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5장 의역 (완3) (다른 춤의 노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1. 17:44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5장 다른 춤의 노래


         
15장 개괄

 

 

15장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회상하는 상황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히 반복되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 속에서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운명에 대해서 야속하게 느끼면서, 운명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따라서 운명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울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바라고 사랑했던 운명에 따라 살 수밖에 없음에 슬픔을 느끼며 울게 된다.


 

 

본문

 

 

-1-

 

당신,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여,
저는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오늘은 당신에게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당신은 제게 너무나 사랑스럽고 황홀한 것을, 
올바른 것들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미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랑스러움과 황홀함으로 인해 제 심장이 멎어버렸죠.

당신은 제게 이 이상적인 미래를
잠시 보여주었다가 감추며 제가 이상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꼬드겼었죠.
당신의 이러한 행동은 저를 안달 나게 했고,
그렇게 저는 이상적인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 결국 제 자신을 던지며 시도하게 되었죠.

 

하지만, 당신은 두 번*이나 저를 피해 달아났고,

저는 그렇게 넘어진 채로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서 두 번 절망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과 「차라투스트라, 2권 9장」에서 언급이 된다.

 

그 후 저는 당신을 경계하며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보니 당신,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제가 이상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은 저 이상적인 미래를 가리키면서,

실제로 이끄는 곳은 이상적인 미래가 아니라 영원한 반복이라는 것,

그리하여 저는 당신의 손에 따라 살면서 어떤 노력을 해도 이상적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운명은 그렇게 영원히 이상적인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 당신,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여!

당신이 제게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면, 저는 당신을 따르다 고독*을 겪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도 당신과 너무도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끼면, 저는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당신이 제 앞에 보일 듯 말 듯 한다면, 저는 당신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 당신이 먼저 저를 찾으면, 다시 두려움이 밀려와 순간 멈칫하게 됩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며 살아가다 보면, 부조리한 자들의 사회로부터 배척되고, 이에 따라서 고독을 느끼게 된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회가 없기에, 올바름을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는 고독 속에서 사는 것이 확정적이게 된다.

**운명이 너무 명확히 드러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상이 되는데, 그때 나타나는 곤궁이 두려움을 일으킨다.

***운명이 두려워 피하면, 마음속에 찜찜한 느낌이 생겨서 그리워하게 되는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

****운명을 기피하다가 운명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서 운명을 다시 마주하려고 하게 되는 상황으로 나아가는 심리를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제게 고통을 줍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이 주는 고통을 마다한 적이 있었습니까?

감내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당신이 제게 냉혹하게 굴 때면, 저는 더 열의를 가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저를 미워할 때면, 저는 더 당신 가까이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저를 버리고 달아날 때면, 저는 당신에게 더 집착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저를 비웃을 때면, 제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당신이 만족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당신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우리를 찾아내어 당신을 벗어날 수 없게 구속하니 말입니다.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순수하면서도 자유로운, 이런 순진무구한 눈을 한 당신*을 말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다른 운명들보다도 순수함과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운명이다.

예컨대, 쾌락을 추구하는 운명보다도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순진무구하다.

따라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이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순진무구한 이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저를 어디로 이끌고 있습니까?

제멋대로의 전형인 운명이여!

 

이제 다시 저를 두고 떠나려고 합니까?

제게 장난치며, 당신에게 순응하며 살더라도 감사해하지 않는* 이 냉혹한 자여!

*운명에 따라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살았는데도 그에 대한 보답을 안 해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 허망함을 느꼈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2권 9장/2권 22장」에서 드러난다.

 

저는 당신을 따라 행동하고, 당신이 놓은 흔적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방황하지 않도록, 제가 당신을 견뎌낼 수 있도록 손을 내주길 바랍니다.

손가락 하나라도 말입니다.

 

저는 절망했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저를 놀리려고 하는 겁니까?

제가 당신을 부정하게 하려고 시험하는 겁니까?

 

저는 당신이 주는 시련을 이겨내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는 사냥꾼입니다.

