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4장 의역 (완3) (큰 동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7. 31. 12:45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4장 큰 동경


         
14장 개괄

 

14장은 앞서 13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영혼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이다.

영원회귀에 대한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14장에서 언급되는 영혼은 정말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현재 영혼이 아니라, 영원회귀 속에서 나타나는 미래의 차라투스트라의 영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원회귀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의 허무함을 극복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가 미래에 나타날 것이란 것, 그리고 그 사람은 다시금 자신처럼 이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또 미래의 존재를 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기에, 노력의 덧없음이 해소되는 것이다.

 

이로써 차라투스트라의 허무주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본문

 

 

미래에 나타날, 저와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여,

저는 당신이 과거의 탐구자가 했던 노력을 가치있게 만들어주기를,

그리하여 그들의 노력이 미래에 이바지할 수 있게 도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과 순간 속에서도 이상을 행동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당신이 부조리와 그릇된 것들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세상에 올바름을 알리려 노력했고*,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 구속하려 하는 것들을 찾아 비판을 하였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후대를 위해 부조리와 그릇된 것을 없애려 노력했어도, 그의 노력 중 일부만 후대에게 유효하게 전해질 것이다.

 

저는 당신이 그릇된 사회적 미덕과 죄에서 벗어나 올바른 것을 따르게끔 설득했고,

당신에게 스스로 판단하라고 가르치면서,

미덕과 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벗어나게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사회의 부조리한 것들을 거부하거나 사회적이지 않지만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행하려고 할 때,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마련해두었습니다.

제가 마련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당신은 올바른 이해를 당당히 말하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떳떳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별도의 근거를 제시한 바는 없고, 차라투스트라가 이제껏 앞서 말한 가르침들을 말한다.

이것들은 관련한 주장을 펼칠 때 인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기존 사회의 가치와 규율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자유롭게 평가해 보고

그중에서 올바른 것은 유지하되,

새로운 가치와 규율이 필요하다면, 만들어내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사회에 순응한 사람들이

과연 당신처럼 가치와 규율에 대해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얻는 즐거움,

이상적 미래를 그리며 얻는 즐거움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부조리와 그릇된 것들이 당신을 갉아먹지 않게 하라고,

오히려 당신을 갉아먹으려는 저 부조리와 그릇됨을 경멸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타인이나 사회 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생기는 사회에 대한 경멸을 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도록,

당신의 의지가 올바름과 성숙함을 선호하게끔 스스로를 설득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분별없이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게끔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이야기에 따라 행동한다면,

저는 당신을 "올바름을 향해 고난 속으로 나아가는 자", "올바름으로 향하는 운명을 사는 자"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기존 가치를 벗어나는 것이 올바르다고 주장함으로써,

당신이 기존 가치와 질서를 벗어날 때 용기를 가질 수 있게,

그래서 보다 쉽게 기존 가치와 질서를 벗어나 올바르게/왜곡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탐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당신을 저는 “올바름을 향해 나아갈 운명”이라고,

그리하여 운명에 따라 스스로 탐구하는 당신을 "과거 탐구자들의 노력을 의미 있게 만드는 존재"라고,

다시 말해, "미래에 이상적인 사회가 나타날 수 있게 하는 탯줄과 같은 존재"라고,

이를 위해 "올바른 것을 알리는 존재"라고 부릅니다.

 

저는 당신이 기존의 가치와 규율에 대해서, 여유를 가지고 살필 수 있도록 했고,

그렇게 새로운 가치와 규율을 만들며, 그 가치와 규율에 대해서도 검토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올바름을 추구하게끔 한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부조리한 세상에서 처세하는 법, 올바름을 추구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이를 받아들이고, 올바른 이해와 성숙한 태도를 갖춘 자가 되었죠.

 

성숙해진 당신은 이제 많은 앎을 지녔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 합니다.

당신의 그 충만함이 넘쳐흘러 주변에 나눠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쑥스러워하고 있군요.

 

이로써, 어디에도 당신처럼 사랑이 넘치는 존재, 포용적인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이상적인 미래를 위한 과거 사람들의 노력이 빛을 볼 수 있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

 

 

잘 익은 포도

올바른 이해로 충만해진 자는 자신의 앎을 타인에게 선사하려고 한다.


