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3장 회복기
13장 개괄
13장은 영원회귀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운명을 향하려는 자신 안의 강한 의지에 의해서 다시금 운명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면서 12장까지 이 운명을 향하는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논하지 않다가 13장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언급하게 된다.
영원회귀의 경우, 영원한 반복을 통해서 차라투스트라가 운명을 긍정하는 내용을 담는다고 할 수 있는데, 14장에서도 언급이 되겠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는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을 위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의 운명에 고통받던 차라투스트라가 드디어 답을 찾은 것이고, 그 답을 도출하게 되는 배경이 영원회귀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을 구원할 답으로서 영원회귀를 떠올린 것인 셈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영원회귀는 인간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본문
-1-
동굴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차라투스트라는 악몽을 꾼 사람처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는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끔찍한 고함을 질러댔다.
이런 차라투스트라의 고함 소리에 그의 동물들이 달려왔고, 차라투스트라의 동굴 근처의 모든 동물들은 놀라 뛰쳐나오더니 곧 몸을 숨겼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
내 운명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답이 내게 주어지기를.
나는 어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전하려 노력했지만, 사람들이 개선되지 않는 것을 보고 노력의 헛됨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력, 자신의 삶의 가치, 노력해도 성과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차라투스트라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했지만, 사람들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나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전하여 이상 사회를 구현하라고 내게 주어진
임무에 무력감을 느꼈고,
그리하여 절망하여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안주하고자 했다.
하지만 내 안의 올바름에 대한 의지, 이상에 대한 의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안주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제까지의 내 삶을 긍정하라며 나를 이곳 고독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제 나는 내 운명에 대한 문제의 답을 얻길 바란다.
어떻게 내 운명을 긍정할 것인지 답을 얻길 바란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는다면, 그것은 더는 잊히지 않게끔 모두에게
내놓을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길 바란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게 주어야 한다.
나 차라투스트라가 너를 부른다.
신을 믿지 않는 자로서,
현생을 긍정하는 자로서,
올바름을 추구하다 고통받는 자들의 대리인으로서,
영원한 반복을 긍정하는 자로서
너를 부른다.
나를 절망에 빠뜨린 문제에 대한 답을!
나에게 구원이 있기를!
좋다, 드디어 오고 있구나.
나를 절망에 빠뜨린 문제의 답이!
내 삶의 마지막 문제의 답을 얻어 나와 같은 삶을 사는 모두의 앞에 내놓으리라!”
달아나는 짐승들
차라투스트라의 고함에 짐승들이 달아나고 있다.
-2-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죽은 듯이 쓰러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창백한 모습이었고, 오랫동안 먹으려고도 마시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일주일간 지속되었고, 그의 동물들은 하루 종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독수리만이 먹이를 구하러 날아가곤 했다.
차라투스트라의 독수리는 자신이 구해온 것을 차라투스트라의 주변에 놓았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노랗고 빨간 열매, 포도 장미 사과, 향기로운 허브와 소나무 열매들 사이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의 발치에는 독수리가 힘들게 목동에게서 훔친 새끼 양 두 마리가 놓여 있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차라투스트라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장미사과 하나를 손에 들어 향기를 맡았다.
장미사과에서는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 났다.
그의 동물들은 차라투스트라와 대화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동물들이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일주일 동안 지친 눈을 하고서 누워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 합니까?
세상이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굴 밖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만물이 당신을 치유하고자, 생기롭게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당신을 각성시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당신을 각성시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처음 당신은 반죽처럼 푹 퍼져 있었는데,
지금은 당신의 영혼이 부풀어 오른 것 같으니 말입니다.”
동굴 밖의 생기로운 자연
차라투스트라의 동물들은 차라투스트라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길 바라면서,
동굴 밖으로 나가서 기운을 얻으라고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동물들이여, 계속 말해달라.
나는 너희가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
너희의 말은 나를 상쾌하게 하는구나*.
이처럼 대화할 수 있다니, 이것은 내가 '잘 가꾸어진 대지**',
이상 사회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구나***.
*고독에 놓여 있던 차라투스트라에게 동물들의 말은 대화할 수 있다는 것, 고독하지 않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동물들의 말이 상쾌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대지는 현생을 말하는데, 잘 가꾸어졌다는 것은 이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상적인 현생/이상적인 사회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고독한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이지 않은 생각으로 인해 배척당한다.
그래서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대화할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대화가 가능한 시점은 부조리한 사회가 극복이 된 시점, 즉 이상 사회가 나타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차라투스트라는 동물들과 말하고 있으므로, 부조리한 사회가 극복된 시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말소리가 들린다는 것, 그래서 고요하거나 적막하지 않다는 것,
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말소리는 우리를 소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왜 말소리를 사랑스럽게 여기는지 알려주겠다.
각각의 개인들은 자신들만의 이해를 가지고서 세계를 구성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하는데, 이 세계들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즉 타인의 세계는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양하다.
누군가는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보면서 이해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세계를 왜곡하면서 그릇되게 이해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기 입맛대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르게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그릇되게 세계를 이해하는 것,
이것들은 세상을 살다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릇된 것이 더 개인에게 이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릇된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그릇된 것들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것들은 천성적으로 그릇된 것이기에 올바른 것에 비해 형편없고 무가치하다.
이러한 형편없음을 숨기기 위해서 그릇된 것들은 자신들이 아름다운 것인 양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인 양 우리를 속이고,
그렇게 그릇되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릇된 것이 개인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이득을 위해서 그릇된 이해를 갖는 것을 선호한다.
그릇된 것을 의인화하여 표현함으로써, 위와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나 차라투스트라의 세계는 어떨까?
과연 본래의 세계와 다를까?
본래의 세계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을까?
내가 이해한 세계는 본래의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본래의 세계를 왜곡 없이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나와 세계는
하나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잘 없다.
사회는 있는 그대로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 사회적/종교적 규율과 가치에 따라서
왜곡되고 그릇되게 이해한다.