당신은 저와 함께 하겠습니까?

아니면 제게 사냥 당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까?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운명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대상이다.

왜냐면 이 운명에 따라서 살다가 언제 이상적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언제 이상적 미래에 도달할지 의문을 가지고 있고, 이를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니체는 의문을 해결하는 것을 사냥하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차라투스트라가 사냥꾼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도 차라투스트라의 사냥물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에게 자신과 함께 이상적 미래를 향해 나아갈 건지, 의문의 대상으로서 탐색당할 건지 묻는 것이다.

 

지금은 제 곁에 있군요, 심술궂은 운명이여.

이번에는 제가 이상적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길!

 

아, 이번에도 당신은 저를 받아주지 않는군요.

그렇게 제가 넘어지게 피해버리는군요.

 

아, 운명이여,

넘어져서 자비를 구하고 있는 저를 보십시오.

저는 기꺼이 당신과 함께 이상을 향하는 길을 나아가고 싶으니 말입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운명의 길을

그렇게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의 길을.

 

운명이여, 이제 지쳤습니까?

그렇다면 저 너머에서 창조자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쉬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창조자의 노래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가 올바른 것을 찾고 이를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노래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앎을 퍼뜨린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에게 또 다른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의 생각을 보며 쉬자고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운명이여, 몹시 지쳐 나아갈 힘도 잃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저 너머로 업고 가겠습니다.

당신은 그저 제게 팔을 내밀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목마르다고 한다면, 당신에게 목을 축일 것을 주겠지만, 아마 당신은 그것도 바라지 않겠지요*.

*운명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않는 모양새가 나타나는 이유는 운명이 차라투스트라에게 정을 주지 않고 차갑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따뜻하게 대한다면, 이상적인 미래로 차라투스트라가 나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하나 전혀 그러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이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오, 이 저주받은, 내 곁에 머물다 사라져 버리는 마녀여, 어디로 갔습니까?

당신을 따르다 남은 두 흉터*를 느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사회를 개선하려고 두 번 노력하게 되는데, 변화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고 두 번 모두 실망하게 된다.

이 두 번의 실망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상처가 된다.

 

이제 저는 지쳤습니다.

당신을 따르기에 지쳤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을 따르며 노래했지만, 이제는 당신이 내게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나를 위해 춤추고 노래해야 합니다*.

*이것은 차라투스트라가 더는 운명에 수동적으로 이끌리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차라투스트라가 운명에 수동적으로 이끌렸던 이유는 운명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회귀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게 되면서, 운명이 자신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앞날에 대해서 귀띔을 주지 않아도 이제는 운명의 손길을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된다.

이로써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을 앞에 두고 주도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금 거룻배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고 추구해갔다.

직역서에선  이를 황금 거룻배로 표현한다


 

-2-

 

운명은 손으로 귀를 닫으며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내가 너를 위하게끔 그렇게 강제하지 마라*.

     나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데, 날 강제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에 따른 자신에게 적당한 보답을 하길 바란다.

하지만 운명은 차라투스트라의 일생 속에서 이상 사회를 나타나게 할 수 없다.

왜냐면, 이상 사회의 발생은 영원회귀 속에서 이상 사회를 위한 노력이 누적되면서 나타날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생애에서는 아직 나타날 때가 아니기에, 운명이 차라투스트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줄 수 없다.

 

**실제로 어떤 좋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차라투스트라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서 만든 거짓말일 수 있다.

왜냐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생에 내에서 이상 사회에 도달하게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상적 미래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들의 누적 속에서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기존의 가치관을 벗어난 존재가 아닌가?

     선악을 넘어서서 사유하면서 우리는 이상적 미래를 희망하게 되지 않았나?

     이 세상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우리 둘이서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통해 기존 가치관을 벗어나서 판단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상적 미래에 대한 희망도 얻게 되는데, 이러한 희망을 얻은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삶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운명뿐이었다.

그렇기에 서로 각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다.

