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3권 의역

차라투스트라 - 3권 16장 의역 (완) (일곱 개의 봉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TO 2024. 8. 2. 00:20

ㅡ소개
이하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히게끔 의역한 내용입니다.
기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쓴 거라서, 기존 직역본을 읽으면서 참고해서 보시면, 이해하는 데 좋다고 생각됩니다.
 
의역 내용 밑에는 생각해볼 것들에 대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이것들은 직역본을 본 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요시 참고 바랍니다.
 
ㅡ의역시 참고한 것들
기본적으로 온라인에 등재된 독일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영어본에 대한 정보만 있네요.
해석에 대한 초벌 번역은 ai를 활용했습니다.
 
- 독어본 :
Pileface 사이트의 자료

https://www.pileface.com/sollers/pdf/Zarathustra.pdf
Internet Archive 사이트의 자료
https://archive.org/details/alsosprachzarat00nietgoog/page/60/mode/2up?view=theater

 
- 영어본 :
Thomas Common의 번역

https://www.gutenberg.org/files/1998/1998-h/1998-h.htm#link2H_4_0012

 
-  AI

Chat gpt 4

 
- 한국어 번역본도 참고 했습니다.

백승영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윤순식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석현(박성현)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종 :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 제 의역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한국 해설본도 참고 하였습니다.

백승영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김동국 : 아무도 위하지 않는, 그러나 모두를 위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취미로 철학하는 남자

 


3권 16장 일곱 개의 봉인


         
16장 개괄

 

 

16장은 자신과 같은 운명을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의 특징을 나열한다.

기본적으로 차라투스트라 전 영역에서 다룬 적 있는 이야기를 한번 정리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영원회귀는 아이를 갖지 않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날 수 있다고 이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함을 덜게 되는 것이다.

 

각 절에서 언급되는 존재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절에서는 탐구하는 존재, 과거를 분석하고 승화시켜서 미래에 이바지하는 존재, 삶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 존재,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고독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2절에서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비판한 적이 있는 존재, 그럼에도 사회적/종교적 규율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3절에서는 새로운 가치 평가의 필요를 느낀 존재, 올바름을 추구할 필요를 느낀 존재를 말한다.

4절에서는 정형화된 사회적 가치 기준에 벗어나, 가치의 기준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5절에서는 사회적 규율에 대해서 토론하고 탐구의 즐거움을 아는 존재를 말한다.

6절에서는 이상과 올바름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세상을 이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존재를 말한다.

7절에서는 자신만의 가치와 규율을 만들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사태 속에서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규율을 부정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본문

 

 

-1-

 

올바른 것에 대해서 탐구를 하고, 그래서 자신과 같은 미래의 탐구적 존재를 그리는 존재라면,

과거의 부조리를 승화시켜, 이상적인 미래에 이바지하려고 하는 존재라면,

현생을 부정하는 존재들, 그러면서도 삶을 끊어내지 못하는 존재들*과 적이라면,

그릇된 이해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올바른 이해가 내려치기를 바라는 존재라면,

올바른 이해가 가득한 세상을 바라면서, 삶을 긍정하며 미래를 그리는 자라면,

*삶을 부정하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염세주의자를 말한다.

 

아, 이런 자라면,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처럼 미래를 긍정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앎을 주는 존재로서 홀로 오랫동안 있어야 합니다.

 

오, 제가 이러한 존재라면, 어떻게 영원회귀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는 몰이해 속에 있지만, 언젠가 나를 이해해줄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말한다.

 

높은 산의 번개

차라투스트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높은 산의 번개로서 오랫동안 존재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2-

 

오래된 관습과 전통, 사회적/종교적 규율을 비판한 적이 있는 존재라면,

오랫동안 지혜라 불리던 말들을 지혜가 아니라며 조롱한 적이 있는 존재라면,

종교인들의 부조리와 그릇됨에 맞서 다툰 적이 있는 존재라면,

죽음 너머/저승을 긍정하던 자들을 쓸어버리려 한 적이 있는 존재라면,

옛 종교적인 장소들, 세계를 부정하던 자들의 기념비 옆에서

그릇된 문화였다며 불쾌해하지 않고

현재를 있게 한 잔재라고 여겨 즐겁게 있었던 적이 있는 존재라면,

(누군가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흔적들 마저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그릇된 관점이 올바른 이해에 이바지했으니 말입니다.)