그렇다 보니 나와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은 적고, 사회로부터 나는 배척당하며,
그렇기에 나는 지금처럼 홀로 고독한 적막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고독 속에서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와 고요와 적막이 사라지면,
이 세계에 나와 다른 존재가 있음을, 나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온통 나만 있던 세계, 적막만이 있던 세계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
이것을 말과 소리가 알려주니,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내게 있어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이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고독 속에서 오래 머물렀기에, 자신의 주변에서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또 말과 소리의 사랑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런 이유도 있다.
인간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언어를 통해서 표현한다.
인간은 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가?
이것은 인간이 사물들을 언어화하여 사색하고 탐구한 후 앎을 얻으려고
한 것 아니었나?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언어라는 것이 본래 어떤 것도 아닌 단순히
공허한 소리라는 것이다.
언어는 공허하다.
어떤 존재나 실체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언어는 인간에게 공허한 것치고는 유익한 것 아닌가?
인간은 사물을 언어화하면서 사물들에 대해서 사색하고 앎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언어라는 이 공허한 것, 이것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가?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이로써 앎을 향해 나아가니 말이다.”
지저귀는 새들
차라투스트라는 너무 고독하게 지내왔기에, 고요와 적막을 깨는 소리에도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동물들이 말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만물은 우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느낌을 주고 사라지는데, 우리는 이러
한 느낌의 반복 속에서 만물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릇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죠.
그래서 그들은 이 반복을 헛되이 흘려보내며,
무지한 채로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살다 죽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사색하고 탐구하는 사람들은 반복되는 경험을 토대로 깨닫고
그러면서 우리가 영원한 흐름 속에서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은 오고 가는 반복된 흐름 속에 있습니다.
그렇게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죠.
모든 것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이 영원한 반복의 흐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바퀴는 세계 내의 존재가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성과 소멸되는 반복 속에서 세계의 구성이 빠지면 바로 채워지는 그래서 세계가 유지되는 모양새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부서졌다가, 다시 새롭게 이어집니다.
이 반복으로 인해, 이 세계는 늘 일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헤어지고 다시 만납니다.
그렇게 존재들은 이러한 순환에 충실합니다.
하나의 흐름을 중심으로, 모든 존재는 매 순간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이러한 흐름에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굽이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순환하는 세계
차라투스트라는 세계가 생성과 소멸의 순환 속에서 주기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 너희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자들이여,
내가 춤추게 하는 자들이여,
너희는 내가 일주일 동안 무엇을 이뤘는지 잘 알고 있구나.
어떻게 절망감*이 나를 질식시켰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나는 이 절망감을 끊어내는데 성공했다.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살면서 겪게 된 절망감을 말한다.
이는 사람들에게 올바름을 전하려고 노력해도 사람들이 따르거나 개선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절망감으로, 올바름을 위해서 노력한 차라투스트라의 삶을 완전히 부정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것*을 바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가?
아직 나는 절망감의 여파로 인해 열정적이지 못하다.
나 자신을 절망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했기에, 지쳐 버린 것이다.
*영원회귀를 말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동물들의 발언을 통해서 후술 된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영원회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무의미하고 영원한 반복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것인가?
너희도 저 잔인한 인간들처럼 나의 고통을 바라보고 싶었는가?
인간은 비극과 투우와 십자가형을 바라보면서 가장 큰 쾌락을 느껴왔다.
인간이 지옥을 꾸며냈을 때, 저들에게 지옥은 그야말로 볼만한 곳이었다.
사회적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이 고통받아 힘들어하면,
볼품없는 인간들이 신이 나서 달려온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를 위로하는데, 이를 “동정”이라고 부른다.
볼품없는 인간들 중 시인*은 얼마나 열심히 살아있음을 부정하는가!
하지만 이들이 살아있음을 부정하고 있더라도, 삶의 가치를 부정하더라도
그들이 삶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라.
이들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말이다!
여전히 살면서 행복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삶의 고통과 허망함을 외치는 시인을 말한다.
이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표현이나 삶의 부조리를 저주하고 비난하는 이야기만 한다.
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3장이나 1권 9장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이들은 삶이 허무하다고 말하며 절망한 채로 살다 보면
자신의 삶에 행복이 다가오리라 생각하겠지만,
삶은 이러한 자들의 사랑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이들은 살면서 행복을 누리기 어렵다.
삶이 그들을 외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를 부정하던 여러분이 저를 사랑한다고요?
하지만 전 당신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기 위해서 제대로 노력한 적이 없잖아요!”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잔인한 동물들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자신을 억압하면서 스스로를 십자가를 지는 자/참회자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저들은 만족해한다는 것을 놓치지 말길 바란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방관하려는 성질을 지적한다.
이 방관하려는 성질로 인하여 동정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서 부조리가 허용되어진다.
나의 동물들이여,
너희는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은 인간을 비판하고 있군요.
당신은 인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토로하기만 하는 존재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탐구하며 깨달은 것은
최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최악이 필요하다는 것,
즉, 내가 최악이라고 일컫는 인간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악의 존재들은 나와 같은 이들에게
'최선의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자 '최선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어준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인간은 최악의 존재와 생활하면서, 더 올바름을 추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에게는 더 선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사회적 규율에 따르지 않게 되어서,
사회적으로는 반사회적인 인물로 취급된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다, 그릇되다’고
느껴서가 아니다.
나는 최악의 인간들로 가득한 세상에 절망하여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고통받는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는 최악의 존재도 최선의 존재도 아닌
삶을 위해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점 때문에 말이다.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실망이 나를 질식시켰고,
그로 인해 나는 절망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하지 않기에,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다는 것,
이러한 앎이 나를 질식시킨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실망감에 죽음을 앞두고 나의 목표는 흔들렸고, 나는 슬픔에 젖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저 개선이 없는 자들은 영원히 돌아온다*."
그러면서 나는 잠에 들 수 없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에게 노력하여 올바른 이해를 가르치고 개선한다 하더라도, 이 개선된 자들이 죽으면 개선된 자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또 노력하지 않는 자들이 태어난다.
그러면 차라투스트라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는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게 세상은 암울한 곳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서 열의가 사라졌으며,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삶에 대해 부정하며 탄식했고, 의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운명에 대해서도 부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온종일 우울 속에서 삶과 내 운명을 부정하며 탄식하였고,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지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영원히 돌아온다.