 

     우리는 이처럼 긴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잘 대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를 원망해야만 하는가?

*현재 운명이 운명에 따라 살아온 차라투스트라에게 보답을 하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잘 대해줬음을, 너무 잘 대해줬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이유는 네가 다른 이들보다도 지혜롭기 때문이었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 차라투스트라를 눈여겨보았던 것을 잘 대해줬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차라투스트라가 지혜롭지 않았다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차라투스트라를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 이 멋진 지혜로운 자여,

     너에게서 지혜가 사라진다면, 나의 사랑도 너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지혜로울 수 있어야 가능하다.

지혜롭지 못하다면, 올바름을 추구할 수 없다.

 

운명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여,

     이제 보니 너는 나에게 충실하지 않구나.

     너는 스스로 말한 것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구나.

     나는 네가 곧 운명을 떠날 것임을, 죽으려고 할 것임*을 안다.

*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차라투스트라, 3권 13장」에서 동물들의 염두에서 나타난다.

영원회귀를 통해서 미래의 자신에게 현재의 노력을 공감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차라투스트라는 더는 살 이유가 없어진다.

 

     오래되고 둔중한 종이 있다.

     이 종은 자정을, 죽음*을 알리며 울리는데, 너의 동굴까지 그 소리가 닿는다.

     그러면 너는 그 소리에 죽음을 생각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여, 네가 나를 곧 떠날 것임을 안다.”

*자정은 태양이 완전히 저문 것을 말한다.

태양의 저묾은 태양의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고, 태양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를 말하기에, 태양의 저묾은 차라투스트라의 죽음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양의 저묾/자정을 알리는 종은 죽음을 알리는 종이라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이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차라투스트라는 말을 마치고는 그녀의 귀에 대고 영원회귀에 대해서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그 누구도 그것을 모르는데...!”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원한 저녁의 푸른 초원을 바라보며 함께 울었다*.

그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지혜보다도 자신의 운명을 더 사랑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상적 미래로 나아가지 못함을 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고 덧없다고 느꼈지만, 영원회귀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이 이상적 미래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 이 존재는 차라투스트라가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이 미래에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차라투스트라에게 강제한다.

즉,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들을 희생시키는 것인데, 이 희생시킴을 당사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은 거짓된 모습을 보이며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정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에 대해서 운명에게 귓속말로 말하는데, 이때 운명은 자신의 속내를 알아주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이때,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자신의 임무의 괴로움과 희생되는 당사자에 대한 미안함이, 차라투스트라 역시 자신을 희생시켜야 하는 운명의 괴로움과 희생되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슬픔이 울음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와 운명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운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나*!

인간들이여,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부분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을 앞두고서 할 말들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앞서 운명과의 대화와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죽음이 다가온다면 차라투스트라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둘!

올바름을 추구하다 죽어가는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를 말한다.

 

셋!

저는 노력의 헛됨*을 느끼며 절망에 빠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색에 빠졌었습니다.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람들이 그만큼 노력하지 않아 실망한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차라투스트라는 절망에 빠지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사색하게 된다.

 

넷!

그리고 마침내 답*을 얻었습니다.

*영원회귀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다섯!

제가 얻은 답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심오합니다.

 

여섯!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곱!

노력의 덧없음*에 절망하여 나타나는 슬픔**에도 분명 심오한 통찰이 담겼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노력의 덧없음은 올바름을 위해서 공부하고 가르침을 전했지만, 세상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공을 들여 가르친 이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을 겪게 되면서 나타나는 덧없음이다.

 

**이 세상은 노력해도 의미가 없다고 여겨 나타나는 슬픔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의 무의미는 차라투스트라가 느끼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세상이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희망을 가지고 노력했었다.

이러한 희망에 따라 노력하고 시도했는데 실패를 겪었고, 그 결과 차라투스트라는 노력해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경험에 따른 슬픔을 심오한 통찰로 인한 슬픔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덟!

노력의 덧없음을 극복하는 기쁨은 우리의 절망하여 겪는 슬픔보다도 더 심오한 통찰이 담겼습니다.