 

오, 제가 이러한 존재라면, 어떻게 영원회귀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물어진 유적지

차라투스트라에게 과거의 흔적은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인식된다.


 

-3-

 

기존의 가치를 벗어나서 새로 가치 판단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적이 있는 존재라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할 필요를 느꼈던 적이 있는 존재라면,

새로 가치 판단을 하면서 자연스레 웃으며 만족한 적이 있는 존재라면,

오래된 규율들 속에서 새로운 규율을 만든 적이 있는 존재라면,

그래서 오래된 규율들의 가치가 전복된 일이 있는 존재라면,

 

오, 제가 이러한 존재라면, 어떻게 영원회귀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각변동

기존 가치를 평가하고 올바른 가치를 제시하는 것은 사회에 있어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4-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존재라면,

서로 멀다고/반대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아는 존재라면,

고통과 기쁨이 다르지 않고, 최악과 최상이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존재라면,

사회적으로 좋고 나쁜 것도 결국 맥락상에서 달라지고,

가장 나쁜 것조차도 이 세계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가치관에 따라 고정불변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존재라면,

*선과 악, 고통과 기쁨 등을 말한다.

예컨대 어떤 행동이 맥락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아는 존재에 대해서 말하는 중인 것이다.

 

오, 제가 이러한 존재라면, 어떻게 영원회귀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품이 이는 항아리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의 고정된 가치를 벗어나서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로 혼합시켜버리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누군가 가치를 판단하려는 경우, 맥락 속에서 가치를 파악하기를 권한다.


 

-5-

 

사회와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이들과 사회적 규율의 부조리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존재라면,

궁금한 것을 탐구하는 즐거움을 가진 존재라면,

사회적 규율에 맞서 올바른 것을 위해서 토론하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면,

 

오, 제가 이러한 존재라면, 어떻게 영원회귀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파도치는 바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는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마주하게 된다.


 

-6-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덕이 이상/올바름을 바라는 자가 추구하는 덕인 존재라면,

올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서, 성숙한 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라면,

세상을 향한 악의*가 현생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기 위한 악의인 존재라면,

그 악의의 목적이 결국 이상 사회를 바라는 존재라면,

(이 사람의 악의는 사회적으로는 악하다고 여겨지겠지만,

결국 이상을 위해서 나타난 악의이고, 그렇기에 이 악의는 신성한 것이며, 순수한 악의가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의는 사회적으로 악하다고 평가되는 것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들이 악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올바름과 이상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악한 것을 비판하는 선한 것이라 해야 맞다.

따라서 악의라는 표현은 사회적 기준에서의 악함을 말하고 있다.

 

모두가 규율에 강제되지 않고 규율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게 모두의 정신이 새처럼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인 존재라면,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이와 같은 존재라면,

 

오, 제가 이러한 존재라면, 어떻게 영원회귀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나는 새

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 규율에 벗어나서 자신만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를 바란다.


 

-7-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고, 규율을 벗어나 자신만의 가치와 규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면,

올바른 이해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면서 그 과정을 즐기는 존재라면,

그러면서 고정된 가치를 벗어나서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가치를 파악하는 존재라면,

 

    “모든 규율은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까?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규율이 그릇됩니다.”

이렇게 말하며, 규율에 따라 말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를 바라는 존재라면,

 

오, 제가 이러한 존재라면, 어떻게 영원회귀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껏 저는 제 아이를 낳아줄 만한 여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회귀 속에서 후대의 나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영원한 회귀를 사랑합니다.

 

회귀의 반지

영원회귀는 차라투스트라에게 후대의 차라투스트라를 약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회귀는 앞날을 약속하는 결혼 반지로 차라투스트라에게 여겨진다.

 


생각해볼 거리들

 

두 바다 사이 높은 산등성이 위를 방랑하는 예언자적 정신이 충만하다는 건 뭘 말하나?

