것보다 올바름이 가득한 곳으로,

이상적인 존재들이 올바름에 따라 행동할 수 있고, 올바름을 따르는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하지만 저는 올바른 것을 사람들에게 숨겨야만, 비유적으로 말해야만 합니다.

올바른 것을 가짐에도 드러낼 수 없고, 숨기며 다녀야 한다는 것,

이건 제게 수치스럽게 느껴집니다.

 

모든 존재들이 이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는 부조리와 그릇됨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기차게 되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곳에서,

 

많은 이상적인 존재들이 영원히 서로에게 도망치고, 그럼에도 다시 찾는 곳에서,

이상적인 존재들이 서로 충돌하고, 다시 서로에게 귀 기울이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곳*에서,

*이상적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상적인 존재들은 이상적 미래를 동경하지만, 또 이상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이 고단하여 도망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시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시간이 이상이 펼쳐지는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여지는 곳에서,

현상 속에 숨겨진 필연/진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곳*에서,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색하던 곳에서,

*올바른 이해가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상적 미래에서는 올바른 이해가 즐비할 것이므로, 이상적 미래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규율이 고안한 것들, 강제/규율/필요/목적에 대한 의식*/선악에 대해서 다시 고찰하고 의미를 재정립했던 곳에서 말입니다.

*개인 자신보다 사회를 우선하라는 목적을 말한다.

 

이런 곳에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 자를 위해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가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저 멀리 나아가는 화살

화살은 이상 사회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다.


 

-3-

 

부조리한 현생이지만, 이 현생은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부조리한 현생 속에서 저는 초인이라는 개념을 고안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제 삶이 저무는 시점에, 새로운 올바름 추구자가 나타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신을 찬양하게끔 해주던 곳도 현생이었습니다.

 

이상 사회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설파해야 할 필요를 느낀 곳도 현생이었으며,

제가 사람들에게 설파한 앎을 습득한 곳도 현생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고도 행복하게 잠들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현생에 대한 희망을 펼쳐 보인 것이죠.

 

저는 사람들에게 제가 알게 된 모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에게서 파편적이고 수수께끼로 여겨지는 우연적인 것을 하나의 필연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말입니다.

*올바르게 현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한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존 사회적 가치와 규율에 따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 있는 그대로를 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시인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자 우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속에서 필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자로서,

저는 사람들에게 이상 사회를 그리고 나아가라고,

이미 존재했던 그릇된 것들이 의미 있게 되려면, 우리가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여 올바른 것을 찾아가야 한다고,

그래야 그릇된 과거가 무의미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과거의 경험에 대해서 단순히 “그땐 어쩔 수 없었지”가 아니라, “그래, 내가 그걸 원했었지.” 라고 의식하는 것,

이처럼 과거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저는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제 저는 제 자신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가고 싶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저는 제가 가진 가장 풍요로운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저는 태양으로부터 배웠습니다.

태양은 저물 때에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바다에 뿌리니까요.

그래서 가장 가난한 어부도 태양 빛에 의해 아름다운 존재로 보이게 되는 것이죠.

저는 예전에 이런 광경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습니다.

 

저도 이 태양처럼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는 여기서 앉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릇된 규율은 부수고, 새로운 올바른 규율들을 주위에 두고 말입니다.

 

바다 위의 저녁 노을

차라투스트라는 저녁 노을 처럼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앎을 전해주고자 한다.

 


 

-4-

 

여기 새로운 올바른 규율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저와 함께 세상에 옮길 형제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상 사회 속 존재들을 향한 제 사랑은 이렇게 외칩니다.

    “이웃과 사회를 삶의 중심으로 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의식을 우리는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런 의식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이 점을 유의하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특정한 방법을 통해 '손쉽게 인간이 현명해질 수 있다, 성숙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죠.

 

이웃들 속에서 머무려는 자신을 극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권리는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아무도 당신에게 뭐라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염두하는 사회적 보복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행동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이끌 수 없다면,

그러한 자는 사회나 타인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 자신에게 명령하는 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명령은 건전하지 못하여, 복종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은 명령인 경우가 많습니다.

 

작업중인 석공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삶에 중심으로 두고, 건강하게 자기 사랑을 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규율이 담긴 서판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다.


 

-5-

 

고귀한 영혼은 아무것도 거저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귀함이라는 속성에 어떻게 보답하며 살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하찮은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이용만 하려고 할 뿐이죠.

 

이런 말이야 말로 고귀한 말입니다.

     “운명이 우리에게 준 혜택*을 살아가면서 잘 지키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좋은 부모, 풍족한 경제적 상황, 좋은 교우 관계, 올바른 성향이나 취향 등을 말한다.

이런 것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운명이 우리에게 준 혜택이란 것이다.