 

아홉!

노력의 덧없음에 절망하여 나타나는 슬픔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의지를 사라지게 하지만

 

열!

노력의 덧없음을 극복하는 기쁨은 <영원>*을 말합니다.

*영원회귀를 통한 운명의 긍정을 말한다.

 

열하나!

운명에 대한 진정한 기쁨은 깊고 깊은 사색의 끝에서 <영원>을 말합니다.

 

열둘*!

*열둘에서 발화자가 어떤 말도 없는 것은, 열둘은 완전한 자정, 죽음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이기 때문이다.

즉 자정이 되었다는 것이고, 자정은 시간상으로 태양의 완전한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열둘을 알리는 종소리는 발화자가 죽은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더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이 다가왔을 때 했을 말들을 보여주는 것이고, 실제로 차라투스트라가 죽은 것은 아니다.

 

둔중한 종

이 종은 자정을 알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 종의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생각해볼 거리들

 

삶은 무엇을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삶은 운명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왜냐면, 후에 삶은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선악의 너머를 바라보았다고 하게 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와 차라투스트라의 운명이 함께 목도했다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밤의 눈은 무엇이고, 왜 황금이 반짝 거리나?

ㅡ삶의 밤의 눈의 경우, 명확하지 않지만, 운명의 어두운 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운명의 눈동자를 바라보니 거기에 황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ㅡ여기서 금은 뭔가 귀한 것,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심장은 그 열락에 고동을 멈추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과 관련한 깨달음을 얻고, 이에 따라서 심장이 멎었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이때 진짜로 멎음을 말한다기 보다는 멎을 듯이 좋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황금 거룻배는 뭘 말하나?

ㅡ앞서 말한 황금을 의미하는 물상으로 보인다.

ㅡ정확히 거룻배가 언급되는 이유는 알기 어려우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춤추려고 안달하는 발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운명 속에서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발견한다.

ㅡ그에 따라서 어서 얻거나 다가가고자 하는 상태가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춤 춘다는 것은 이상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기에, 자신의 운명에서 가치 있는 것을 향해 이상적인 행동을 하려고 했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기도 하다.

 

두 번 딸랑이를 흔들었다는 건 뭘 말하나? 왜 차라투스트라의 발은 춤을 추겠다고 안달했나?

ㅡ현재의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서술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두 번 이상을 위해서 노력할 기회를 얻는데, 서문과 1권에서 첫 기회가 있었으며, 2권에서 두번째 기회가 있었다; 앎을 전하러 가는 것과 자신의 앎이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내려가는 것.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이러한 두 기회가 주어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이런 기회에 차라투스트라는 들떠서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데, 이러한 점을 춤을 추겠다고 안달했다고 표현한 걸로 보인다.

 

그대 쪽으로 뛰어올랐다는 건 뭘 말하나? 왜 그대는 내 도약을 피해 달아나나?

ㅡ그대가 운명을 말하므로, 운명의 기회에 자신을 던졌다는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두 기회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실패로 이어졌기에, 운명이 자신의 도약을 피해 달아났다고 표현하게 된다.

 

달아나며 휘날리던 머리채가 나를 향해 혀처럼 날름거렸다는 건 뭘 말하나? 그대의 뱀은 무엇인가?

ㅡ운명의 머리칼은 후술되는 뱀이라고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가 2번 도전했는데, 그때 운명이 차라투스트라를 피했고,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실패한다.

ㅡ이 과정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절망하게 되는데, 이 절망을 머리채, 뱀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그리고 앞서 「차라투스트라, 3권 2장」에서 양치기의 목을 뱀이 틀어막았던 것과 같은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왜 그대는 몸을 반쯤 돌린 채 있고, 눈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나?

ㅡ운명이 몸을 반쯤 돌렸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를 외면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하지만 눈이 열망에 차있으므로, 무언가를 의도하고서 차라투스트라를 외면했다는 이야기로 생각해봄직하다.