ㅡ산을 오르는 것은 어떤 탐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

ㅡ그래서 산의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ㅡ관련해서는 「차라투스트라, 1권 7장」의 내용을 참고해볼 수 있다.

     산맥에서 가장 짧은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긴 다리를 가져야 한다.

     산봉우리는 잠언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잠언은 크고도 높게 자란 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엷고 깨끗한 공기, 가까이 있는 위험, 즐거운 악의로 가득 찬 정신.

     이런 것들은 서로 잘 어울린다.

ㅡ이때 언급되는 크고도 높게 자란 자들은 탐구자/사색가들로 치환이 가능하다.

ㅡ이런 점에서 산등성이 위를 방랑한다는 것은 탐구자로서 탐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러므로 예언자적 정신, 예언자는 탐구자, 사색가를 나타내고, 예언자적 정신이 충만하다는 것은 이런 탐구자로서의 정신, 사색가로서의 정신이 충만한 자를 지칭한다.

ㅡ결론적으로 “탐구자로서의 정신이 충만하다면”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올바른 이해를 원하는 자라면, 영원회귀를 긍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적절해 보인다.

 

무더운 저지대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을 만큼 지쳐버린 모든 것은 뭘 말하나? 왜 적의를 품나?

ㅡ무더운 저지대는 습하여 활동하기 불편한 장소를 말한다.

ㅡ이에 따라서, 저지대는 억압된 장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고, 사회적 규율이 작용하는 장소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봄직하다.

ㅡ이런 장소에 있는 사람은 부조리나 사회적 규율에 따르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ㅡ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을 만큼 지쳤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ㅡ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장과 반대되는 존재들,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들을 말한다.

 

ㅡ결국 부조리를 긍정하는 자,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들에게 적의를 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무거운 구름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를 방랑한다는 건 무엇인가?

ㅡ무거운 구름의 경우, 후술되지만, 번개를 담는 구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번개는 깨우침을 주는 것을 말하므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깨우침을 유발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ㅡ즉 과거의 그릇됨을 비판하여, 미래에 유익하게 만드는 과정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러한 작업을 하는 존재를 지칭하는 듯하다.

 

가슴 속에 번개와 구원의 빛을 준비한다는 건 뭔가? “그렇다”라고 말하고 웃는 예언자적 번갯불이 될 번개를 잉태한다는 건 뭘 말하나?

ㅡ번개는 깨우침이고, 빛은 올바른 이해라면, 번개와 구원의 빛을 준비한다는 건 깨우침과 올바른 이해를 나누려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ㅡ”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긍정하는 것이고,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삶을 긍정하며 웃는 예언자적 번개를 잉태한다는 이야기인데,

ㅡ번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깨우침이므로, 삶을 긍정하는 깨우침을 주려고 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ㅡ이에 따라서, 올바른 것을 알려고 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존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언젠가 미래의 불을 밝혀야 하는 자는 오랫동안 무거운 뇌우로서 산에 걸려야 하나?

ㅡ미래의 불을 밝힌다는 것은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고 제시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이상적인 미래는 올바른 이해로 가득해야 하므로, 이러한 존재는 올바른 이해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ㅡ그리고 올바른 이해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줘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ㅡ그런 점에서 번개, 뇌우로 표현된다.

 

ㅡ그럼 왜 오랫동안 무거운 뇌우로서 산에 걸려야 할까?

ㅡ올바른 이해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게 하려는 노력에 비해 실제 올바른 이해가 지배하는 이상 사회는 쉽게 오기는 어렵다.

ㅡ그런 까닭에 올바른 이해를 지닌 채로 흔들림없이 이상 사회를 긍정하며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쉽게 걷어낼 수 없는 무거운 구름이어야 한다.

ㅡ또 이러한 자는 자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있는 공간이 아닌 사람들과 거리를 둔 공간에 있어야 하는데, 그게 도시를 벗어난 산이다.

ㅡ또한 단시간에 올바른 이해가 전파되지 않을 것이기에, 오랫동안 산에 머물러야 한다.