왜냐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자는 즐길 것이 없는 무료한 상황에서 억지로 즐거움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이 즐길 게 없다면, 거기서 그는 어떤 기대도 바람도 갖지 않고, 지나치거나 그 무료함을 참고 견딥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이 고귀한 영혼인지 알고 싶어서,

자신이 순수한지 즐기는 존재인지 살피려고 하고,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는 순수하지도 즐기지도 못하게 될 겁니다.

의식하는 순간 순수함과 즐거움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고귀한 영혼이 되고 싶고, 고귀한 영혼이 되려고 노력하고 싶다면, 자신의 죄와 고통을 찾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운명에 감사하는 사람

고상한 사람은 자신에게 재능과 혜택을 준 운명에 감사하며, 그 운명에 걸맞는 보답을 세상에 하고자 한다.


 

-6-

 

형제들이여, 자신들의 시대보다 먼저 태어난 자는 항상 희생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대*보다 먼저 태어난 자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부조리한 이 사회에서 부조리를 공고히 하기 위한 희생양이 됩니다.

*이상적인 미래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이상적 미래에 맞는 존재인데, 아직 이상적 미래가 오기 전에 세상에 놓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젊어서 아직 이상을 쫓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규율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극하죠.

 

우리 안에도 규율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전한 이상 사회의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니 이상 사회를 위해서 노력하다 희생될 수밖에 없겠죠.

 

이상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 이것이 우리 형제들의 본성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선구자들

이들은 개척자이고, 개척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뒤이어 나타나는 자들이 좀 더 나은 개척을 할 수 있게끔 길을 닦아 놓는다.


 

-7-

 

이 세상에 진실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진실할 수 있더라도 진실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사회적으로 선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진실한 모습을 보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이들은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선한 것은 정신에 있어서 좋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들은 양보하고 굴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자기 주관이란 것이 없으며, 주변에 따라 동조하고, 주변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 규율에 복종하고 따르는 사람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 되려면,

사회적 규율이 악하다고 하는 모든 것이 모여야만 합니다.

일부만 모여선 이 사람은 진리를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진리를 따를 만큼 충분히 악한지요?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것들의 맹목성을 지겨워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것들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것들을 의심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것들이 옳은지 검토하는 일에 도전하고,

당장의 지배적인 사회적 것들을 비판하는 것.

 

어째서 이런 것들은 좀처럼 한데 모이기 힘든 것인지….

 

이런 성향이 있어야, 올바른 이해를 갖출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은 이와 같은 의심과 모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자들이여,

의심하고 파헤쳐서 올바른 것을 찾아내길 바랍니다.

 

호기심에 따라 파헤치는 자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관습이나 상식을 의심하고 파헤치고

그리고 결국에 그릇되다면 비판할 줄 알아야

올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8-

 

변화가 가득한 세상에서 고정된 규율이 지배를 하고 있다면,

고정된 가치가 없다는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고정된 가치를 따르고 살고 있으니까요.

 

어리석은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치가 변화한다고?

     여기 오래토록 이어져 온 이 가치는 무엇인가?

     이 사회에서 사물의 가치, 개념, 선악은 고정되어져 있다.”

 

규율을 강조하는 순간이 오면, 가장 지혜로운 자들도 변화를 부정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야 하지 않나?”

 

     “모든 것은 고정되어져 있다.”

이것이 사회의 가르침이고, 이를 통해서 개인의 정신은 불모의 땅이 되어 올바른 생각이 자라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자들과 향락을 쫓는 자들에게 훌륭한 위안이 되는 것이죠.

 

이에 반해서,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자들은 고정된 가치를 부정*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황소와 비슷합니다.

밭을 가는 황소가 아니라 이리 저리 날뛰며 부수는 황소 말입니다.

그렇게 이들은 사회적 규율을 부수려고 합니다.

*사회는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위해서 고정된 가치에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야 변화가 적고, 그래야 사회가 안정을 이루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은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순간순간의 올바름을 쫓게 된다.

이때의 올바름은 각 입맛에 맞는 올바름이 아니라,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나타나는 올바름을 말한다.

그래서 맥락을 중시하게 되는데, 이는 맥락마다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에, 변칙적이게 되어서 사회의 안정을 헤치게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변칙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문제되지 않기에, 이상 사회는 이런 변칙성을 중시하는 사회가 된다.

 

그리하면 이제 받아들이겠죠.

모든 가치는 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요.

어제의 선이 오늘도 선일 수 없다는 것을요.

누가 아직도 고정된 선악 관념을 따르고 있단 말입니까?

 

이제 사회적 규율이 무너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이자 축복이죠.

형제들이여, 이를 전파해주시기 바랍니다.