그릇된 인간도 영원히 돌아온다.”
슬픔에 빠진 나는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노력하는 사람과 일반적인 사람들을
비교해보았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의 사람은 영원한 흐름 속에서 같은 모습, 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과 같은 이유로 절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이해를 갖춘 사람도 결국 노력의 무의미함에 의해서 세상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하든 그렇지 않든 절망하게 된다면,
올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 그리고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올바른 이해를 위해 노력한 나의 삶과 운명은 그야말로 헛짓거리를 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세상에, 내 운명에 실망했다.
이는 곧 이 세상이 개선 없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란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 너무나 역겨운 일이다!”
절망하는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갖추었고, 그에 따라 살 수도 노력할 수도 있지만,
세상을 바꿀 수 없음에 절망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더니 몸을 떨었다.
세상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망과 혐오가 그를 압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동물들은 차라투스트라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말했다.
“더는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회복 중인 자여!
우선 그 문제에 대해서 사색하지 말고 동굴 바깥을 살펴보세요.
올바름에 민감한 자, 올바른 앎을 모으려는 자,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은둔자들에게 가길 바랍니다.
거기서 당신은 위로받고 안정을 찾길 바랍니다.
그러면 점차 당신은 다시 당신의 앎을 시와 노래로 알릴 의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시와 노래는 그릇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어해서, 쉽게
비판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서 당신의 앎과 생각을 표현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바라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요.
*올바름이 구현된 이상적 미래를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동물들의 발언을 통해 설명된다.
물론 당신이 사람들과 자신의 운명에 실망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시와 노래를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앎과 생각을 말할 의지가 있었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부르려는 노래와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고요."
*사람들에게 비판받고 그래서 절망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이에 따라서, 자신의 생각을 베일에 감추듯 노래에 감추어 말하는데, 이때 조금은 정적인 노래를 부르게 된다.
만약 차라투스트라가 절망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하고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가 부를 노래가 좀 더 긍정적이고 밝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희 나를 웃음 짓게 하고, 내가 노래하고 춤추게 하는 동물들이여,
제발 조용히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동물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는 것은 시끄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즉 동물들의 말이 만족스럽다 보니 호통치는 모양새로 장난치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일주일 동안 어떻게 위로를 얻었는지 잘 아는구나*!
나는 다시 내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
물론 전처럼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고, 노래하듯이 시처럼 말해야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제 내 운명을 어떻게 긍정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가 동물들이 자신이 어떻게 위로를 얻었는지 아는 이유는 동물들이 시와 노래를 통해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임을 알고 말했기 때문이다.
**후술 되겠지만, 미래의 존재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닿게 하기 위해서 그러하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에서의 잠언에 대한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다.
***어떻게 긍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13장 말미에서 동물들이 차라투스트라 대신 말해준다.
현재로서는 자신의 절망에 대해서 말했지, 어떤 식으로 깨닫고 극복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너희는 이것을 노래처럼 시처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가?”
지친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게 었지만, 현실은 여전하여 정신적으로 지쳐있다.
동물들이 말했다.
“더는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회복 중인 자여,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노래를 이어갈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부르지 마시고,
노래를 이어갈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당신의 영혼을 치유하길 바랍니다.
당신의 운명을 그렇게 견디길 바랍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지.
당신은 영원회귀를 통해 당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게 당신의 운명입니다.
당신이 최초로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이러한 운명이 당신을 위험에 빠트리고 당신을 괴롭게 할 겁니다.
우리는 당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영원히 되돌아오고, 우리도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
이미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절망적인 운명을 두고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고민하며, 괴로워했다는 것,
그러다 결국 운명을 긍정하게 되었고, 이를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다란 생성의 주기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모래시계와 같아서,
모래알이 다 떨어지고 나면, 뒤집어 새롭게 시작하고,
다시 다 떨어지고 나면,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반복이죠.
이 존재의 반복은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죽더라도
저 형편없는 자들처럼 언젠가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의 당신은 지금처럼 올바름을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요.
이것은 영원히 반복되겠지요.
당신은 이것을 알아차린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지금 당장의 삶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 없더라도,
후대의 당신과 같은 이가 당신의 노력의 의미를 알아봐 줄 것이고,
이로써 당신의 삶은 구원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영원한 반복 속에서 당신이 바라던 이상적 미래가 다가올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당신이 죽어도 절망 속에서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지금 죽고자 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어떻게 스스로에게 말할 것인지도 압니다*.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게 되었으니,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속에서 자신이 존재함을 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으면, 언젠가 영원회귀의 흐름 속에서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날 존재가 나타날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존재는 차라투스트라의 흔적을 보면서, 그가 노력했음을, 그의 삶이 가치 있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이로써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삶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므로, 그는 자신의 삶을 더는 무가치하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구원인 셈이다.
그러므로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아직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의 운명을 앞에 두고도 절망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말할 것이고,
행복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절망하던 당신의 운명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 않습니까?
가장 인내심이 있는 자여!
영원회귀
영원한 반복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의지를 되찾게 된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제 나는 죽고 사라질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나의 영혼 역시도 몸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운명을 사는 자를 만들어 내는 조건들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들로 인해 나와 같은 운명을 사는 자는 다시 창조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영원한 회귀 속에서 여러 조건들이 맞물리면서
영원히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태양, 대지, 독수리와 뱀들과 함께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나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
새롭지도 더 나은 것도 아니고, 비슷한 삶을 살지도 않는다.
돌아온 나는 지금의 나와 정확히 동일한 삶/올바름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고,
이 삶을 영원히 반복하게 된다.
위대한 자들과 볼품없는 자들 속에서,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이 현생을 긍정하게 하고, 그릇된 이해를 벗어나게 하며,
이상적인 존재들의 가능성을 알리려고 말이다.
나는 나 스스로 탐구한 것들을 말했다.
그리고 내가 했던 말들에 따라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나의 운명은 내가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새로운 나의 예고자임과 동시에 예고의 대상으로서 사라지게 된다.
이제 저물어가는 자, 죽어가는 자로서 나는 나 자신을 축복할 수 있다.