 

왜 반지 중의 반지인 결혼 반지 회귀의 반지란 표현이 나오나?

ㅡ결혼 반지는 앞날을 약속하는 결혼식의 징표다.

ㅡ그런 면에서 결혼 반지는 앞날을 약속하는 반지라고 할 수 있다.

ㅡ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 영원회귀라는 것은 후대의 자신을 약속하는 반지라는 점에서 약속의 징표다.

ㅡ그렇기에 결혼 반지와 회귀 반지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영원을 사랑하는 여자라고 하는가?

ㅡ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후손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자를 갖지 못했다.

ㅡ그런데 영원회귀 개념에 따르면, 자신의 후대가 영원한 반복 속에서 잉태되어진다.

ㅡ이에 따라서 영원이 여자로 취급되어, 차라투스트라에게 사랑받는 것이다.

 

분노가 무덤을 파헤치고, 경계석을 밀치고, 낡은 서판들을 부숴 굴려버린다는 건 뭘 말하나?

ㅡ기존의 사회적 규율을 부정했다는 이야기다.

 

곰팡내 나는 말을 날려버리고, 십자 거미들을 쓸고, 읍습한 묘혈로 다가선다는 건 뭘 말하나?

ㅡ그릇된 말과 종교,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것들을 날려버렸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옛 신들이 묻힌 곳, 늙은 세계 비방자들의 기념비 옆에서 세계를 축복하고 기뻐하며 앉아 있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종교나 사회적 관습, 삶을 부정하는 자들을 싫어하지만, 지금 언급되는 옛 신의 무덤이나 세계비방자의 기념비는 그들의 흔적에 불과하다.

ㅡ차라투스트라는 최악의 것들도 최선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저런 흔적들은 당시에는 별로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ㅡ그러므로 저런 과거의 흔적을 부정하지 않고 그 옆에서 세계를 축복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ㅡ왜냐면 저러한 것들은 과거가 되었고, 현재는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ㅡ즉 차라투스트라가 바라는 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늘이 허물어진 지붕 사이로 맑은 눈빛을 보내면, 왜 차라투스트라는 교회와 신의 무덤마저 사랑하나?

ㅡ하늘의 맑은 눈빛은 올바른 이해를 나타낸다; 구름이 없는 하늘을 말하는데, 구름이 없는 하늘은 올바른 이해가 가능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ㅡ또한 허물어졌다는 것은 붕괴됨을 말하는데, 여기서 교회와 신의 무덤의 붕괴를 말한다.

ㅡ즉 교회의 무너짐을 말하는 것이다.

ㅡ이런 상황은 올바른 이해가 득세한 상황이므로,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의 잔재들에 대해서 악의를 품지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한 줄기 숨결이 창조의 숨결로부터 왔다는 것, 우연에게 별들의 윤무를 추라고 강요하는 필요가 왔다는 건 뭘 말하나?

ㅡ창조는 기존의 가치를 평가하고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ㅡ즉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치 평가와 가치 창조의 필요가 주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ㅡ우연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그렇기에 다양하게 해석되며 그릇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

ㅡ그런 우연에게 별들의 윤무, 즉 춤을 추라는 것은 빛을 내는 것으로 움직이게 하라는 것을 말한다.

ㅡ빛은 올바른 이해이므로, 우연에게 올바른 이해로 나아가게 하라는 것과 같다.

ㅡ즉 그릇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ㅡ즉 올바른 이해를 세상에 알릴 필요를 말한다.

 

행동하는 긴 천둥이 투덜거리면서도 순종하여 따르는 창조의 번개처럼 웃었다는 건 뭘 말하나?

ㅡ이 구절은 애매하게 번역이 된 것 같은데, 관련해서 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Wenn ich je mit dem Lachen des schöpferischen Blitzes lachte:

     내가 창조적인 번개의 웃음소리로 웃었던 적이 있다면

     dem der lange Donner der That grollend, aber gehorsam nachfolgt:

     그 번개에 길게 울리는 천둥이 불평하듯 하지만 순종적으로 뒤따랐다

ㅡ이에 따라서 보면, 번개처럼 웃은 적이 있는지 가정하는 것이다.