 

얼어붙은 강 위의 기둥

모든 것은 사태의 흐름 속에서 가치가 달라지지만, 사회나 종교는 절대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이를 통해서 점차 부조리를 낳게 된다.


 

-9-

 

이 사회에는 선악과 같은 잘못된 규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이 고안한 것이죠.

 

한때 사람들은 이처럼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규율에 따르는 것이 운명인 것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믿었죠.

 

그러다 점차 사람들은 그릇된 이해를 가진 이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규율을 벗어나서,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미래에 대해서, 현생에 대해서 망상만 있었을 뿐,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생과 미래를 말하며 나타난 ‘선악’과 같은 규율 역시 지금까지는 망상일 뿐, 제대로 된 규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점성술사들

이 신미주의자들은 이 세상 너머의 세상, 내세와 신을 상상하였고,

이것이 종교로 발달하여 사람들을 억압하는 장치가 된다.


 

-10-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규율들을 한때는 신성하다고 하며 따랐습니다.

 

하지만 저 신성한 규율들, 저 규율들 보다 더 고약한 도둑이자 살인자가 어딨습니까?

저 규율들은 개인의 정신을 빼앗고 죽이지 않습니까?

 

또 애초에 <생명>이란 것은 다른 생명을 빼앗고 희생시키는 것 아닙니까?

저 규율은 그릇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신성한 규율들로 인하여, 올바른 이해는 가질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빼앗고 죽이는 생명'이 '빼앗지도 죽이지도 못하게' 하고 이것을 신성하다고 부른다면,

이는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에 대한 설교 아닙니까?

 

형제들이여, 이 낡은 규율을 부숴주시기 바랍니다.

신성한 규율과 고난

신성한 규율은 올바른 것을 제공하는 양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만,

이 규율로 인해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자기를 희생하게 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가 기다리는 시간은 무슨 시간인가?

ㅡ사람들에게 나아갈 시간을 말한다.

 

낡아 부서진 서판과 새롭게 반쯤 쓰인 서판은 뭘 말하나?

ㅡ서판은 규율을 적는 곳으로, 낡아 부서졌다는 것은 기존 사회적 규율을 말하는데, 차라투스트라가 이를 부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새롭게 쓰인 서판은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써낸 규율로, 이상적 규율을 말한다.

ㅡ이러한 점으로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서판을 부수기는 하지만, 새로운 서판을 써내는, 새로운 규율을 제공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왜 비둘기 떼를 거느린 웃는 사자가 나타나야 차라투스트라는 등장하나?

ㅡ사자는 차라투스트라를 말한다.

ㅡ앞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나아갔다가 실망하여 현재 고독 속에 있다.

ㅡ그때 실망한 이유는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ㅡ현재 문구를 보면, 사자는 웃고 있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만족함을 나타낸다.

ㅡ그리고 그 웃는 상황이 비둘기 떼, 즉 대중들을 거느리면서 웃고 있는 상황이기에, 사자가 웃는 것은 대중들로부터 만족하여 웃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는 시점에 내려가려고 하는 모양새로 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덕에 대해 계속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일체를 진부하고 싫증나는 일로 여기나?

ㅡ사람들은 이미 형성된 기존의 덕이 있으므로, 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보다 따르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잠을 잘 자기를 원했던 자는 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선과 악에 대해서 말하나?

ㅡ맘 편하게 자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가 납득되어야 하는데, 그때 사회적 선악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검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창조자가 아니고선 누구도 선악을 알지 못한다고 하나?

ㅡ창조자는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고 파악하는 사람을 말한다.

ㅡ이러한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고안하게 된다.

ㅡ이때 창조자들은 미래의 이상 사회를 염두하면서 선악을 고안하게 된다.

 

음울한 현자는 무얼 말하나? 검은 허수아비가 되어 생명 나무 위에 자리잡고 경고를 해대는 자들은 누굴 말하나?

ㅡ음울한 현자라는 것은 우울하고 음침한 존재를 말하는데, 이들은 현생에 대해서 절망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생명 나무 위에 자리잡은 검은 허수아비 역시도 삶/생명을 긍정하지 못하는 존재로 보인다.

ㅡ따라서 이 두 존재는 같은 특징을 지니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며, 삶에 대해서 허망함을 느끼고 열의를 갖지 못하는 존재들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무덤길에서 썩은 고기와 독수리 틈에 있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자들 사이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저들의 최선과 최악을 왜소하다고 말하나?

ㅡ사람들이 말하는 최선과 최악은 모두 그릇된 이해에 기반하였고, 그래서 하찮고 미숙한 것으로 취급된다.