운명이 내게 준 과제*는 끝이 나고, 이렇게 나는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운명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준 과제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살면서 겪는 덧없음의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다.
이 과제를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극복한다.
동물들은 이렇게 말을 하고서 차라투스트라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침묵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뱀과 독수리는 그가 그렇게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영혼*과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뱀과 독수리는 그를 존중하며 그가 혼자 있게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14장과 이어지는 것으로, 여기서 영혼은 영원회귀를 통해 미래에 나타날 자신과 같은 자를 말한다.
원인들에 의해 창조되는 차라투스트라
영원회귀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적절한 시기가 주어진다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생각해볼 거리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심연의 사유가 올라오기를 바라나?
ㅡ앞서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언급된 과제, 더 성숙해지기 위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ㅡ사실상 3권은 「차라투스트라, 2권 22장」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여정으로서 진행이 되는데, 이제까지 주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것이다.
ㅡ따라서 13장이 책 전체의 흐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심연의 사유는 왜 잠꾸러기 벌레인가?
ㅡ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기 위한 답이 심연의 사유다.
ㅡ그런 점에서 이 답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아서 현재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있지 못하다 보니, 답이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은 상태, 아직 잠든 상태로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수탉이자 새벽인가?
ㅡ잠꾸러기 벌레인 심연의 사유를 잡으려는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또 수탉인 이유는 잠들어 있는 것을 깨우기 위함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심연의 사유를 두고, 깨어나면 영원히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나? 증조모를 깨워 놓고 계속 주무시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고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해법을 찾은 후,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그것이 잊혀 지지 않도록, 다시 잠들지 않는 앎이 될 수 있도록 하려는 의사를 보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신을 믿지 않는 자, 생의 대변자이자, 고통의 대변자이자 둥근 고리의 대변자라고 자신을 지칭하나?
ㅡ종교적 관점을 따르지 않기에 신을 믿지 않는 자라고 하는 것 같다.
ㅡ현생에 대해서 긍정하려고 하는 자이기에, 생의 대변자라고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ㅡ자기 운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운명은 올바름을 향하려는 운명을 말한다.
ㅡ둥근 고리의 대변자는 무한히 반복되는 존재 중 하나로서, 올바름을 무한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묻기에 해당 표현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이레 동안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나?
ㅡ7일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지만, 성경에서 신이 세상을 창조하던 7일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동굴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가?
ㅡ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은 것이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차라투스트라, 1권 21장」에서처럼 만족스러운 죽음을 택하게 할까봐 그런 것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세계는 왜 정원인 양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린다고 하나?
ㅡ세계는 본래 대지다.
ㅡ정원은 이러한 대지에 꽃과 나무가 자라고, 그것이 잘 관리된 상태를 말한다.
ㅡ그런 면에서 정원은 잘 관리된 대지라고 할 수 있다.
ㅡ따라서 세계가 정원이란 말은 세계가 잘 관리된 영역이란 이야기로, 이상적인 상태가 되었다/되어 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ㅡ그러므로 세계가 정원인 양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상태로서 세계가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에게 세계가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인 셈이다.
ㅡ그런 점에서 바람과 시냇물이 차라투스트라를 따르고자 한다고 언급되는 것이다.
만물은 왜 차라투스트라의 의사가 되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삶에 대하여 절망하고, 그에 따라서 헛헛함을 지닌 채로 고독 속으로 나왔다.
ㅡ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상태인 것인데, 당장 사람들에게서 삶을 긍정하기 어려우므로,만물을 바라보면서/만물을 통찰하면서 차라투스트라가 다시금 지적 충만함을 느끼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삶을 의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발효된 반죽처럼 누워있다고 비유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자신의 운명을 긍정해야 하는 문제에서 지쳐버렸고, 그에 따라 7일간 반죽처럼 늘어진 상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러다 차라투스트라가 일어났는데, 그 일어남은 깨달음을 얻어서 그런 것처럼, 그래서 이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할 수 있는 상태에 곧 다가갈 수 있는 모습이 된 것이다.
ㅡ이를 발효된 반죽으로, 즉 제빵하기 전 상태, 숙성된 상태, 거의 완성에 이른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동물들의 재잘거림에 따라서 기운이 난다고 하나? 왜 재잘거리고 있는 곳은 정원과도 같은가?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 고독 속에서 지내기 때문에, 고요와 적막을 이길 수 있다면,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말이 있고 소리가 있다는 것은 왜 좋은 일인가?
ㅡ차라투스트라의 고요와 적막을 깨뜨려주기 때문이다.
ㅡ소리가 있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말과 소리는 왜 갈라져 있는 것들 사이에 놓여 있는 무지개이자 가상의 다리인가?
ㅡ말과 소리는 다른 대상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가 고독을 벗어나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ㅡ즉 외부와 단절된 우리가 외부를 느끼게 되는 것은 말과 소리라고 보는 것이다.
ㅡ이는 말과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에서 살아가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ㅡ이러한 순간은 눈에 타자가 보이긴 하겠지만, 그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삶이 처음부터 주어진다면, 익숙한 상황이겠지만.
ㅡ또한 말과 소리는 존재들간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소통의 기능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 구절과 관련해서 언어로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좀 더 청각적인 자극으로 보는 편이 더 좋아 보인다.
개개의 영혼에는 제각각 다른 세계가 속한다는 건 뭘 말하고, 왜 배후 세계가 되나?
ㅡ개인은 자신의 주관을 기반으로 살아가기에, 개인 각자가 자신만의 주관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
ㅡ이러함에 따라서 제각각 다른 세계를 지닌 것이라 표현해볼 수 있다.
ㅡ그리고 이에 따라서 나의 주관적 세계가 아니라면, 내 세계의 너머, 배후세계로 이해해볼 수도 있다.
가장 비슷한 것들 사이에서 가상이 가장 아름답게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작은 틈이 다리 놓기 가장 어렵다는 건 뭘 말하나?
ㅡ앞서 사람들마다 각각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했다.
ㅡ이때 사람들이 구성하는 세계는 누군가는 올바른 것을 인식하는 세계일 것이고, 누군가는 그릇된 것을 인식하는 세계일 것이다.