 

오, 저와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여,

저는 당신에게 제가 가진 모든 앎을 주었고, 이제 제게는 더 나누어 줄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당신은 제게 슬픈 눈빛*을 하고 미소 지으며 말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요?

     당신이 제게 고마워해야 할까요?

     당신이 주고자 했으므로, 당신이 제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겠죠?

     누군가에게 주려고 한다는 것은 주는 사람이 주길 바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받는다는 것은 주는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미래의 존재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슬픈 눈빛을 보이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살아생전에 제대로 된 공감과 인정을 받지 못한 채로 살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끼기에 슬픈 눈빛을 하는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자신도 그와 같은 운명을 살 것임을 직감하게 되기 때문에 슬픈 눈빛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앎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 자신의 앎의 가치를 바로 봐줄 사람을 간절히 찾았지만, 실패한다.

그런데, 영원회귀를 통해, 미래의 자신과 같은 운명을 사는 자를 추측하게 된다.

이를 통해서 차라투스트라는 미래의 존재로부터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소망을 이루게 된다.

이때 과연 누가 고마워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놓인다.

미래의 존재는 차라투스트라의 앎들을 통해서 성숙해지게 되어 차라투스트라에게 고맙게 되고,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공감과 인정을 얻게 되니 미래의 존재에게 고맙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차라투스트라가 14장의 말미에서 정해준다.

 

저는 당신의 그 슬픈 미소를 이해합니다.

이제 당신은 또 다른 미래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군요.

*미래의 존재가 또 다른 미래의 존재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자신 역시 차라투스트라처럼 공감과 이해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미래의 존재가 공감과 이해를 받으려면, 과거의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또 다른 미래의 존재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래서 또 다른 미래의 존재를 그리워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세상을 바라보며 당신의 풍요로움을 나눠줄 존재를 찾고 기다립니다.

함께 이상적 미래를 향해 나아갈 존재를 찾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슬픈 미소를 짓는 당신의 눈에서 보입니다.

 

오, 저와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여,

당신의 슬픈 미소를 보고서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들조차 당신의 미소가 담고 있는 성숙함*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고 말 것입니다.

성숙한 당신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불평하고 울어대려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숙함은 미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헌신하는 성숙함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을 사는 사람은 현생에서의 행복보다 이상적인 미래에 이바지하는 것을 더 바라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4권 20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행복보다 과업에 더 뜻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저와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여,

이처럼 고된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 슬프고도 고된 운명*을 바라는 것입니까?

*차라투스트라나 미래래의 존재의 운명이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열심히 사색하고 탐구했음에도 공감이나 이해를 받지 못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면받는 운명을 슬프고도 고되다고 말하는 것이다.

 

    “운다는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까?

     불평하는 것은 곧 불만을 갖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제 운명을 사랑합니다.”

이처럼 당신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에, 울며 고통을 토로하기보다 미소 지으려고 하는 것이죠.

 

당신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이상을 위해서 앎을 설파하고, 이상 사회가 오길 기대하면서 오는 고통을

눈물로 쏟아내지 않고, 미소 지으며 견디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에 눈물을 쏟아내고 당신의 운명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면,

삶이 저무는 시점에서 오는 '노력의 덧없음'에 당신의 운명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면,

당신은 미래를 향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래의 존재가 살게 되는 운명은 살아있는 동안에 사람들에게서 공감과 이해를 받지 못하게 된다.

왜냐면,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또 다른 자기 자신에게서만 이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로 인해, 이 존재는 자신과 같은 운명을 살 존재가 나타날 미래를 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미래를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직설적인 글보다는 문학적인 노래나 시가 더 낫다고 보기에, 시나 노래를 부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사람들 사이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회자되어, 미래의 존재에게 닿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공감 받고 이해 받을 수 있다.

 

오, 저와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여,

이렇게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우리의 운명을 알려주면서, 저 역시 슬픈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오, 저와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여,

미래를 향해 노래하길 바랍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의 운명에 몰입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당신을 공감하고 이해할 '또 다른 미래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기적이 주어질 수 있을 때까지,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존재들**, 올바름을 추구하던 자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나와 당신과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존재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존재'를 마주할 때까지.

*영원회귀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미래에 나타날 A가 미래의 존재라고 한다면, A에게는 미래에 나타날 B가 미래의 존재가 된다.
이에 따라서, B가 A에게 있어 또 다른 미래의 존재가 되는데, A가 이를 떠올릴 수 있게끔 노력하고 깨달아서 B를 향해 노래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존재들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정신을 지니는 존재들을 말한다.