ㅡ이와 관련해서 언급된 것 중 하나가 「차라투스트라, 3권 10장」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서 말하는 세 가지 악, 이기심, 성욕, 지배욕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차라투스트라가 가진 위대한 동경은 무얼 말하나?

ㅡ올바름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 수 있다.

ㅡ올바름에 대해 동경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인식을 얻고, 이를 통해서 이상사회를 그리게 되었던 것이다.

 

뜨거운 남녘은 무얼 말하나?

ㅡ태양이 강하게 비추는 곳을 말한다.

ㅡ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올바른 이해가 가득한 이상 사회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신들이 왜 옷가지 전부를 수치스러워하나?

ㅡ신들은 이상적인 모습을 한 존재를 말하는데, 올바른 사회라면 이상적인 모습을 보려고 안달할 것이다.

ㅡ그렇기에 신들의 모습을 숨기지 말고 보여달라고 하며, 숨기는 것이 되려 이상한 일이 된다.

ㅡ그런 점에서 신들이 옷가지를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을 가리는 모습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더듬거리며 시인처럼 말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말을 시인처럼 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ㅡ이는 사람들의 눈치를 봐서 그런 것인데, 만약 이상 사회였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빙빙 돌려가며 말하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올바른 이해를 감춰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좋지 못하다고 여겼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체의 생성이 신들의 춤과 자유분방으로 여겨지는 곳이란 뭘 말하나?

ㅡ여기서 일체의 생성은 일체의 생성되어지는 모든 걸 말한다.

ㅡ생성되어지는 모든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걸 말한다.

ㅡ왜냐면 이 세계는 생성 소멸의 세계고, 생성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현재 언급되는 장소는 생성되는 모든 것이 신적인 춤과 자유분방함을 지닌다는 것인데, 이는 모든 것이 신적인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ㅡ즉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ㅡ따라서 모든 것이 이상적인 곳을 말하며, 이는 이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신들이 영원히 서로에게서 벗어나 달아나고, 다시 찾고, 행복하게 서로 반박하고, 다시 서로 귀 기울이며 하나가 되는 곳은 무얼 말하나?

ㅡ여기서 수많은 신들은 이상적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올바른 이해를 갖추던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적인 존재들은 자신보다 앞서 살다가 죽었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적 존재를 찾지만, 이상적 존재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ㅡ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남에 따라 서로 마주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ㅡ이 이상적 존재들은 서로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 책을 통해서 비판하고 반박하는 모양을 띈다.

ㅡ그렇게 책을 통해 공부하고, 앎을 발달시키면서 결국 올바른 이해를 형성하게 되고, 이는 이상적 사회에서 용인될 관점이 된다.

ㅡ즉, 이상 사회로 나아가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ㅡ과거의 사람에게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후대의 사람이 그것을 통해서 성장한다면, 그 오류도 올바름에 공헌한 바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ㅡ따라서 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존재들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결국 하나의 결과물을 내놓는데, 이러한 결과물이 자리하는 곳이 바로 이상 사회라 할 수 있고, 이러한 특징을 차라투스트라가 서술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시간이 왜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순간에 대한 복된 조롱으로 여겨지나?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모든 시간은 이상 사회에 도달하는 순간을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현재의 순간이 부조리한 것은 이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며, 안타깝긴 하지만 필요한 순간으로 여겨진다.

ㅡ이처럼 안타까우면서도 좋지 못하다 보니, 그 처지가 이상 사회가 도래한 순간 시점으로 볼 때 안타까이 여겨져 조롱 받는 느낌이 날 수 있다.

 

자유의 가시를 가지고 행복하게 놀았던 필연이 자유 그 자체였던 곳은 무얼 말하나?

ㅡ우리가 마주하는 현상의 인과를 알지 못한다면, 세상은 우연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ㅡ반면에 현상의 인과를 안다면, 세상은 필연의 연속으로 볼 수 있게 된다.

 

ㅡ이런 의미에서 우연과 필연을 바라본다면, 탐구자들은 현상의 필연성을 밝히는 작업을 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런데 문제는 사회적/종교적 규율들을 보게 되면, 선악이나 저승, 신 등의 개념이 필연적 개념이 아니라 우연에 대한 망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ㅡ하지만 이러한 우연에 대한 망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서 필연에 대한 주장은 묵살되거나 은폐되고 만다.

ㅡ그러므로 필연은 제한된 환경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ㅡ그런데 현재 언급되는 곳은 필연이 자유 그 자체로 있던 곳을 말한다.

ㅡ이는 곧 필연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 올바른 이해를 말해도 되는 곳이 된다고 할 수 있다.

 

ㅡ그렇다면 자유의 가시는 무엇일까?

ㅡ자유의 가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방종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필연을 파악하려면, 사회적 규율이나 상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ㅡ그런데 그렇게 되면, 방종할 수도 있다.