ㅡ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것을 인식하는 세계와 그릇된 것을 인식하는 세계가 같은 것을 두고 나타나는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로 이해하는 걸로 보인다.
ㅡ즉, 올바름이 반영된 세계와 그릇됨이 반영된 세계는 유사하지만, 그릇됨이 반영된 세계가 더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ㅡ그릇된 세계 인식은 왜 더 아름다우려고 거짓말을 할까?
ㅡ이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인데, 올바른 세계와 그릇된 세계에는 간극이 있는데,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한다면, 그릇된 세계 인식은 형편없고 모자란 것으로 보이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ㅡ그렇기에 이런 형편없음과 모자람을 메꾸기 위해서 거짓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왜 바깥이 있을 수 없나? 왜 바깥이 없다고 하나? 왜 차라투스트라는 온갖 소리를 들으면서 이 사실을 잊나? 왜 그것이 좋은 일로 여겨지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세계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계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와 사물은 경계를 이루지 않는데, 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2권 15장」
"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들 앞에 누워 있을 뿐,
사물들로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그런 것을 나는 온갖 것에 대한 때묻지 않은 인식이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 2권 12장」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대들을 따르고 그대들에게로 휘어져야 한다!
그대들의 의지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매끄럽게 되어야 하며,
정신의 거울과 반사로서 정신에게 예속되어야 한다.
ㅡ이처럼 차라투스트라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물아일체의 경지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세계가 자신과 구분되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할 때, 그것은 신기함과 새로움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자극할 수 있는 것 같다.
ㅡ그런 점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세계 속 존재로서의 의식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다채로움을 경험하게 하는 현상으로 인식될 것 같다.
사물들로부터 기운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물에 이름과 소리를 선물했다는 건 뭘 말할까?
ㅡ여기서는 사물을 언어화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사물의 언어화를 통해서 사람들은 사물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기 수월해진다.
ㅡ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로부터 얻는 기운은 앎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왜 하나의 아름다운 바보짓인가?
ㅡ말하는 것은 사실 특정 패턴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ㅡ이것은 그야말로 소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를 통해서 여러 상황이 발생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아름다우면서도 공허한 것으로 인식된다.
ㅡ이러한 점에 따라 차라투스트라는 아름다우면서 바보짓이라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모든 말과 소리의 속임수는 왜 좋은 것인가? 소리와 함께 사랑이 무지개 위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말과 소리는 사물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언어를 말한다고 볼 수 있고, 이것은 분명 사색함에 있어서, 탐구함에 있어서 좋은 것이다.
ㅡ소리와 함께 언급되는 사랑은 사색하는 자들의 올바른 이해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에 따르면, 언어와 함께 사색하는 자들의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무지개 위에서 춤을 춘다고 말하는 걸로 볼 수 있다.
ㅡ무지개 다리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다리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올바른 이해로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ㅡ즉 언어를 통해서 사색하는 자들이 올바른 이해로 나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만물 자체가 스스로 춤을 춘다는 건 뭘 말하나?
ㅡ춤을 춘다는 것은 이상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여기서는 만물이 이상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ㅡ즉 제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것인데, 이는 만물들로부터 올바른 이해를 제공받는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ㅡ결국 차라투스트라처럼 사색하는 자들은 만물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만물은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다가 달아나나? 그리고 왜 다시 돌아오나?
ㅡ사색하는 자에게 만물은 자신들을 이해할 단서를 주기만 할 뿐, 답은 알려주지 않는다.
ㅡ그런 면에서 탐구는 만물과의 이러한 밀고 당기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ㅡ그러다 올바른 탐구가 이뤄진다면, 만물은 완전히 탐구자의 손에 잡히게 되는 것인데, 이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는 건 뭘 말하나?
ㅡ해Jahr의 번역어로, 연年을 나타내는데, 공전 주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ㅡ그런 면에서 존재의 주기를 언급한다고 보면 된다.
ㅡ존재의 주기는 곧 영원회귀를 말한다.
존재의 똑같은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존재의 집은 존재들이 머무는 곳을 말하는 걸로 보이며, 세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ㅡ즉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새로운 존재들의 순환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이야기같다.
매 순간 존재가 시작하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구른다고 하는데, 뭘 말하나?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
ㅡ어느 시점에서건 존재들이 나타나고, 어떤 점을 중심으로 공들이 굴러가고 있다.
ㅡ여기서 공들이 존재라고 볼 수 있는데, 존재들은 어떤 점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ㅡ따라서 어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양, 어디서 시작하던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모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ㅡ그런데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기에, 위 해석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ㅡ이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 본다면, überall이란 단어가 ‘어디에나’로 번역된다는 걸 알 수 있다.
ㅡ그런데 überall는 ‘어디에나’를 말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또는 ‘어떤 경우에나’를 나타내기도 한다.
ㅡ이는 überall이 공간을 나타내는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을 시간으로 바꾸면, ‘어떤 시간에나’라는 의미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파생되는 의미로서 언제나/어떤 경우에나 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중심은 언제나/어떤 경우에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중심이 제각각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중심이 자리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ㅡ앞서 했던 해석과 취합해 보면, 존재들이 어떤 중심에 따라 흘러가고, 어떤 경우에도 중심이 있어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간다는 이야기로 풀이될 수 있다.
ㅡ즉 어떤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존재들이 나아간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영원회귀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왜 굽어있다고 말하나?
ㅡ영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한한 직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 3권 2장」에서 영원은 원형으로 설명한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난쟁이여, 이 성문을 보라!
그것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여기서 만난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이 두 길의 끝까지 가보지는 못했다.
뒤쪽으로 나 있는 이 긴 골목길.
그 길은 영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저쪽 밖으로 나 있는 저 긴 골목길.
거기는 또 다른 영원이다.
그 두 길은 서로 모순된다.
서로 머리를 부딪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바로 이 성문에서 만난다.
위에 성문의 이름이 '순간'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그 두 길 중 하나를 따라 앞으로 더 앞으로,
더 멀리 계속 간다면, 그래도 이 길들이 영원히 서로 모순될 것이라고 믿는가,
너 난쟁이?"