ㅡ번개는 깨우침을 말하므로, 깨우침(의 웃음소리)에 따라 웃었던 적이 있는지 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다음으로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인지를 설명하는데, 번개가 친 뒤에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자연스레 따라오는 웃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즉 ‘결국 깨우침에 따라 자연스레 웃었던 적이 있다면’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대지라는 신들의 탁자에서 주사위 놀이를 했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대지가 현생을 나타내고, 주사위 놀이는 그야말로 놀이이지만, 차라투스트라에겐 기존 가치를 의심하고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ㅡ신들의 탁자라는 것은 신들의 통치하는 영역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ㅡ그리고 신들의 통치 영역은 사회적/종교적 규율의 통치 영역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ㅡ이에 따라서 본다면, “신들/사회적/종교적 규율이 통치하는 현생에서 기존 가치를 의심하고 평가했다면”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대지가 진동하고 부서지고 불의 강을 뿜어낸다는 건 뭘 말하나?

ㅡ앞서 주사위 놀이가 가치 평가를 말하고, 대지는 사회적/종교적 규율이 통치하는 영역이라면, 주사위 놀이로 인해서 기존 가치의 평가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서 가치전복이 나타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차라투스트라, 3권 12장 25절」에서 지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말하자면 지진이 일어나 많은 샘을 파묻고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갈증으로 죽어

     가겠지만, 지진은 내부에 있는 힘과 비밀스러운 것들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지진은 새로운 샘을 드러낸다. 옛 민족들의 지진 속에서 새로운 샘이 솟구친다.

ㅡ그렇기에 대지는 창조적인 새로운 말과 신들의 주사위 놀이로 인해 떠는 것이다.

ㅡ대지에 지진이 일어나 지각변동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잘 섞인 거품 부글거리는 양념 항아리와 섞는 항아리에 들어 있는 것을 실컷 마셨다는 건 뭘 말하나?

ㅡ항아리에 대해서 명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후술되는 내용을 보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한데 섞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ㅡ이는 기존 사회의 입장과 다른데, 기존 사회는 명확하게 선과 악을 구분했었다.

 

ㅡ그에 따라서 사회적 기준에 따라서 정형화된 틀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걸로 보이고, 이에 따라서 선악을 맥락 상에서 파악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장 먼 것을 가장 가까운 것에, 불을 정신에, 기쁨을 고통에, 고약한 것을 좋은 것에 부어준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이는 사회적 가치를 말하는데, 고약한 것과 좋은 것은 악과 선을 말한다.

ㅡ이를 기준으로 하나씩 해석이 가능해서, 사회적으로 기쁘게 하는 것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ㅡ불과 정신을 관련짓는 것은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ㅡ「차라투스트라, 2권 18장」을 보면, 불개가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불개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ㅡ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감정적인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데, 이러면 감정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구분 짓지 않는 관점을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ㅡ가장 먼 것을 가장 가까운 것에 부으는 것은 서로 반대된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로 취급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ㅡ앞서 감정과 이성을 하나로 취급하고, 고약한 것과 좋은 것을 하나로 취급하는 것이다.

ㅡ이로써 정형화된 분류틀을 부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것을 잘 섞이게 만드는 소금인가?

ㅡ정형화 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제시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을 잘 제시하는 존재로서, 반대되는 것들을 융합시키는 소금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소금이 물에 녹으면 이 물과 알코올이 더 잘 혼합된다고 한다.

 

악한 것마저 양념으로 거품의 흘러넘침을 위해 쓰일만 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악한 것도 쓸모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최선을 향하는 과정에서 최악이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ㅡ즉 최선의 흘러넘침을 위해서 최악이 필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바다와 바다 부류의 것 일체를 좋아하나? 왜 그것들이 분노하며 반박할 때 가장 좋아하나?

ㅡ바다는 소금물의 영역, 마시면 죽음에 이르는 곳을 말하며, 부조리한 사회를 말한다.

ㅡ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사회를 이상 사회로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부조리한 사회를 타겟으로 삼고 활동하게 된다.