ㅡ그러면 되려 필연을 찾기보다는 이상한 궤변으로 뻗어 나갈 수 있게 된다.

ㅡ그리고 그런 경우 행복하기보다 불행해지거나 염세적이게 된다.

ㅡ따라서 자유의 가시인 방종에 위협받지 않고 논 필연,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색된 필연을 말하는 걸로 보여진다.

 

차라투스트라가 중력의 정신이 창조한 것들을 다시 발견했던 곳은 어디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현생에서 논하는 선악이나 규율들의 의미를 이상 사회를 기준으로 고찰하면서 재평가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차라투스트라, 3권 10장」에서 언급된다.

ㅡ그러므로, 이곳 역시 이상 사회로 볼 수 있다.

 

왜 거기에는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 춤추고 저편으로 건너가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거기란 이상 사회를 말한다.

ㅡ또 이런 것들은 사회적 규율과 그에 따른 문화를 말한다.

ㅡ즉 이상 사회에는 사회적 규율과 그 문화를 뛰어 넘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냐고 묻는 것이다.

 

가벼운 자를 위해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들이 있어야만 하냐고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가벼운 자는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자, 자유로운 의식을 지닌 자라고 한다면,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는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고 따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러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난 자를 위해서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그렇다면 왜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자가 있어야 할까?

ㅡ이는 사회적 규율에 순응하는 자, 즉 부조리를 행하는 자가 없으면,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도 생기기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즉 이러한 자들이 있기에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 이상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으로 보이는 것이다.

 

위버멘쉬라는 말을 습득한 곳,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걸 습득한 곳은 어디인가?

ㅡ인간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부조리한 현생을 보면서 나타난다.

ㅡ이를 통해서 위버멘쉬 개념도 도출되는 것이기에, 부조리한 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건 뭘 말하나?

ㅡ이는 인간이 이상적 존재가 되는 것을 목적해선 안 되고,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다리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이는 이상 사회를 위한 희생과 노력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이상적 존재가 되려고 하는 과정에는 좋은 것만을 취하려고 하는 편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현생에서 자주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이상적 존재를 목적하지 말고 이상 사회를 이루기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침놀에 이르는 길이란 건 뭘 말하나? 자신의 정오와 저녁 덕택에 스스로를 찬양한다는 것을 습득한 곳은 어떤 곳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태양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이라는 태양이 지면, 자신 대신 새로 세상을 비춰줄 존재, 새로운 아침놀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ㅡ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 새로운 존재,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 앎을 사람들에게 설파하게 된다.

ㅡ이것을 아침놀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ㅡ그런데 이 아침놀, 새로운 후계자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언제 나타나냐면, 자신의 정오와 저녁이다.

ㅡ왜냐면 자신이 이토록 고독 속에서 연구하고 탐구한 것을 홀로 간직한 채 죽기에는 아쉽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후계자를 두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 필요를 느끼는 곳이 바로 현생이다.

ㅡ따라서 결국 언급되는 장소는 현재의 사회, 현재의 부조리한 사회인 것이다.

 

위대한 정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습득한 곳은 어디인가? 두번째 자줏빛 저녁놀처럼 사람들 위에 내걸었던 것을 습득한 곳은 어디인가?

ㅡ위대한 정오는 올바른 이해를 갖춘 시점을 말하고, 이후부터는 해가 지므로,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나누게 된다.

ㅡ이러한 것을 파악하게 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현생에서 인간이 죽음을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사람들 위에 내걸었던 것 역시 올바른 이해인데, 마찬가지로 이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된 곳은 부조리한 현생이다.

 

새로운 밤과 새로운 별은 무얼 말하나?

ㅡ새로운 별의 경우,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며, 새로운 밤의 경우, 새로운 관점에서 사색하는 시간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따라서 기존 관습과 다르게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세상을 긍정하게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웃음을 구름과 낮과 밤 위에 펼쳐 놓았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이는 삶에 대한 긍정/희망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앞서, 새로운 별과 밤을 제공했기에, 사람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것, 파편이고 수수께끼이자 우연인 것을 하나로 압축하고 집약하는 것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므로, 사고하는 방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존재했던 것 전부를 창조를 통해 구원할 것을 가르친다는 건 뭘 말하나? “그랬었지”를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변모시키는 것은 왜 나오나? 왜 이것은 구원인가?

ㅡ사람이 내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ㅡ그래야 자신의 추악한 모습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그러기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과거의 과오를,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ㅡ그렇게 했을 때, 자신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모든 행동에 대해서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라고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ㅡ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성장할 수 있으므로, 구원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서판을 골짜기로, 살을 가진 심장 속으로 나를 형제를 찾는가?