즉 영원회귀 속에서 나타나게 될 차라투스트라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존재*는 나와 당신, 자유로운 존재들을 해방시키는 자입니다.

우리와 같은 운명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자는 이름이 없지만, 미래에 이르러서는 이름을 가지리라 생각**합니다.

미래의 나, 당신의 노력은 그러한 존재가 나타나는 미래를 가늠케 합니다.

*앞 문단에서 말하는 '나와 당신과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존재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존재'를 말한다.

아주 먼 미래의 존재로, 차라투스트라에서부터 여러번의 영원회귀의 반복을 거쳐 나타난 존재다.

이 존재는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존재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게 해주는데, 이 결실은 이상 사회이므로, 이 존재는 이상 사회에 거의 근접해있거나, 이상 사회 속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존재가 몇 번의 반복을 거쳐서 나타나는 이상적인 존재다.

이 존재를 어떻게 부를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다.

 

이미* 당신은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군요.

이미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버티기 위해 노력하고 있군요.

이미 당신은 운명에 따라 살아가며 겪는 슬픔 속에서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며, 이상적인 미래가 주는 행복감 속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군요.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이미'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미래의 존재가 특정 상태에 놓여 있음을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미 당신은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군요"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미래의 존재가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는 상태를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오 저와 같은 운명을 살아갈 자여,

이제 당신에게 저는 제 마지막 깨달음까지 주었습니다.

이로써 제게는 남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미래를 향해 노래하라고 한 것,

그것이 제 마지막 깨달음*이었습니다.

*영원회귀를 통해 살면서 공감도 이해도 받지 못하던 운명을 긍정하는 방법을 말한다.

미래를 향해 노래함으로써,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공감과 이해를 받을 수 있다.

 

제가 당신에게 절망을 이겨내는 마지막 깨달음을 알려주었으니, 이제 말해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가 고마워해야 할까요?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당신이 미래를 향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에게 고마울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슬픈 미소의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동료를 찾던 과정에서 실패하고,

결국 영원한 반복 속에서 마주할 미래의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러한 운명은 그에게 다행이면서도 슬픔을 자아낸다.


생각해볼 거리들

 

오늘이라는 말을 언젠가는과 일찍이라고 말처럼 하라고 가르쳤다는데, 이건 뭘 말하나?

ㅡ’언젠가는’은 미래를 말하고, ‘일찍이’는 과거를 말한다.

ㅡ창조자는 올바름을 추구하면서 과거의 문제점을 찾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려고 하게 된다.

ㅡ따라서 창조자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ㅡ그러한 창조자인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을 과거의 반영이자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서 존재하는 걸로 인식하게 하려고 위와 같은 가르침을 했다고 할 수 있다.

ㅡ즉 오늘은 단순히 과거와 미래로부터 분리된 오늘이 아닌 것이다.

 

여기와 저기와 거기서 윤무를 추라고 하는 것은 뭔가?

ㅡ여기서 윤무는 모여서 춤을 추는 것인데, 단순히 춤을 추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ㅡ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 춤을 춘다는 것은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ㅡ그러므로 여기 저기 거기서 춤을 추는 것은 어디서든 이상에 따라 행동하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모든 구석진 곳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구석진 곳은 후미진 곳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구석지고 으슥한 곳의 의미를 담는다.

ㅡ이에 따라서 좋지 못한 곳, 양지 바르지 못한 곳, 그릇된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앎을 세상에 남김으로써, 미래의 자신이 그릇된 곳으로 갈 때 방비할 수단을 마련했다.

ㅡ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먼지와 거미와 어스름을 몰아냈다는 건 뭔가?

ㅡ먼지는 불편하게 하거나 더러운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인다.

ㅡ즉 부조리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ㅡ거미의 경우, 구속하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이고, 사회적 규율이나 종교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ㅡ어스름은 어둠을 말하고, 그릇된 이해를 언급하는 걸로 보인다.

 

작은 수치심과 구석의 덕을 닦아내고 태양 눈 앞에 서게 한 것은 뭘 말하나?