난쟁이가 경멸조로 중얼거렸다.
"모든 곧은 것은 속인다.
모든 진리는 굽어 있고, 시간 자체가 원이다."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너, 중력의 정신이여, 너무 가볍게 만들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네가 쪼그려 앉은 그곳에 너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이 절름발이여!
그런데 내가 너를 이 높은 곳까지 지고 오지 않았는가!"
ㅡ이에 따라서 영원의 길은 굽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짐승들은 어릿광대이자 손풍금인가?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저 짐승들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줌과 동시에 춤을 추거나 노래하고 싶게 만드는 존재들로 여겨지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의 목구멍에 기어들어가 질식시킨 것은 뭘 말하나?
ㅡ앞서 차라투스트라의 기록을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그에 따라서 절망하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ㅡ차라투스트라가 절망하게 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노력해도 무의미하다는 노력의 무가치를 느끼고 허무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목구멍에 기어들어가 질식시킨 것은 노력의 덧없음, 노력의 허무함이라고 할 수 있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3권 2장」에서 나오는 양치기의 모습과 같다.
ㅡ양치기는 자신의 입에 들어간 뱀을 물어뜯어 위기를 극복하게 되는데, 차라투스트라 역시 노력의 덧없음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노력의 덧없음을 해결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동물들이 리라에 맞춰 부를 노래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가?
ㅡ차라투스트라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겪었던 곤욕스러움보다 세상에 앎을 전하려는 의지가 더 강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괴로움을 공감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인간이 지옥을 꾸며냈을 때, 왜 저들에게는 지옥이 지상천국이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ㅡ그러면서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지옥은 그릇된 자들이 고통받는 곳으로, 이것을 꾸며낼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고 타인들의 일로 여기게 된다.
ㅡ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지옥이 그야말로 재미있는 것이 그득한 곳으로 여겨지게 된다.
ㅡ이는 인간이 지옥을 선호한다는 것, 악마적 특징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위대한 인간이 소리를 지르면, 왜 왜소한 인간이 나는 듯이 달려오나? 왜 갈망 때문에 혀가 목구멍에서 나와 늘어뜨려지나? 왜 이것이 동정이 되나?
ㅡ여기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단순히 외침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서 소리치는 상황을 말한다.
ㅡschreit가 소리를 지른다고 번역된 것인데, schreien가 원형이며, 이는 ‘소리치다’와 더불어 ‘비명을 지르다, 울부짖다’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ㅡ앞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존재들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위대한 존재가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으로 흘러가야 적절해 보인다.
ㅡ그런 면에서 보면, “위대한 인간이 고통에 힘겨워 울부짖으면, 왜소한 인간이 달려온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그러면 왜 왜소한 인간들이 이런 상황에서 달려올까?
ㅡ사회나 종교는 타인을 동정하기를 권하는데, 이로써 고통받는 개인 곁에서 동정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이롭다.
ㅡ그렇기에 동정할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라면, 고통받는 개인이 나타날 때 주저없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ㅡ즉 누군갈 동정함으로써 자신을 좀 더 종교적/사회적 목표에 부합한 존재로 만드려는 욕구/갈망으로 인하여 위대한 자가 고통스러워하면, 왜소한 자들/볼품없는 자들이 달려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들이 삶을 탄핵한다는 건 뭘 말하나? 왜 시인의 탄핵 속에는 쾌락이 있나?
ㅡ시인들이 삶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걸 말한다.
ㅡ이들은 삶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면서도 삶을 살아가기에 저들은 삶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ㅡ즉 말만 부정적일 뿐, 삶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ㅡ또 삶을 부정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에, 저들은 삶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서 삶을 부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삶을 탄핵하는 자들을 삶은 눈깜짝할 사이에 넘어서 버린다고 하는데, 뭘 말하나? 왜 뻔뻔한 여자가 나타나서 당신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는가?
ㅡ삶을 탄핵하는 자들은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들이다.
ㅡ뻔뻔한 여자는 삶을 나타내는데, 삶은 「차라투스트라, 2권 10장」에서 여자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 삶이여!
최근에 나는 그대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끝 모를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 싶었다."
(중략)
이렇게 말하며 그 미덥지 않은 여자는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할 때,
나는 그녀도 그녀의 웃음도 결코 믿지 않는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삶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자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있다.
ㅡ반면 삶을 탄핵하는 사람들, 시인은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지속하고 있는데, 이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ㅡ즉, 시인들은 삶을 사랑하지만, 삶은 시인들에게 관심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시인들은 삶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그릇된 자들로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죄인', '십자가를 지고 있는 자', '참회자'로 부르는 자들 모두의 불평과 탄핵 속에 들어있는 환락은 뭘 말하나?
ㅡ사회에 대해서 불평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탄핵하는 자는 뭘 말하나?
ㅡ인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자를 말한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3권 7장」에서 나타나는 바보의 모습과 같다.
ㅡ이 바보는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해서 비판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왜 최선을 위해선 최악이 필요한가? 왜 최악은 최선의 힘이며 가장 단단한 돌인가? 왜 인간은 더 선해지고 악해져야 하나?
ㅡ최선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지려면 최악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ㅡ최악을 모른다면, 최선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ㅡ그런 면에서 최악은 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인으로서 작용한다.
ㅡ최악이 창조자에게 가장 단단한 돌이 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ㅡ어쩌면 창조자들이 부숴야 할 목표로 삼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ㅡ돌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면, 「유고 (1882년 7월~1883/84 겨울)」의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대들은 그 안에 모든 조각 작품 중 가장 숭고한 것이 잠들어 있는 돌이다.
그대들은 그 외의 어떤 다른 돌도 아니다.
그리고 내 쇠망치가 그대들을 내려치는 것처럼 그대들은 자신을 내려치지 않으면 안 된다!
쇠망치 소리가 잠들어 있는 상(像)을 깨워서 일으켜야 한다!
ㅡ이에 따르면, 부숴야 할 대상으로서 돌이 언급된다.