ㅡ골짜기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고통을 주는 곳, 사회라고 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가진 서판은 이상적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서판인데, 이것을 같이 사람들에게 설파할 사람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살을 가진 심장이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중들 군중들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웃을 보살피지 말라고 하나?

ㅡ이웃을 보살피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ㅡ그러지 않으면, 이웃을 위해 희생하다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잃게 된다.

 

포센라이서만이 인간을 뛰어넘어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데, 뭘 말하나?

ㅡ포센라이서는 지적 허영심에 깃든 자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ㅡ이들은 성숙한 존재로서의 혜택을 누리고자 한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데, 이에 따라서 시도하는 자들을 앞장 서서 괴롭히는 모습을 보인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 서문 6장」에서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려 시도하는 자를 위협하고 떨어트리는 것이다.

ㅡ이러한 모습들로 볼 때, 포센라이서는 진득이 노력하기 보다는 요행을 통해서 성장하길 바라는 존재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ㅡ이런 모습은 「차라투스트라, 1권 8장」에서도 언급된다.

     아, 나는 자신들의 최고 희망을 상실해버린 고귀한 자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저들은 높은 희망이라면 모두 비방을 해댔지.

     이후 저들은 짧은 쾌락에 빠져 뻔뻔하게 살았고, 일상의 삶 이상의 목표는 거의 세우지도

     못했다.

 

     저들은 '정신 또한 쾌락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저들의 정신의 날개는 부러지고 말았지.

     이제 저들의 정신은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이것 저것 갉아먹으면서 더러워지고 있다.

 

ㅡ해당 구절에 대하여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앞서 극복에 대해서 언급하므로, 포센라이서는 인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ㅡ즉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은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성숙에 이르는 과정에서 비춰볼 때, 부적절하다.

ㅡ따라서, 이 구절은 포센라이서들이 인간의 성장과 관련하여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구절로 보인다.

 

네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네게 주도록 놔두지 말라는 건 뭘 말하나?

ㅡ이 구절은 “너가 빼앗아야 얻을 수 있는 권리를 사람들이 네게 줄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즉 스스로 얻으려고 해야 얻을 수 있는 권리인데, 기다리고 있으면 바보 같으니,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지 말란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ㅡ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알기가 어렵다.

 

네가 했던 행위를 누구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 되갚음이란 없다는 것을 왜 말하나?

ㅡ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날 때, 벗어남에 따른 피해와 복수를 염두하게 되는데, 이를 염두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자신에게 명령할 수 없는 자는 왜 복종해야 하나?

ㅡ삶을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규율/가치관을 지녀야 하고, 이게 없다면 혼란과 방황을 하게 된다.

ㅡ따라서 자기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타인의 규율을 차용해야 한다.

ㅡ그런데, 스스로 만들 수 없다면, 타인의 규율을 차용해야 하고, 이는 곧 이러한 규율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이 구절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 자는 많지만, 복종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하나?

ㅡ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규율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ㅡ문제는 자신만의 규율을 가지기는 했지만, 자기 스스로도 납득이 어려운 규율들을 지닌 것이다.

ㅡ그렇기에 자신이 세운 규율에 따라 행동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고귀한 영혼은 왜 거저 얻으려 하지 않는가? 왜 고귀한 부류는 삶에 보답하려고 숙고하나?

ㅡ고귀한 영혼은 자신이 고귀한 영혼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지닌다는 이야기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6장」의 구절과 관련된다.

     그대들이 죽이는 자와 그대들이 화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대들의 슬픔이 위버멘쉬에 대한 사랑이 되도록 하라.

     그렇게 그대들의 '여전히 살아있음'을 정당화하도록 하라!

ㅡ이 구절처럼 자신의 존재 이유, 자신이 고귀한 이유에 대한 마땅한 행동을 해야하는 것이다.

ㅡ하지만 천민 부류는 이러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ㅡ즉 삶에서 자기가 누리는 혜택을 남에게 베풀면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재능을 가진 자는 사람들도 그 재능에 혜택을 보게끔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ㅡ그래서 “삶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 바로 그것을 삶에게 지키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고귀한 자들은 삶이 약속한 것을 삶에게 지키고자 하나?

ㅡ고귀한 자들이 재능을 가진 자라고 한다면, 삶은 이들에게 재능을 약속했다.

ㅡ그렇다면 이들에게 삶은 왜 재능을 주었는지를 따지게 될 텐데, 이때, 삶이 이 재능을 준 것은 이 재능을 통해서 세상에 이바지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ㅡ그러면 고귀한 자들은 이러한 삶의 조건에 대해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될 수 있다.

 

즐길 것을 주지 못한 곳에서 즐기려고 하면 안 되고, 즐기기를 원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즐길 것을 주지 못한 곳에서 즐기려고 하면, 즐길 것을 억지로 찾아 즐긴다는 게 된다.