ㅡ작은 수치심과 구석의 덕은 부조리한 현생의 관습이나 전통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후대의 자신이 부조리한 관습이나 전통을 따르지 말고, 태양, 즉 올바른 이해 앞에 서게 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왜 정신이라 불리는 폭풍을 동반하고서 차라투스트라는 파도치는 너의 바다로 불어 닥치나?

ㅡ기본적으로 사회는 개인이 ‘의식’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ㅡ그런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의식’을 강조하는 존재다.

ㅡ이 ‘의식’을 ‘정신’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개인이 의식하고 사색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너의 바다로 불어닥친 것이다.

 

ㅡ그런데 왜 파도치는 너의 바다일까?

ㅡ기본적으로 바다는 두 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모든 담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위버멘쉬를 나타낸다; 이때 담수는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를 나타내고, 위버멘쉬는 이러한 것들 것 이해하고 포용하는 존재로서 언급된다.

ㅡ다른 하나는 소금기 있는 물로서, 마시면 죽는 것이 가득한 곳으로, 부조리한 사회를 나타낸다.

ㅡ여기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위버멘쉬적 존재로서의 바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가 되려고 하는 후대의 자신에게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따르지 말고, 스스로 사고하라면서, 고민하고 혼란에 빠진 후대의 자신에게 다가선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온갖 구름을 날려버리고, “죄”라고 불리는 여인조차 목졸라 죽였다는 건 뭘 말하나?

ㅡ죄라는 여인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주창하는 존재로 보인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죄를 벗어나라고 하므로, 그러한 여인을 죽였다는 것의 의미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비판하고 부정했다는 의미가 된다.

 

ㅡ온갖 구름을 날려버렸다는 것의 경우, 구름은 태양을 가리는 것이며,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말하므로, 올바른 이해를 막는 것으로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ㅡ즉 그릇된 것인데 올바른 것인 양 여겨지는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ㅡ그런 면에서 그릇된 이해를 날려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폭풍처럼 ‘아니오’ 라고 말할 권리와 맑은 하늘처럼 ‘그렇다’ 라고 말할 권리를 주었다고 했는데, 뭘 말하나?

ㅡ폭풍은 비판적이며 공격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이다.

ㅡ즉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대고 부정할 권리를 후대의 자신에게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의 문제점을 비판했고, 그래서 후대의 자신은 자신의 비판에 따라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맑은 하늘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구름이 없는 하늘로, 태양이 비추는, 올바른 이해가 비추는 상태를 말한다.

ㅡ이에 따라 그릇된 걸 따르지 않고 올바른 것을 긍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마찬가지로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므로,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올바름을 긍정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왜 너는 빛처럼 조용히 서 있다가 부정하는 폭풍을 뚫고 간다고 하나?

ㅡ빛은 올바른 이해를 말한다.

ㅡ여기서 폭풍은 후대의 차라투스트라에게 나타난 폭풍이므로, 사회적 폭풍이라고 볼 수 있다.

ㅡ즉 사회적 반발이나 배척, 부정인 것이다.

ㅡ결국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른 이해를 가진 채로 사회적 반박이나 배척 속을 뚫고 나아간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미 창조된 것과 아직 창조되지 않은 것에 대한 자유를 되돌려 주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창조자는 기존에 창조된 가치에 대해서 부수고 고치고, 새로운 가치를 쓰려고 한다.

ㅡ이러한 자유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에서 벗어남으로써 가능해진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사회적/종교적 규율에 대해 비판하고,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긍정해줌으로써, 후대의 자신이 좀 더 올바른 가치를 찾기 쉽게 만들었다고 본 듯하다.

 

ㅡ올바른 가치를 추구하며 노력하는 것은 이상적 미래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 되며, 이는 곧 즐거움으로 작용할 수 있다.

ㅡ미래에 다가올 일의 환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이상적 미래를 위해서 노력한 자이므로, 창조자로서 살아갈 후대의 자신이 미래의 환희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벌레가 야금야금 갉아먹는 경멸은 무엇이고, 이와 다른 경멸은 무엇인가?

ㅡ벌레가 야금야금 갉아먹는 경멸은 자신을 갉아먹는 경멸스러운 것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ㅡ이는 사회적 규율이나 종교적 규율에 따르면서 나타나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ㅡ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것은 되려 우리 자신을 갉아먹는 저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경멸하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가르치지 않고, 위대한 경멸을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경멸은 위대한 경멸이자 사랑하는 경멸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경멸하게 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경멸하게 하는 것은 자기 사랑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며, 자신을 사랑하고 살피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므로, 성숙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경멸이자 자신을 사랑하는 경멸이 된다.