 

굽은 눈길로 굽은 길을 가르친다는 건 뭘 말하나? 굽은 길에서 내 발은 계략을 배운다는 건 뭘 말하나?

ㅡ운명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운명의 길이 직선이 아니라는 것, 휘어졌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다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

ㅡ즉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것인데, 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넘어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할 방법을 찾게 된다.

 

그대가 가까이 있으면 두렵고, 멀리 있으면 그립고, 달아나면 끌리고, 찾으면 멈칫한다는데 왜 그런가?

ㅡ이는 그대를 운명으로 바꿈으로써 해석이 가능하다.

ㅡ운명이 자신에게 가까이 드러나 있으면, 인간은 두려움에 쌓인다.

ㅡ멀리 있으면,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한다.

ㅡ마찬가지로 자신의 운명에 따라 지내다가 운명을 놓치면, 운명을 찾으려고 한다.

ㅡ그런데 막상 운명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선택을 해야 맞을지 고민하게 된다.

ㅡ이런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대의 차가움은 왜 불을 붙이고, 미움은 왜 유혹하며, 달아나면 왜 묶이고, 비웃음을 나를 감동시키나?

ㅡ운명의 차가움은 열의를 가지게 한다는 뉘앙스로 보인다.

ㅡ운명의 미움을 받으면,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하기에 유혹한다고 보는 듯하다.

ㅡ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면, 다시금 운명을 파악하려고 하게 되는데, 이를 달아나면 묶인다고 한 것 같다.

ㅡ운명이 비웃으면, 감동을 준다고 하는데, 감동을 준다는 단어는 rühren인데, 이는 ‘움직이다’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ㅡ따라서 운명이 비웃으면, 행동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왜 삶은 사로잡는 자, 농락하는 자, 유혹하는 자, 탐색하는 자, 발견하는 자인가?

ㅡ삶이 운명이라고 할 때, 운명은 인간을 사로잡고, 농락하며, 유혹하고, 각각의 운명에 맞는 사람을 찾고 배정한다.

ㅡ이런 특징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왜 삶은 죄도 없고, 인내하지 않고 바람 같으며, 아이의 눈을 한 죄수인가?

ㅡ삶은 그야말로 야속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ㅡ죄가 없다는 말은 순수함을 잘못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삶/운명은 인간이 따라오든 말든 그야말로 자신만의 길을 따라 나아가며, 냉혹하다.

ㅡ그런데 이러한 운명의 특징은 운명이 의도한 것이 아니기에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왜 운명은 악동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가냐고 하는가? 왜 운명은 개구장이이면서 감사하지 않는 자인가?

ㅡ앞서 말한 것과 같은데,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에 따라 살다가 실패하면서 방황하게 된다.

ㅡ그렇기에 운명이 자신을 데리고 가다가 두고 어디로 사라진 모양새로 느껴지는 것이다.

ㅡ이처럼 운명은 자신이 필요한 순간에 개인을 잘 이끌다가 자기 할 일하러 사라지는데, 이때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은 자신의 순응함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 운명을 볼 수 있다.

ㅡ이런 특징을 설명하는 것 같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의 흔적에 따라 쫓아가나? 왜 손을 내밀어 달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두 번의 시도와 그에 따른 실패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파악하기 힘들어하고 있다.

ㅡ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알려주길 바라게 되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동굴이 있고 덤불 숲이 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현재 처한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후술되다시피, 길을 잃기 좋은 곳이다.

ㅡ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방황하는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다.

 

부엉이와 박쥐의 퍼덕임은 뭘 말하나?

ㅡ방황 속에 사는 존재들로, 방황 속에 있는 자를 압박하는 목소리로 생각해봄직하다.

ㅡ즉 방황하는 차라투스트라를 유혹하고 주저 앉게 만드려는 존재들이다.

 

울부짖음과 짖어댐을 개한테서 배웠다는 건 뭘 말하나?

ㅡ개는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사회화된 동물이다.