ㅡ그런 경우, 상황에 맞지 않는 즐김을 하는 모양새, 즐기지 말아야 할 것을 즐기는 모양새가 될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즐길 게 없다면, 그냥 즐기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또한 즐길 게 없는데 즐기기를 원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하다고 보는 것 같다.

 

즐김과 무죄는 왜 부끄럼을 많이 탄다고 하나? 왜 즐김과 무죄는 사람들이 찾지 않기를, 갖추고 있기를 바라나? 왜 사람들이 찾아야만 하는 것은 죄와 고통인가?

ㅡ여기서 무죄는 순수로 바꾸어서 보자.

ㅡ그러면 즐김과 순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는 이야기다.

ㅡ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면 숨어버리는 특징을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 보면, 즐김과 순수함은 의식하고 하려고 하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ㅡ따라서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다 보면 쾌감도 느끼고, 순수한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렇다면 왜 쾌감과 순수함을 사람들은 찾으려고 할까?

ㅡ그것은 고상한 존재이고 싶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고상한 존재의 조건으로 순수하게 즐기는 모습이 전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고상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순수하게 즐기는 모습을 따라하려는 듯하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에 대해서 살피며, “순수하게 즐기는 것은 너희가 따라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니, 포기하라”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ㅡ그리고 순수한 모습, 즐기는 모습을 따라하는 노력을 할 바엔, 차라리 자신의 잘못과 고통을 살피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를 살피는 게 의식적으로 고상해질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듯하다.

 

맏이는 왜 제물이 되나?

ㅡ여기서 맏이는 단순히 형제들 중 첫째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선구자를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선구자들은 초행길을 나서기에 위험이 도사리는 지역을 나아가게 되는데, 이를 묘사한 것 같다.

 

비밀 제단에서 피 흘리고, 우상들의 영광을 위해 불태워지고 구워지는 건 뭘 말하나?

ㅡ부조리한 사회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아직 젊다는 것은 늙은 혀를 자극하나?

ㅡ여기서 젊다는 것은 이상을 꿈꾼다는 것을 말한다.

ㅡ늙은 혀는 늙은이를 나타내는데, 이들은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도가 튼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런 면에서 이상을 말하는 젊은이들은 늙은이들이 보기에 탐탁치 못한 존재가 되고, 그러므로 자극받아 그들을 훈계하려고 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맏이인 우리 자신에게도 늙은 사제가 살고 있다고 말하나?

ㅡ현재 부조리한 사회에서 태어나는 경우, 부조리한 사회적 규율을 어릴 때 교육받게 된다.

ㅡ커서 우리가 사회적 규율에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미 교육을 받았기에, 그것의 흔적이 남아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ㅡ이러한 점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그리고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서, 이상 사회에 완전히 적합한 인물이 되지 못하므로, 이상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 외에는 별도의 방법이 없게 되는데, 이를 두고 맏이들이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선한 자들은 왜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선한 자는 사회적으로 선하다고 불리는 자들이고, 이들은 사회적 규율에 잘 따르는 자들이기에 사회에서 선하다고 인정받게 된다.

ㅡ결국 선한 자들은 사회적 규율에 잘 순응한 자인 것이다.

ㅡ사회적 규율은 애초에 사람들을 기만하여, 자기 행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진정한 행복이 사회를 중시하면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ㅡ이런 점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사회적 규율에 잘 순응한 자 역시도 이런 거짓말을 하는데 일조하기에, 차라투스트라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심장이 따라 말하고, 근본이 복종이란 것은 뭘 말하나?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인가?

ㅡ심장은 감정적인 영역을 말한다고 할 때, 따라 말한다는 것은 공감하거나 동정한다는 의미도 되고, 사회적 상식에 맞는 감정을 선보인다는 의미를 담을 수도 있다.

ㅡ근본이 복종이라는 것은 사회적 존재들의 성향 자체가 복종하는 성향이라는 걸 말하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이 아닌 사회나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따라서 자기 내면의 소리보다 사회나 타인을 중시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왜 하나의 진리가 탄생하려면, 악한 것이 모두 모여야 하나? 대담한 모험, 끈질긴 의심, 잔인한 부정, 싫증, 살아있는 것을 베어대기, 이런 것은 뭘 말하나? 왜 지금까지 진리는 이 같은 씨앗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ㅡ진리를 올바른 이해로 바꾼다면, 올바른 이해는 대담한 모험, 끈질긴 의심, 부정, 싫증 살아있는 것을 베어대는 것 속에서 나온다.

ㅡ대담한 모험이란, 금기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모험을 떠나는 것을 말하고, 이는 사회적 상식/규율을 넘어서는 걸 말한다.