 

너의 근저들을 설득하여 네게 오게 하라고 가르쳤다는 건 뭘 말하나? 왜 태양이 바다를 자기 높이에 이르도록 설득하듯이 그랬다고 하나?

ㅡ여기서 근저는 Gründe의 번역어인데, 이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ㅡ이에 따라 보면 “너의 이유들을 설득하여 네게 오게 하라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유’라는 단어로 보고 진행하기에는 표현이 부적절하므로, ‘이유’를 ‘동인’이나 ‘의지’로 바꿔보는 것이 괜찮아 보인다.

ㅡ그렇게 보면, “너의 의지를 설득하여, 네게 오게 하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는 “사회/종교를 우선시하려는 의지를 설득해서 너 자신을 향하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ㅡ태양이 바다를 자기 높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의 경우,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갖춘 상태의 존재를 말하고, 바다는 부조리 속에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그러므로 태양이 바다를 자기 높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가진 자가 부조리 속에 있는 자를 성장시키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ㅡ결국 현재의 차라투스트라가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성장하게끔 설득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너 자신에게 “고난의 전환”과 “운명”이라는 이름을 주나?

ㅡ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현재의 차라투스트라에 의해서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ㅡ왜냐면, 현재의 차라투스트라가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ㅡ이로써 고난이 시작되는데, 이러한 고난이 올바름으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ㅡ따라서 고난의 전환은 고난이 올바름을 향하는 계기로 전환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운명이라는 것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후대의 차라투스트라 역시 자신과 같은 운명으로 나아가기 떄문이다.

 

나는 너에게 새로운 이름과 다채로운 놀잇감을 줬다는 건 무슨 말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벗어나서 사유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ㅡ즉 기존에 사물에 부여된 가치를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탐색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ㅡ차라투스트라 입장에서 사회는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데, 이를 이름을 부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선하다’, ‘악하다’, ‘좋다’, ‘나쁘다’ 등이 이름을 붙이는 경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ㅡ이에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물에 부여된 기존의 이름 말고 새롭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ㅡ마찬가지로 이처럼 사물을 다시금 고찰하고 특징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사물은 다채로운 것이 되는데, 이를 가리켜 다채로운 놀잇감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왜 나는 너를 운명, 포괄의 포괄, 시간의 탯줄, 청명한 하늘빛 종이라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올바름을 추구할 운명으로 보기에, 너를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ㅡ’포괄의 포괄’의 경우, 차라투스트라는 최악도 최선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기에, 즉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입장이기에,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도 그럴 것이라고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ㅡ시간의 탯줄의 경우,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탯줄이라면 시간은 태아가 된다.

ㅡ즉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이 자라고 성장하는데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ㅡ그러므로 이때의 시간은 미래, 이상 사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ㅡ청명한 하늘빛의 종의 경우, 청명한 하늘은 구름이 끼지 않은 하늘이며, 이는 태양이 잘 비추고 있는 하늘이다.

ㅡ태양이 잘 비추고 있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잘 나타난다는 이야기와 같다.

ㅡ그런 점에서 청명한 하늘빛의 종은 올바른 이해를 담고 이를 알리는 종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너의 토양이 마시도록 모든 지혜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말인가?

ㅡ이 구절은 현재의 차라투스트라가 후대의 자신에게 지혜를 전해준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물론 이때 서로 직접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나 이야기의 전파 등과 같은 간접적 수단으로서 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의 내용을 참고하자.

     산맥에서 가장 짧은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긴 다리를 가져야 한다.

     산봉우리는 잠언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잠언은 크고도 높게 자란 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엷고 깨끗한 공기, 가까이 있는 위험, 즐거운 악의로 가득 찬 정신.

     이런 것들은 서로 잘 어울린다.

ㅡ이때 잠언을 통해서 크고 높게 성장한 자들이 소통하는데, 현재의 자신과 후대의 자신이 이를 통해 소통한다고 할 수 있다.

 

ㅡ이를 통해서 앎이 전승되면, 후대의 자신은 성장하게 되는데, 이를 지혜를 주고 토양이 마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 담근 지혜의 포도주 일체와, 오래 묵고 도수 높은 지혜의 포도주 일체는 뭘 말하나?