ㅡ그런 점에서 개는 사회화된 소리를 외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방황 속에서 사회적 비판을 겪게 되어서 이를 이와 같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대는 하얗고 앙증맞은 이빨을 드러내며 귀엽게 위협한다는데, 왜 그런가?

ㅡ방황하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그대 혹은 부엉이와 박쥐가 위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의지를 단단히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위협에 끄떡없는 상태인 듯하다.

ㅡ그런 점에서 앙증맞은 이빨로 귀엽게 위협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춤은 왜 온갖 장애를 넘어서는 춤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데, 방황하기도 하고 곤란을 겪기도 한다.

ㅡ그럼에도 운명을 향한 차라투스트라의 의지는 단단하므로, 이런 방해와 곤란을 견디며, 이겨내며 나아가게 된다.

ㅡ이에 따라서 온갖 장애를 넘어서는 춤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여기서 춤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사냥꾼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의 흔적을 따라 나아가며 이상을 건지려고 한다.

ㅡ이때 운명이 협력해주길 바라는데, 이를 두고서 운명에게 개가 되려는 건지, 자신의 사냥감이 되려는 건지 묻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도약하다가 넘어지나?

ㅡ차라투스트라는 두 번의 실패 이후로, 자신의 삶을 긍정해야 하는 문제에 마주치는데, 이때 시도하여도 잘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ㅡ이를 도약하다가 실패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그대와 함께 사랑스러운 오솔길을 걷고 싶다고 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오솔길은 영원의 길로, 운명의 영원한 반복을 말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 나아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한적하고 다채로운 덤불을 지나는 오솔길은 뭘 말하나?

ㅡ한적하다는 건 고독함을 나타내고, 다채로운 덤불은 길을 잃는 환경, 즉 방황하는 상태를 말한다.

ㅡ즉 고독하고 방황하게 되는 운명을 말하는 중이다.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삶에게 지쳤다면 양치기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잠드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과 함께 나아가는 것에 운명이 지쳤다면, 이제 자신과 함께 하지 말고, 양치기/사람들을 이끄는 자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쉬라고 한다.

ㅡ이는 곧 다시 자신과 같은 운명을 가진 존재가 나타날 때까지 쉬라는 이야기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삶을 업고 가려고 하나?

ㅡ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자신의 운명의 목적을 이루고 싶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 삶은 차라투스트라가 마실 것을 줘도 안 마시려고 하나?

ㅡ운명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즉 운명의 반복 속에서 차라투스트라가 태어났기에, 운명에게는 앞으로 다른 차라투스트라가 더 나타날 수 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ㅡ그런 점에서 현재의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자신을 바라보며 노력해도, 현재의 차라투스트라를 주목하며 관심을 두려 하지 않을 수 있다.

ㅡ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왜 삶은 저주받은 날쌔고 유연한 뱀이며 미끄러운 마녀인가?

ㅡ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잡히지 않는 존재로, 또 자신을 농락하는 존재로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두 개의 자국과 붉은 얼룩을 느끼나?

ㅡ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두 번의 실패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양치기로 있는 일에 지쳐버렸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의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겨 두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고 절망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기에, 운명을 믿고 따르기 보다 운명을 이해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ㅡ그러면서 영원회귀에 대한 이해를 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마침내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채찍을 언급하나?

ㅡ여기서 채찍은 운명을 통솔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된다.

ㅡ앞서 「차라투스트라, 1권 18장」에서 채찍이 언급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ㅡ어떻든 간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더는 운명에 이끌리지 않고, 운명을 이해하고 자신을 긍정하리라 마음먹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운명은 어떤 사랑스러운 사상을 가지고 있나?

ㅡ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후술하는 내용으로 볼 때, 운명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더라도, 운명 속의 개인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보인다.

 

왜 차라투스트라와 운명은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하지 않나?

ㅡ그저 순리에 따라 나아가기 때문에, 사회적 선과 악을 행하지 않는다.