ㅡ그런 면에서 창조자들의 목표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ㅡ인간은 최악을 경험하면서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게 되는데, 이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벗어나는 것이기에, 악으로 취급된다.
ㅡ결과적으로 선해지면서 악해지는 것이 된다.
‘인간은 악하다’라는 앎이 고문 막대기에 묶은 것이 아니란 말은 뭘 말하나?
ㅡ인간이 악하기에 차라투스트라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악함보다는 인간이 최선을 다하지도 최악을 행하지도 않는 모습에서 실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ㅡ그래서 인간의 최악과 인간의 최상이 왜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크나큰 권태가 목을 조이고 목구멍으로 들어온다는데, 어떤 권태를 말하나? ‘모든 것은 한결같다. 아무것도 소용없다. 앎이 목을 조른다’는 말은 왜 나온건가?
ㅡ권태는 Überdruss의 번역어로, 엄밀하게 말하면 권태보다는 싫증이나 진저리 난다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어로 보인다.
ㅡ즉 실망감에 따른 혐오 상태로 볼 수도 있는데, 이 실망감 자체가 덧없음으로 이어져서 차라투스트라를 옥죄게 된다.
ㅡ이러한 덧없음을 알아버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답답한 상황에 놓여버렸기 때문에, 덧없음을 나타내는 표현, 한결 같다거나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언급되는 것이다.
황혼과 비애가 절룩거리며 다가와 하품을 하며 말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황혼은 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마지막 부분을 말한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말하고, 태양의 쇠락이 황혼이기 때문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면서 자신의 삶의 마지막이 덧없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덧없음에 따라 의욕을 잃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서 절뚝거리고 하품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소한 인간이 영원히 되돌아온다고 하면서 왜 비애는 잠을 이루지 못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왜소한 인간, 그릇된 이해를 가진 인간을 개선시켜서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ㅡ하지만 이러한 존재들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절망과 슬픔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인간의 대지가 동굴로 변하고, 심장부가 가라앉고, 살아있는 모든 것이 인간 부패물과 뼈, 썩은 과거가 되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앞서 절망과 슬픔에 빠진 차라투스트라는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이 덧없으며 부질없는 것이 된다.
ㅡ이에 따라서 긍정적이었던 대지는 암울한 것이 되고, 열의가 사라져 심장부가 가라 앉는다고 표현한다.
ㅡ살아있는 모든 것이 부질없고 그릇된 걸로 인식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은 모든 인간의 무덤 위에 주저앉아 왜 더는 일어날 수 없었나?
ㅡ절망하게 된 차라투스트라는 미래가 부정적이라는 걸 알고서, 이상을 위해 노력하고 올바른 이해를 계승하려는 의지를 잃게 된다.
ㅡ즉 모든 인간의 무덤은 과거를 말하는데, 과거를 미래의 이상 사회에 이바지하게 만드는 일을 하기 힘들어 하게 되었단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위대한 자마저 여전히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대한 자조차 그토록 왜소하다는 것은 뭘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에게 이것이 생존 일체에 대한 권태가 되나?
ㅡ위대한 자는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차라투스트라에게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와 그릇된 이해를 갖춘 자는 서로 다른 존재로 분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이 위대한 자도 결국에는 세상에 절망하고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만다.
ㅡ그릇된 이해를 갖춘 자들도 세상에 절망하고 굴복했다는 점에서 올바른 이해를 갖춘 자들과 같은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두 유형의 사람 모두 왜소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ㅡ모두가 개선되지 않는 세상에 굴복했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사는 것 자체에 대한 싫증이 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병에 걸려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세상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는 상태다.
ㅡ물론 현재는 답을 찾았지만, 당장의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답은 아닌 것이다.
왜 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장미와 벌, 비둘기 떼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나? 왜 지저귀는 새들에게로 가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이 현재 자신의 처지를 낙관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삶에서 좀 더 긍정적이게 되려면, 차라투스트라가 좋아하는 존재들을 만나야 한다.
ㅡ여기서 장미는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에서 언급되는 장미로 보이는데, 올바름과 관련하여 섬세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방울의 이슬에도 파르르 몸을 떠는 저 장미 꽃봉오리와 우리가 대체 어떤 공통점
이 있단 말인가?
ㅡ벌의 경우, 「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에서 나오는 벌로 보이는데, 지혜를 구하는 존재로 보인다.
보라!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나는 내 지혜에 싫증이 나 있으니, 내 지혜를 갈구하는 손
들이 있어야겠다.
ㅡ비둘기 떼의 경우, 「차라투스트라, 3권 12장」에서 나오는 비둘기로 보이는데, 올바름과 지혜를 추구하며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비둘기 떼를 거느린 웃는 사자가 말이다.
ㅡ이들 모두 차라투스트라가 좋아하는 존재다.
ㅡ지저귀는 새들의 경우, 노래를 부르는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노래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경우에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즉 남들과 직설적으로 논하지 못하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는 남들에게 비난받거나 공격받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ㅡ즉 자신을 숨기고 대화하는 방법인데, 이는 은둔자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ㅡ그런 면에서 은둔자를 나타내는 듯하다.
왜 노래하는 것은 건강을 되찾는 자에게 어울릴까? 건강한 자라면 왜 말을 하면 된다고 하나? 왜 건강한 자는 건강을 되찾는 자와 다른 노래를 원할까?
ㅡ노래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대비되고 있는데, 노래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남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말하는 것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말한다.
ㅡ남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공격받거나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ㅡ그런 면에서 건강을 되찾는 자는 정신적으로 위축되거나 사람들에게 데인 적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ㅡ반면 건강한 자의 경우, 아직 그러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ㅡ그렇기에 건강한 자는 사람들과 토론하거나 논쟁하는 것에 있어서 피하지 않는 상태의 존재라면, 건강을 되찾는 자는 토론과 논쟁의 무의미함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ㅡ건강을 되찾는 자들의 경우, 말해도 모를 것이고, 배척당할 것이기에, 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ㅡ이처럼 입장에 차이가 있으므로, 건강한 자와 건강을 되찾는 자가 부르는 노래는 다르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다시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위안과 치유로 삼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속에서 나타나는 자신을 위한 노래를 불러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ㅡ영원한 반복 속에서 다시 창조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ㅡ그렇게 해야 영원회귀 속에서 나타나는 자신은 앞선 차라투스트라의 노래를 통해서 위안받고 치유 받게 되는 것이다.