ㅡ그런 면에서 이들의 영역에 있는 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롭다고 할 수 있다.

 

ㅡ그리고 이들과 토론함으로써, 이들이 반발하고 다투게 되면, 올바른 이해를 더 선보일 수 있기에,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좋은 기회이기는 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배척당할 수 있기에 마냥 좋지는 않지만.

ㅡ어쨌든 차라투스트라는 부조리한 사회에 올바른 이해를 제시할 수 있기에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발견되지 않은 것을 향해 돛을 몰아가는 탐색의 기쁨은 뭘 말하나? 어떤 항해자의 기쁨은 뭘 말하나?

ㅡ이는 의문을 해결해 나가는 탐구자의 기쁨을 말한다.

 

왜 기쁨에 찬 환호가 해안이 사라지고, 마지막 사슬이 떨어져 나갔다고 말하며, 경계없음이 일렁이고 시공이 빛난다고 말하나? 늙어버린 심장을 오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ㅡ해안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다.

ㅡ바다는 부조리한 사회이고, 육지는 사회를 벗어난 자의 영역이라 생각해봄직하다.

ㅡ해안의 사라짐은 육지로 나아가거나 바다로 나아간 것인데, 현재의 내용으로 보면, 바다로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ㅡ왜냐면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바다를 변화시키거나 돌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ㅡ마지막 사슬의 경우, 개인을 붙잡아 두는 사회적 규율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ㅡ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면, 이제 명확한 것이 없는 망망대해에 떠오르는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ㅡ스스로 자신만의 가치와 규율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ㅡ물론 여기서 어떤 가치와 규율을 가질 지는 선택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 1권 17장」

     그대는 그대가 자유롭다고 말하는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가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지배하는 사상에 대해서다.

 

     그대는 굴레에서 벗어나도 되는 그런 자인가?

     자신의 예속상태를 벗어 던지면서,

     자신의 마지막 가치마저 벗어 던지는 자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라고?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그대의 눈은 분명히 내게 말해주어야 한다.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라고

 

     그대 자신에게 그대의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법칙처럼 그대 위에 걸어둘 수 있는가?

     그대 자신이 그 법칙에 대한 판관이자 응징자일 수 있는가?

 

ㅡ이런 상황에서 사회에서는 이러한 개인을 비판하고 사회적 규율 속으로 되돌리거나 처벌하려고 하게 된다.

ㅡ그리고 이런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것을 가리켜서 노인, 늙은 존재로 지칭한다.

ㅡ왜냐면 늙어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를 지닐수록, 사회적 규율과 부조리에 순응하는 법을 익히기 때문이다.

ㅡ이에 따라서, 사회적 규율에 따르는 자를 놓고서, “늙어버린 심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ㅡ현재 차라투스트라의 기쁨에 찬 환호는 명확한 가치관과 규율이 없음에도 이상을 추구하며 나아가기로 마음먹은 상태로 보이며, 그에 따라서 나타날 사회적 저항도 부딪쳐 볼 요량으로 보인다.

ㅡ그래서 자신에게 늙어버린 심장이 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의 덕이 춤추는 자의 덕이라는 건 뭘 말하나?

ㅡ춤춘다는 것은 이상/올바름을 실현한다는 것을 말한다.

ㅡ그런 점에서 춤추는 자의 덕은 올바름을 실현하는 자가 추구하는 덕이고, 차라투스트라의 덕이 이러한 덕이라면, 올바름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ㅡ그런 존재라면 영원회귀를 바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이처럼 보는 게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황금과 에메랄드의 황홀경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에메랄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황금의 경우, 이전 「차라투스트라, 1권 22장」에서 언급되는 금의 경우와 같지 않나 싶다.

     내게 말해보라, 어찌하여 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는가?

     금이 혼하지 않고, 무용하고, 광채를 내지만 그 빛은 부드럽기 때문이다.

     금은 늘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지.

 

     금은 최고의 덕에 대한 이미지로서만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선사하는 자의 눈길은 금처럼 빛난다.

     금의 광채가 달과 해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다.