 

선악의 저편에서 찾은 섬과 푸른 초원은 뭘 말하나? 차라투스트라와 차라투스트라의 운명 둘이서만 찾았다는 건 뭘 말하나?

ㅡ선악의 저편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의 저편을 말하고, 이에 따라 찾는 것은 현생에 대한 긍정과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이다.

 

ㅡ이 현생에 대한 긍정과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삶은 차라투스트라의 운명으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ㅡ이 둘이 서로 잘 지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과 현생에 대한 긍정은 아무나 하지 못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잘 대해줬다고 하는데, 뭘 해줬나?

ㅡ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운명은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름을 향해서 잘 나아가게끔, 중간에 포센라이서나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의 범죄자, 「차라투스트라, 1권 8장」의 젊은이가 되지 않게끔 해줬다.

ㅡ이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ㅡ만약 운명이 보살피지 않았더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긍정하지도 못하고 절망감 속에서 향락적으로 지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운명은 왜 지혜를 질투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갖췄는데, 지혜라는 여인이 차라투스트라를 보살폈기 때문이라고 표현해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의 운명은 차라투스트라가 잘 성장하는데 기여함으로써,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좋아하게끔 하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지혜가 사라지면, 삶은 차라투스트라에게서 떠나나?

ㅡ차라투스트라의 운명은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있을 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삶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신실하지 않다고 지적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운명을 끝낼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으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 3권 13장」에서 짐승들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보라!

     그대가 지금 죽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러면서 그대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우리는 그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에게 아직은 죽지 말기를 간청한다!

 

웅웅대는 둔중한 오래된 종은 뭘 말하나?

ㅡ여기서 언급되는 종의 의미는 명확하지는 않다.

ㅡ앞서 ‘청명한 하늘빛 종’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ㅡ어떻든 자정을 알리는 종인데, 이 자정은 하루의 끝을 말한다.

ㅡ하루를 개인의 삶으로 본다면, 자정은 죽음에 이른 순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웅웅대는 둔중한 오래된 종은 차라투스트라의 죽음을 알리는 종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했을까? 왜 삶은 차라투스트라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는가?

ㅡ차라투스트라가 운명에 대고 말한 것은 영원회귀 속에서 현재의 자신은 죽고 사라져도 다시금 자신이 온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ㅡ그렇기에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죽음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ㅡ영원한 회귀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면 말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 이상을 위해서 노력했던 존재다.

ㅡ이런 존재에게 이상을 위한 노력이 덧없고 방법이 없어지면, 무기력해지게 된다.

ㅡ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향락적이거나 세상을 부정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ㅡ하지만 그와 달리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할 방법을 찾았다.

ㅡ삶을 긍정하기 위한 사색의 끝에서 나타난 운명의 진실을 차라투스트라는 운명에게 말했고, 운명은 이를 아는 차라투스트라를 보며 놀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와 삶은 왜 함께 울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수용을 하면서 슬픔에 잠긴 것으로 보인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의 본인의 현생에서 누리는 행복이 그리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ㅡ삶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일생을 살면서 이상을 위한 노력과 희생을 했고, 그 결과가 다음 세대를 위한 죽음 밖에 없다는 것, 그러한 삶을 산 존재에 대해서 동정한다는 점에서 울었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삶은 진정한 의미로 차라투스트라를 동정한 것이다.

 

3절의 하나에서 열둘까지 언급되는 말은 무엇을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을 두고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이떄 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인간이여,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죽음을 앞두고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내 운명을 긍정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얻었다.

     세계, 운명은 깊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이 있는 것이다.

     세계를 두고 슬퍼하는 것도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세계를 두고 기뻐하는 것, 이것은 슬픔보다도 더 깊은 이해 속에서 가능하다.

     슬픔은 소멸됨을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기쁨은 영원한 반복을 말한다.

     깊고도 깊은 사색 속에서 떠올리는 영원한 반복을 말이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열하나 까지는 말을 쓰다가 열둘에서는 말을 쓰지 않는가?

ㅡ열두번째 종을 치는 순간은 자정의 끝이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