ㅡ이는 다르게 보면 용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ㅡ다음으로, 끈질긴 의심은 사회적으로 의심하지 말라고 해도 의심을 하는 것을 말한다.

ㅡ이는 다르게 보면 집요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ㅡ다음으로 잔인한 부정은 사회적 규율을 수용하라고 해도 거부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ㅡ이는 다르게 보면 고집이나 줏대라고 할 수 있겠다.

 

ㅡ다음으로 싫증은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이는 취향에 맞지 않음을 말하는 것 같다.

 

ㅡ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것을 베어대기는 현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식이나 규율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는 용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런 것들이 모두 있어야 집요하게 탐구하면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일리가 있다고 보인다.

ㅡ대체로 시대적 상식을 초월한 지식들은 기존의 상식들에 의문을 가지고 파헤치면서 고안되고 개발된 것이니 말이다.

 

흐르는 물에 기둥이 세워지고 판자다리와 난간이 물살을 뛰어 넘는 건 뭘 말하나?

ㅡ사태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데, 기둥과 다리가 세워지면서 고정된 가치관들이 주어지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ㅡ즉 사태의 흐름 속에서 고정된 규율과 가치를 통해서 살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흐르는 물을 조련하는 겨울은 무얼 말하나?

ㅡ겨울은 고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흐름을 강제로 동결시키는 모습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ㅡ따라서 무지함을 말할 수도 있고, 고독을 말할 수도 있고, 정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폭압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정지해 있다는 것은 왜 불모의 시기에 좋고, 겨울잠 자는 자와 집에 처박혀 난로나 쬐는 자들에게 위안이 되나?

ㅡ모든 것은 정지한다는 것은 고정된 가치 속에서 모든 것들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ㅡ고정된 가치관 속에서 살게 되면, 계속해서 탐구하거나 사색할 이유가 사라진다.

ㅡ그에 따라서 정신에는 생각이 깃들 필요가 없고, 생각이 없는 정신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 불모의 시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ㅡ또한 겨울잠 잔다는 것도 생각없이 잔다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집에서 난로나 쬐는 자들의 경우, 앞서 「차라투스트라, 3권 10장」에서 유사 표현이 나왔는데, 이때 난로는 육욕을 통해서 삶의 의미/동력을 확보하는 것을 나타냈다.

     육욕: 잡것들에게는 그들을 불태워버리는, 천천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벌레 먹은 목재와 악취 나는 누더기 일체에게는 욕정에 불을 붙여 김을 내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난로다.

ㅡ이에 따라 본다면, 사회적 규율에 따르며 쾌락을 즐기는 존재를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선악이라는 망상은 왜 예언가와 점성술사의 둘레를 돌고 있나?

ㅡ선악이라는 개념은 저승을 긍정하는 자들로부터 확고하게 활용된다.

ㅡ그러므로 예언가와 점성술사는 천국이나 저승, 신을 예언하는 자이자 존재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는 저승을 긍정하는 신비주의자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언가와 점성술사를 믿었던 사람들은 왜 모든 걸 숙명이라고 하며, 하지 않을 수 없기에 해야 한다는 말을 믿었다고 하나?

ㅡ사람들이 저승과 신을 믿었기에, 그에 따른 규율들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을 묘사한 것 같다.

ㅡ당연히 저승과 신을 믿지 않게 되면, 이들이 말하던 규율을 벗어나서 원하는 것을 향해 가게 된다.

 

별들과 미래에 대해서 망상만 있다는 것은 뭘 말하나? 선과 악에 대한 것도 망상만 있을 뿐이란 건 뭘 말하나?

ㅡ별과 미래는 현재와 미래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미래에 대해서 현생에 대해서 망상만 있다는 걸 말한다.

ㅡ이는 곧 현생과 미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 잘못 그린 현생과 미래를 놓고 선악과 그와 관련된 규율들이 나타났으므로, 선악과 관련된 규율들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저 신성한 말보다 더 고약한 도둑이자 살인자가 어디있냐는 말은 뭘 말하나?

ㅡ신성한 말은 규율을 말한다.

ㅡ그런데 규율은 본디 사람들이 사색하거나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ㅡ어떻게 보면, 사색능력과 행복추구를 빼앗고, 그들을 절망 속에서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신성한 말, “도둑질 하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말은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이런 신성한 말은 죽음의 설교라고 칭해진다.

 

왜 신성한 말들로 인해서 진리 자체가 살해되는가?

ㅡ사회적 규율을 따르면서 사람들이 사색하지 않고, 그러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니, 올바른 이해인 진리는 사라지게 된다.

ㅡ이를 사회적 규율이 진리를 살해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