ㅡ새로 고안한 지혜와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오는 지혜를 말한다.

ㅡ여기서 새로 고안한 지혜는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나오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오는 지혜는 지혜이긴 한데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지혜가 아닐까 싶다.

ㅡ즉 단순히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토록 구전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ㅡ예를 들어, “삶은 허망하고 덧없다”와 같은 지혜는 차라투스트라가 후대의 자신에게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러한 세간의 지혜는 차라투스트라가 전하는 지혜가 아닐 것이다.

 

모든 태양과 밤과 침묵과 동경을 부어준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무슨 앎을 전하는지, 무슨 비판을 하는지, 어떤 처세를 하는지, 어떤 것을 바라며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 전하는 앎을 태양이라고 할 수 있고, 밤은 차라투스트라가 비판하는 그릇된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이 구절은 후대의 자신에게 앎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모든 비유는 앎의 일종으로 봐야 하고, 그런 면에서 태양은 올바른 이해를 상징하며, 밤은 어두운 시간이므로, 그릇된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ㅡ침묵은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 사이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것,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처세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동경의 경우, 차라투스트라가 추구하던 것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너는 이제 너무 풍요로워서 힘겹게 서있게 되나?

ㅡ현재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현재의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장하게 된다.

ㅡ마치 태양에 의해서 현재의 차라투스트라가 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 서문 1장」에서 풍요로워짐에 따라 사회로 나아가려고 하게 되는데, 이 상태를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도 동일하게 겪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라!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나는 내 지혜에 싫증이 나 있으니,

     내 지혜를 갈구하는 손들이 있어야겠다.

     (중략)

     넘쳐흐르려는 이 잔을 축복해달라!

     황금빛 물이 흘러나와 그대의 환희를 온 누리에 비추어 줄 이 잔을!

ㅡ즉 앎을 나누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인 것이다.

 

행복이 마구 밀려들어 눌러대지만, 넘쳐흐르는 풍요를 여전히 기다린다는 건 뭘 말하나? 그런 기다림을 왜 부끄러워하나?

ㅡ이는 앞의 문장으로 인하여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앎이 넘쳐 흐르고 있는 상태, 그래서 남에게 주고 싶어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ㅡ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사색을 통해서 올바른 이해를 얻는 행복을 누리는데, 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앎들이 밀려나오게 될 것이다.

 

ㅡ넘치는 풍요를 기다린다는 말은, 명확하지 않으나, 넘치는 풍요에 따라서 이를 받아줄 사람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보인다.

ㅡ즉 자신의 앎이 주변에 나눠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앎이 나눠지기를 바라는 과정은 차라투스트라가 타인에게 준비하고 마련한 것이며, 바라고 기대하는 일이기에 부끄럽게 느껴지는 듯하다.

 

왜 너보다 사랑 넘치고 포괄적이며 광대한 영혼이 없다고 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앎을 나누려고 하며,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ㅡ이러한 점은 사람에 대한 사랑, 올바른 이해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데, 이러한 상태가 되면, 사랑이 넘친다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ㅡ포괄적이라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ㅡ최악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니 말이다.

ㅡ광대한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가 후대의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고 나서 왜 누가 고마워해야 하는지 묻나? 왜 너는 미소를 지었지만 슬픔에 차서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후대의 자신에게 앎을 나눠준다.

ㅡ이때 후대의 자신은 차라투스트라로 인해서 앎을 받으므로, 고마워할 수 있다.

 

ㅡ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앎을 받아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자신에게 되려 고마워하게 된다.

ㅡ이런 서로가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 자신이 앎을 나눠준다고 해서 보답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곧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고독했을 것임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ㅡ즉 자신의 앎을 이해 받지 못한 채로 홀로 버텨야 했던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ㅡ이는 후대의 차라투스트라 본인의 운명이기도 하기에, 고마우면서도 슬퍼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너의 넘쳐흐르는 풍요가 이제 동경하는 손을 뻗고 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에 의해서 풍요로워진, 성장한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자신의 풍요로움을 맛볼 사람을 찾게 된다.

ㅡ즉 자신의 앎의 가치를 알고 자신과 함께 해줄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ㅡ그리고 이후부터는 이러한 사람에 대한 동경으로 그득하게 되는데,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여기서 동경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이상 사회일 수도 있는데, 문맥 상으로 보면, 사람이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네 풍요가 파도치는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보며 탐색하며 기다린다는 건 뭘 말하나?