왜 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노래를 배우라고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왜 이에 대해서 지적하는가?
ㅡ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사회에서 직설하면서 살 수는 없기에, 노래하며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터득하라고 조언하는 상태로 보인다.
ㅡ짐승들의 의도는 삶을 조금이나마 긍정하길 바란 것이긴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노래하면서 살아가기에는 아직 지친 상태이다.
ㅡ따라서 바로 노래를 부르게 하려는 짐승들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짐승들이 마련하라는 새로운 리라는 뭘 말하나?
ㅡ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가 더 에너지를 쏟으면서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게 하려고 계속해서 이상을 위한 노력보다는 좀 더 자신을 살피면서도 의욕을 가지는 방법을 제시한다.
ㅡ먼저 제시되는 것은 사람들과 토론하고 논쟁하지 말고 지내는 것이었고, 다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새로운 존재를 마련하는 것이다.
ㅡ이는 곧 자신의 후학을 양성하라는 이야기와 같다.
ㅡ그런 면에서 새로운 리라는 차라투스트라의 후계자다.
ㅡ이것을 짐승들이 추천하는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여전히 일선에서 있게 되면 겪게 될 피로감이 너무 크다고 여겨서다.
ㅡ그런 점에서 짐승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 삶을 좀 더 여유롭게 살게끔 노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교사이고 숙명을 지니나? 왜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숙명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큰 위험이자 병이 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다가 절망에 빠진 인물이다.
ㅡ즉 올바름을 통한 사회 개선을 노력하지만, 덧없음에 따라 절망하게 된 것이다.
ㅡ이 노력의 덧없음을 의식하는 중에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의 영원한 반복을 포착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운명을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받게 된 것이다.
ㅡ이로써 영원한 반복 속에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어떤 식으로 이 영원한 반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답하게 되는 운명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ㅡ영원한 반복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수긍해야 하는 문제는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아니다.
ㅡ왜냐면 일반적으로는 현재 자신들의 생계와 즐거움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미래는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고, 세계가 반복이 되든 말든 관심이 없게 된다.
ㅡ차라투스트라의 경우가 독특한 것이다.
ㅡ이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일반적인 삶을 살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운명은 차라투스트라를 곤경에 빠뜨리고 힘들게 한다.
ㅡ이런 특징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존재의 주기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을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원회귀는 어떤 의미로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오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영원한 반복에 주목한다.
ㅡ우선 처음 영원한 반복을 떠올리는 이유는 덧없음 때문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선사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 이해에 따라 살아가지 않았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실망했고, 앞으로 자신이 앎을 나누고 이상을 쫓아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ㅡ그렇게 생각해봤을 때, 그릇된 이해에 따라 사는 사람은 무한히 반복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여겨지고, 그러므로 장기적으로도 좋은 미래를 그리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ㅡ따라서 영원한 반복은 절망적인 요소다.
ㅡ하지만 영원한 반복 속에서 그릇된 이해에 따라 사는 사람만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ㅡ차라투스트라 역시도 그 반복의 굴레 속에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영원한 반복은 자신의 영원한 반복이기도 하다.
ㅡ혹자들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영원한 반복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보곤 하는데, 사실 이는 관점을 다르게 하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고독 속에서 머무는 존재로, 자신을 이해할 친구/동료가 없는 존재다.
ㅡ그러므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를 바라게 되는데, 자신은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한 반복 속의 일개의 존재이므로, 결국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된다.
ㅡ그러면 지금 당장은 이해 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언젠가는 이해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ㅡ이를 통해서 덧없음은 일갈 될 수 있게 된다.
ㅡ물론 삶이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올바름을 알려고 했던 노력이 완전히 무의미해지지는 않을 수 있는 것이다.
ㅡ이러한 의식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에게 동력이 되어줄 수 있다; 당장의 보람은 없지만.
ㅡ이에 따라서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1권 1장」.
아이는 무죄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움직
임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처럼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허무함과 공허함의 산물일 수 있는 영원한 반복에서 희망을 찾는다.
ㅡ이처럼 자신을 이해할 존재와 소통하려면, 언제일지 모르는 미래의 존재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뭔가를 고안해야 하고, 그래서 언급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의 구절이다.
산맥에서 가장 짧은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긴 다리를 가져야 한다.
산봉우리는 잠언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잠언은 크고도 높게 자란 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엷고 깨끗한 공기, 가까이 있는 위험, 즐거운 악의로 가득 찬 정신.
이런 것들은 서로 잘 어울린다.
나는 주변에 요괴를 두고자 한다.
내게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유령을 쫓아내는 용기는 그 스스로 요괴를 마련한다.
용기는 웃고자 하니.
ㅡ이를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야 하고, 그것이 후대의 누군가에게 잘 전해지게끔 자신의 이야기가 묻히지 않게끔 노력해야 한다.
ㅡ이를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앞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내가 다시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는 것.
이러한 위안과 이러한 치유를 마련했지.
ㅡ차라투스트라는 미래의 자신에게 자신을 선보이기 위해서, 이해 받기 위해서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미래의 자신과의 대화라고 볼 수 잇는데, 이에 대해서는 14장에서 추가적으로 언급이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영원한 회귀는 지금과 완전히 똑같은 나의 반복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나의 반복은 더 나은 것도 아니고 더 못난 것도 아닌 나의 반복이다.
ㅡ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나 말이다.ㅡ이에 따라서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의 삶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삶을 산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ㅡ하지만, 후에 「차라투스트라, 3권 14장」이나 「차라투스트라, 3권 16장」에서 언급되다시피, 후대에 자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남을 말한다.
ㅡ또한 앞서 이야기가 되었다시피, 차라투스트라는「차라투스트라, 3권 11장」에서 본인처럼 성장하는 과정은 각자마다 다르다고 말하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고 말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로서의 반복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정신을 지닌 존재'로서의 반복을 말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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