 

     최고의 덕은 흔하지 않고, 무용하고, 광채를 내지만 그 빛은 부드럽다.

    사하는 먹이 최고의 덕이다.

ㅡ여기서 금은 최고의 덕을 말하는데, 이에 따르면 황금과 에메랄드의 황홀경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최고의 덕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로 보인다.

ㅡ여기서 금은 앎을 나누는 덕을 말하므로, 앎을 나눠서 이상 사회를 이룩하려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차라투스트라의 악의는 웃음 짓는 악의이고, 장미 비탈과 백합 울타리 밑을 집으로 삼나?

ㅡ차라투스트라가 악의를 품는다면, 그것은 그릇되었기 때문이다.

ㅡ따라서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악의이고, 이는 만족스러움, 이상을 향하는 악의라고 할 수 있다.

 

ㅡ장미 비탈과 백합 울타리 밑은 차라투스트라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영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이와 관련해서 장미 비탈은 「차라투스트라, 2권 10장」에서 언급이 되었는데,

     나는 숲이며 어두운 나무들의 밤이다.

     내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측백나무 아래 장미꽃 비탈도 발견하리라.

ㅡ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겉과 다르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아름다운 영역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며, 장미 비탈을 언급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영역을 비유하는 듯하다.

 

웃음 속에 온갖 악이 나란히 자리하지만, 악은 고유한 지복에 의해 신성하게 되고 사면받는다고 하는데, 뭘 말하나?

ㅡ차라투스트라는 사회적으로 악한 의도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지만, 이러한 악의는 이상 사회를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ㅡ그런 점에서 고유한 행복, 이상 사회라는 목표를 가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고, 그러므로 신성한 것으로 인식되어 차라투스트라의 악의는 죄가 없다고 인식되게 된다.

 

무거운 것이 가볍게 되고, 모든 신체가 춤추는 자가 되며, 모든 정신이 새가 되는 것, 이것이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하는데, 뭘 말하나?

ㅡ각각의 경우는 모두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ㅡ무거운 것은 사회적 규율인데, 가볍게 되는 것은 이를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ㅡ모든 신체가 춤추는 자가 되는 것은 사회적 규율에 따라 신체가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의사가 반영되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신체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경향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ㅡ모든 정신이 새가 되는 것 역시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걸 말한다.

 

ㅡ이러한 것들이 자신의 전부인 경우, 영원회귀를 바라게 된다는 이야기다.

 

고요한 하늘을 펼쳐놓고, 고유의 날개로 하늘을 난다는 건 뭘 말하나?

ㅡ고요한 하늘은 올바른 이해를 말하고, 고유의 날개로 하늘을 난다는 것은 자신만의 가치와 규율에 따라서 세상을 산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ㅡ즉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가치관과 규율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깊디 깊은 빛의 아득함 속으로 헤엄쳐 간다는 것은 뭘 말하나?

ㅡ빛은 올바른 이해를 말하므로, 올바름 이해 속으로 나아간다는 걸 말한다.

 

새의 지혜는 뭘 말하나?

ㅡ고정된 가치나 규율 없이 맥락 속에서 가치와 규율을 찾는 모습을 말한다.

ㅡ이는 하늘을 나는 새에게 위 아래에 대한 인식이 모호해진다는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가벼운 자는 노래를 하라고 하는가? 왜 말하면 안 되나?

ㅡ여기서는 말과 노래가 대비되는데, 말은 무거운 자들을 위한 것이다.

ㅡ무거운 자들은 날지 못하는 자, 억압된 자로 볼 수 있고, 따라서 규율을 따르는 자들로 생각할 수 있다.

ㅡ무거운 자들, 사회적 규율을 따르는 자들은 규율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말하는데, 가벼운 자들에게 말을 하지 말고 노래를 하라는 건 가벼운 자들은 규율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말하지 말고 규율을 벗어나서 생각하고 말하라는 이야기가 된다.

 

왜 가벼운 자들에게 모든 말은 거짓인가?

ㅡ가벼운 자들에게 있어 말, 사회적 규율은 그릇된 것이기에,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언급된다.