ㅡ바다는 사회를 의미하므로, 사회를 바라보며 탐색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

ㅡ즉 후대의 차라투스트라 역시 현재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사회 속에서 자신과 뜻이 같을 사람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ㅡ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데, 바다는 사회라고 볼 때, 바다 너머는 이상 사회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성장함에 따라서 다가올 미래의 이상 사회를 탐색하며 기다린다고 말할 수도 있다.

 

넘쳐흐르는 충만에 대한 동경이 미소 짓는 너의 ‘눈의 하늘’로부터 내다보고 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넘쳐흐르는 충만은 성장한 상태를 말한다.

ㅡ여기서 성장함에 대한 동경으로 보며 이야기를 볼 수 있지만, 문맥상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미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ㅡ그래서 다르게 본다면, ‘넘쳐흐르는 충만에 따른 동경’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ㅡ이렇게 보게 된다면,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충만함에 따라 동경하는 것을 가지게 되고, 이는 이상 사회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앎을 이해해줄 사람이 되기도 한다.

 

ㅡ눈의 하늘이란 표현은, 눈 속에 하늘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이때 하늘이 청명한 하늘을 나타낸다면, 올바름을 추구하며 동경하는 것을 눈의 하늘로 표현할 것일 수 있다.

ㅡ왜냐면 눈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는 동경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ㅡ그런 점에서 이상 사회나 자신을 이해해줄 인간을 동경한다는 이야기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후대의 자신의 미소를 보면서 눈물로 녹아내리나? 왜 천사들조차 네 미소의 넘치는 선의를 보며 눈물로 녹아내리나?

ㅡ자신과 같은 운명을 살아가는 존재의 고난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ㅡ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운명을 사는 사람은 자신을 희생에서 올바름/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희생정신이 너무 숭고하므로, 천사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탄식하지도 울지도 않으려는 것은 왜 선의로 이해되나?

ㅡ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비관하며 불평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견디며 살아간다는 걸 말하기 때문이다.

ㅡ이때 그가 탄식하지도 울지도 않는 운명은 올바름을 추구하는 운명이고, 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선의로 해석된다.

 

운다는 것은 탄식하는 것이고, 탄식한다는 것은 고발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왜 그런가?

ㅡ운다는 것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방식 중 하나다.

ㅡ따라서 운다는 것은 내가 스트레스 받고 있다, 불편을 겪고 있다, 불만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 점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운다면, 그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불만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ㅡ그렇기에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울기보다 미소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ㅡ그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말이다.

 

충만에서 오는 고통, 수확하는 자와 수확되기를 고대하는 포도넝쿨의 곤궁에서 오는 고통은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충만해지면서 사람들에게 앎을 전하려고 하게 되었다.

ㅡ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겪게 되고, 노력의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ㅡ이 고통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고통을 울며 쏟아내지 않고, 미소지으며 긍정하려고 한다.

 

울기를 원치 않는다면, 왜 노래를 불러야 하나?

ㅡ자신의 운명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후대를 위해서 노래를 남기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를 통해서 또다시 태어날 후대의 자신은 앞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나마 위로와 위안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 바다가 조용해져 네 동경에 귀 기울인다는 건 뭘 말하나?

ㅡ두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바다의 해석에 따라 갈린다.

ㅡ바다가 사회를 말한다면,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앎을 공유하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올바름을 사회에 퍼뜨릴 수 있게 되는데, 이에 바다가 조용해진다면, 후대의 차라투스트라의 올바름 추구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ㅡ이는 곧 이상 사회의 도래를 말할 수 있다.

 

ㅡ다른 해석은 바다가 개인을 말하는 경우다.

ㅡ바다가 개인을 말한다면, 파도 치던 바다가 조용해지는 것이 되는데, 이는 감정적 변화를 겪던 개인이 잠잠해지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현재 노래하는 이유를 보면,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후대를 위해서 비유적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이떄 개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앎을 드러내기도 하게 되므로,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적절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동경에 차 있는 고요한 바다 위에 조각배가 떠다닌다는 건 뭘 말하나?

ㅡ여기서 말하는 조각배는 바다 위에 뜬 황금빛 경이를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사회냐 개인이냐에 따라 또 해석이 갈린다.

ㅡ사회를 기준으로 보면, 이 경이로움은 올바른 이해가 이 사회를 장악하는 것을 말하고, 개인을 기준으로 보면, 개인이 자기 운명에 대해서 긍정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사실 동경에 찬 바다 위에 배가 있는 거라서, 개인을 나타내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크고 작은 많은 짐승들, 가볍고 놀라운 발을 지닌 것 모두가 오솔길을 달린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여기서 가볍고 놀라운 발을 지녔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을 이겨낸 존재, 자유로운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금빛 경이로, 자유로운 조각배로, 주인을 향해 달린다는 건 뭘 말하나? 왜 이 주인은 위대한 해방자인가? 왜 이 주인은 이름이 없나?

ㅡ여기서 말하는 것은 경이와 조각배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주인으로 향한다는 것으로 보면, 이런 자유로운 존재들,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들을 수확하는 존재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최종적으로 올바름 추구의 결실을 맺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결국 이 주인은 앞선 올바름 추구자들의 노력의 결실을 맺는 자이자, 이상 사회를 최종적으로 이룩하는 자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결국 노력의 결실을 볼 수 있게끔 올바름 추구자들이 내달린다는 이야기고, 그 결실은 그들을 이해하는 한 존재에 의해서 수확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이때 이 존재는 위버멘쉬로 이해될 수도 있을 듯하다.

ㅡ아무튼 이러한 존재는 현재의 차라투스트라,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를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준다.

ㅡ왜냐면 이 사람이 그들의 노력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주기 때문이다.

 

ㅡ이 주인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아직 존재가 명확하지 않아 그에 따라 정확히 불릴 명칭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ㅡ이 존재는 후대에 나타날 것이므로, 후대에 이르러서는 이름이 명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미래의 노래가 왜 이름을 지워주게 되나? 왜 후대의 차라투스트라의 숨결은 이미 미래 노래의 향기를 풍기고 있나?

ㅡ미래의 노래는 후대의 차라투스트라가 부르는 노래인데, 이때는 시간이 흘렀고, 현재의 차라투스트라가 보는 것보다 더 이상적이게 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그런 이상적 존재에 대한 고찰이 좀 더 가능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미래의 노래가 이름을 지어줄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ㅡ후대의 차라투스트라의 숨결은 더 발전한 시대에서의 숨결이 되고, 이에 따라서 이상적 존재에 대한 현재보다 더 발전된 입장을 띨 것으로 보이므로, 미래 노래의 향기를 품고 있다는 언급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상기되어 꿈을 꾸는 건 뭘 말하나? 목이 말라 그윽하게 울리는 위로의 샘물을 마신다는 건 뭘 말하나? 왜 미래의 노래가 주는 지복 속에서 네 슬픔은 안식하나?

ㅡ상기되어 꾸는 꿈은 이상 사회에 대한 꿈으로 보인다.

 

ㅡ이상을 추구하는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이해할 존재와 이상 사회를 바라는데, 그것들이 바로 주어지지 않으므로 삶을 견뎌야 한다.

ㅡ이처럼 삶을 견디는 과정을 위로의 샘물을 마신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삶을 견디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위로의 샘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선대의 차라투스트라의 글을 보거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등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ㅡ미래의 노래가 주는 지복은 이상적인 미래를 동경하면서 얻는 행복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러한 미래에 대한 동경을 하면서 힘든 운명이 견뎌지는 것이다.

 

노래하라고 명하는 것은 왜 차라투스트라가 주는 마지막의 것인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과정에서 영원회귀를 떠올렸고, 그에 따라서 후대의 자신에게 노래를 해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

ㅡ그런 점에서 자기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 후대의 자신을 향해 노래하는 것인 셈이다.

ㅡ이처럼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제였으므로, 차라투스트라가 주는 마지막의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중 누가 고마워해야 하냐고 하며 더 나은 것은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함으로써 차라투스트라가 감사하게 해달라고 하는가?

ㅡ노래를 부르는 것은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ㅡ이를 통해서 두 가지가 확보되는데, 앎의 계승되면서 앎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의 삶이 긍정되는 효과가 생기고, 그러면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며 사는 동력이 생기게 된다.

ㅡ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가 대를 이어가며 계승되는 상황이 생기게 되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과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ㅡ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를 계승하고 계속 노래부르는 것은 현재의 차라투스트라에게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삶도 긍정되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